Become a music monster overnight! RAW novel - Chapter 90
하루 아침에 음악괴수! 81화
27장. RRHOF
brilliant struggle은 6주차를 마지막으로 빌보드 핫 100의 1위 자리를 내려오게 되었다.
1주 혹은 2주는 더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내부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허무하게 1위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도 삼촌들도 회사 내의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아쉬워하는 이들은 없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brilliant struggle을 비롯해 ‘Level up’ 이외에 블랙 타이거의 영어 버전 곡들 모두가 20위 안에 들어선 덕분이다.
그중 10위 안에 든 곡이 4곡이나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일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영어 버전이 아닌 곡들 또한 핫 100위 안에 5곡이나 든 점은 지금 빌보드에서 블랙 타이거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아쉽지 않은 첫 번째 이유가 그렇다면 두 번째 이유는 사실상 결정적이었다.
brilliant struggle을 밀어내고 빌보드 핫 100에 오른 곡이 다름 아닌 Painkiller였기 때문이다.
“반응이 좋을 것이야 당연히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치도 못했었다.
그랬다.
겨우 사흘이었다.
빌보드 핫 100 1위 자리를 강탈하는 데 걸린 시간은.
아니, 이마저도 집계 방식과 그에 필요한 시간 때문에 사흘인 것이지 사실상 이틀도 안 걸렸던 것 같았다.
그만큼 Painkiller는 미친 반응을 보였었다.
-Painkiller & black tiger 두 번째 프로젝트 신곡 ‘Painkiller’에 호평이 끝이질 않아!-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구성! 천재적 구상! 락의 새로운 발견!-
-클래식과 락의 미친 듯한 협연!-
-바이올리니스트 거장 데이비드 가렛 “‘Painkiller’는 내가 막연히 바라며 꿈꾸던 것의 정수”라 극찬을 남겨-
-피아노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 ‘Painkiller’의 피아니스트와 협주곡을 하고 싶다고 의사를 보이다.-
-재즈 피아노 거장 프레드 허쉬 ‘Painkiller’의 작곡가에게 찬사를 남기다.-
앞서의 기사들 모두가 ‘Painkiller’가 발표된 지 이틀째에 난 기사였다.
특히나 재즈 피아노 거장 프레드 허쉬는 민망할 정도로 많은 매체에 찬사를 남겼다.
그중 문일범 삼촌이 억지로 보여주다시피 했던 인상 깊은 인터뷰 하나를 꼽으면 이러했다.
“재즈뿐 아니라 모든 곡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기억에 남는 것’이다. 악보 프로그램으로 곡을 쓰면 뮤지션에겐 매력적일 수 있지만, 일반 대중에겐 매력적이지 않은 작곡을 하게 된다. 이는 연주자가 자신의 것으로 소리를 만들 여지를 남겨주지 않으면서 생긴 일이다.
그런 점에서 ‘Painkiller’는 곡의 완성도와 별개로 그 여지를 충분히 남긴 대작이다. YC가 이걸 노리고 작곡을 한 것이라면 단호히 말하건대, 우리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이 시대에 재림을 하였음에 기뻐해야 할 것이다.”
기어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논하자 나름 뻔뻔해졌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모차르트는 4세 때 피아노를 연주했고 5세에는 작곡을 했다.
10대에 오페라 작곡을 비롯해 미사곡과 사교적 작품들을 많이 썼고 이후 어머니와 함께한 2년간의 만하임, 파리 등지로의 여행에서도 파리교향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끝내 “피가로의 결혼”(1786), “돈지오반니”(1787)와 함께 3대 교향곡이라 불리는 제39, 40, 41 교향곡을 작곡해 낸 천재였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걸 35세라는 짧은 나이에 죽기 전 이루어내었다는 점이다.
일생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그런 천재와 자신을 비교하다니 아무리 괴수를 자처하는 나라고 해도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이처럼 짧은 시간 동안 미국 전역은 물론 세계를 뜨겁게 달굴 수 있었던 건.
단순히 홍보를 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여러 우연들이 겹치면서 가능한 일이다.
이중 가장 영향력이 큰 우연이라면 생각보다 더 크게 번진 Painkiller의 극성팬과 YC의 팬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다.
사실상 Painkiller의 극성팬들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모양새였던 논쟁은 그사이 인종차별 등의 문제로도 이어져갔다.
그 과정에서 블랙 타이거의 드러머였던 곽도훈 삼촌의 과거가 알려졌고, 이로 인해 각 방송사의 메인 뉴스에서도 소개되기도 했다.
그렇게 열기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쯤. Painkiller가 나온 것이다.
자연 락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호기심 때문이라도 이 모든 논쟁의 시작이었던 Painkiller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라디오의 경우에는 아예 대놓고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이슈로 앞다투어가며 틀어내었으니, 앞서 이틀이라는 시간을 말한 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겠지.”
Painkiller가 이처럼 처음부터 불타오를 줄 몰랐던 터라, Painkiller의 피아노 연주자가 나라는 점을 숨겼었다.
마빈을 비롯해 내부에서는 분명 피아니스트에 대한 관심이 폭발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 만큼, 이를 홍보의 전략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정말 이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제대로 먹혀들고 말았다.
클래식계의 팬들은 물론 이쪽 업계의 비평가들과 피아니스트들도 이 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를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대단했다.
-도대체 누구인가? Painkiller의 피아니스트?-
-후보자들 모두 자신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대다!-
-가장 큰 후보자로 꼽혔던 ‘채플린’ 뒤늦게 소식을 듣고 자신이 아니다라고 의사를 밝히며 자신 또한 그와 함께 협주를 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다.-
-클래식 팬들 무명의 피아니스트일지 모른다고 의사를 드러내다. 비평가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
덕분에 Painkiller의 피아니스트의 관심도는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관심거리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정체를 밝히기로 했다.
Painkiller를 좋아하는 이들도 많지만 보수적인 클래식계 쪽에서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테일러 또한 논쟁거리로 피로도를 높이고 싶지 않았던 나의 생각과 맞아떨어져 1위에 오른 지 2주차가 되었을 때 이 사실을 밝혔다.
-YC 엔터 ‘Painkiller의 피아니스트의 정체는 Painkiller의 프로듀서였던 YC’라 밝혀-
단 한 줄에 불과한 이 기사는 당연하겠지만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되었다.
실제로 모두가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아시아 쪽에서는 예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콘서트에서 보여주었던 피아노 연주를 들은 팬들도 많았던 데다, 그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실력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Painkiller의 연주는 클래식 쪽에 가까운 형태라 기존과는 달랐기에 대부분이 긴가민가한 태도를 보였었다.
여하튼 피아노 연주자가 나라는 게 밝혀지자, 이후 정말 많은 곳에서 초청을 받았다.
프로그램으로는 케인 쇼보다도 더 큰 대형 프로그램에서도 초청이 왔을 정도였고, 이 외에도 여러 분야의 뮤지션들이 콜라보를 요구했다.
흥미로운 건 클래식계 쪽의 음악가들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래전부터 말한 피아노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나 SNS로 이전에 러브콜을 보낸 채플린이 그들 중에 포함된 건 당연한 일이다.
이외에도 가장 몸이 달았던 건 광고업계 쪽이었다.
대부분의 광고를 단기로 끊었던 만큼, 벌써부터 재계약을 하기 위해 시동을 거는 중이었다.
그중에는 콧대가 높은 루이뷔통의 베르나르 아르노도 있었다.
나는 그 소식을 가져온 테일러를 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 테일러 당신의 말대로군요. 그는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기회가 찾아왔을 줄 몰랐습니다. 일단 좀 더 지켜보면서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가벼이 대답하는 그였지만,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 속에 담긴 서늘함을 알고 있었다.
‘베르나르 아르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꼴을 보게 되겠군.’
사실 루이뷔통과는 별개로 베르나르 아르노는 그리 달가운 인사는 아니었다.
기억 속 녀석이 그토록 러브콜을 보냈음에도 협찬의 의사조차 보내지 않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몰아치는 연락 속에서 처음으로 잡은 스케줄은 시상식이었다.
물론 국내의 그저 그런 시상식이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상의 규모가 작아서가 아니라, 어차피 국내의 시상식들은 3대 엔터들의 놀이터가 된 지 오래였던 만큼 유의미한 상을 받을 수도 없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말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 는 속담 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내년부터는 그러기 쉽지 않겠지만.’
중국에 굴린 공이 제대로 굴러만 간다면 3대 엔터들은 자금의 압박을 받을 게 분명했다.
이때 이들의 주식을 사들여 영향력을 넓힐 생각이다.
이 일은 단순히 영향력만 넓히는 꼴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로 인해 빌보드 진출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지금, 적어도 그 진출의 문을 통과할 역량을 가진 3대 엔터들은 엄청난 성장을 거듭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굳이 견제의 의미가 아니어도 투자처로서도 훌륭한 곳인 건 분명했다.
여하튼 참가한 시상식은 그런 국내의 시상식이 아닌 미국 본토에서 열리는 빌보드 시상식이었다.
“겁나 떨린다! 우황청심환 또 없냐?”
“새끼. 약해 빠져서는.”
“너 말이랑 행동이 맞지가 않잖아. 3개나 먹은 놈이 그리 말하다니.”
“20년 전에 끊은 담배가 갑자기 미친 듯이 땡긴다. 누구 담배 없어?”
“누구냐! 내 꿍쳐 든 보드카 다 먹은 녀석이.”
이제 조금 있으면 차에서 내려야 하건만, 앞다투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삼촌들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행히 잠시 후 차 문이 열리고 빌보드 시상식 레드카펫에 내려서면서부터는 그런 추태들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긴장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크게 상관없었을지 모른다.
포토존에서 몰아치는 질문의 대부분이 나를 향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사진도 마찬가지라, 만약 선글라스를 챙겨가지 못했다면 곤란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감사합니다.”
나는 능숙하게 이들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하며 사진에 찍히고는 여전히 어딘가 멍해져 있는 삼촌들을 이끌고 빌보드 시상식으로 들어섰다.
안내자에 의해 빌보드 시상식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뭐지? 차에서 내린 것은 기억나는데?”
그제서야 삼촌들은 긴장이 풀렸는지 시답잖은 농담을 흘리며 주변을 힐끔힐끔 쳐다보기 바빴다.
점차 비워진 자리를 채우기 시작한 스타들 때문이다.
락을 사랑하는 삼촌들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름만 들어도 아는 세계적 스타들을 모르지는 않았다.
나 또한 기억 속 녀석과는 별개로 이처럼 많은 스타들을 보게 되는 건 처음이라 신기하기는 했다.
그러나 삼촌들과는 달리 그들에게 관심을 오래 두지는 못했다.
익숙한 느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신경을 쓰기에는 나에게 있어 지금 큰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어서다.
‘드디어 라라랜드가 컴백을!’
정말 길고 긴 암흑 속에서 컴백을 하는 것이었기에 나로서는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동안 나는 라라랜드 소속사이던 알렉스 엔터의 지분을 10%에서 30%로 늘렸다.
인수를 하려 한 건 아니었고, 준비 과정에서 라라랜드의 성공을 확신했기에 내린 투자였다.
-YC 알렉스 엔터 30% 지분 확보!-
-빌보드 정상에 오른 YC가 선택한 아이돌 라라랜드! 메인 곡 ‘잔소리’ 작곡가 YC로 밝혀져?-
-비상장인 YC 엔터에 아쉬움을 보이던 개미들 알렉스 엔터로 몰려!-
실제로 그 투자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덕분에 주주들은 정말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라라랜드의 컴백을 지켜보는 중이라고 한다.
이들이 무성한 소문의 반의반이라도 맞아떨어져야 최소 본전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