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126)
126화 제1장 리턴(1)
오전 4시, 당직실은 고요했다.
레지던트들은 2층 침대에 각각 몸을 누인 채 쿨쿨 자고 있었다.
당직 근무자인 홍선아도 잠을 이기지 못해 꾸벅꾸벅 졸았다.
역시 당직 근무 중인 나는 홍선아 곁에서 내가 정리해 둔 문서를 살펴보고 있었다.
소아 흉부외과 대가들의 수술법과 요령.
지난 8개월 동안 관찰하고 연구했던 데이터들이 이 문서 안에 담겨 있었다.
자료를 만들면서 나는 과거에 비해 3단계쯤 성장했다.
지금 당장 수술실로 가도 소아의 심장과 폐·식도 수술을 집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소아 흉부외과에서 배운 다양하면서도 꼼꼼한 수술 요령을 흉부외과에 접목할 자신감도 있었다.
비록 아직 인턴에 머물러 있긴 하지만
현재의 나는 과거 부교수였던 시절보다 기술적으로 보나 인격적으로 보나 훨씬 성숙했다.
‘빠르긴 빠르네.’
나는 벽걸이 달력을 보며 새삼 감탄했다.
소아 흉부외과에 들어온 것이 4월 초인데 벌써 12월 초가 되었다.
인턴 근무는 막바지로 치달아 이번 달이 마지막 근무였다.
흉부외과에서 최후의 한 달을 보내고 나면 흉부외과 레지던트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흉부외과.
나의 지난 후회와 원망과 기쁨과 과오와 애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
나는 두 눈을 감고 침대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흉부외과에서 인턴 생활 중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들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오래된 기억은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흐릿했다.
녹이 슨 것처럼 일부 변질되었으며 어떤 것은 도둑맞은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중요한 사건들은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전부 과거의 내게 상처가 됐던 사건들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 옛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흉부외과를 고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시 빠졌던 잡념에서 탈출해.
자세를 고쳐 잡고 수술 자료를 공부했다.
시간은 쭉쭉 뻗어 나가 금방 아침 5시 30분이 되었다.
나는 짝꿍 인턴과 루틴 잡을 시작했다.
ABGA(동맥혈 채혈)를 하고 드레싱을 하고 검사 동의서를 받고 등등.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던 일이건만 오늘따라 루틴 잡이 낯설고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아마 소아 흉부외과에서 하는 마지막 루틴 잡이기 때문이겠지.
루틴 잡이 끝난 뒤 홍선아를 도와 컨퍼런스 준비를 하고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마지막 스케줄인 오전 회진마저 끝마치면서 병원의 하루 스케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레지던트들은 각각 수술방과 중환자실로 떠나기 전 나를 찾아왔다.
“믿음아, 고생 많았다. 소아 흉부외과에서 같이 일했으면 좋겠지만… 그건 욕심이겠지? 하여간 몸 관리 잘하고 흉부외과에서도 잘해라.”
“떠난다니까 섭섭하네. 이젠 거의 가족 같은 느낌이었는데.”
“넌 어딜 가든지 인정받을 거니까 걱정 안 한다. 가끔 연락하고.”
레지던트들의 작별 인사를 나는 감사하게 받았다.
그들과의 이별이 아쉬운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아 흉부외과에서 근무하는 8개월 동안 어찌 정이 쌓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안타까운 감정과 별개로 나는 떠나야 했다.
전생의 나와 전생의 악연과 전생의 인연들과 결판을 지어야 했다.
그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승부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다들 건강하시고 자주 연락드릴게요.”
레지던트들과 아쉽게 헤어진 뒤 당직실로 복귀했다.
나와 내 짝꿍 인턴을 대신할 인턴 두 명이 벌써 당직실에 도착해 있었다.
그중의 한 명은 얼굴이 무척 낯익었다.
남초롱이었으니까.
“드디어 여기서 보는구나.”
“그러네.”
남초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돌하게도 나를 위해 흉부외과 전공을 선택하겠다던 남초롱.
그런 그녀에게 나는 소아 흉부외과를 제안했고, 남초롱은 받아들여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초롱은 하늘이 내려 준, 소중하면서도 감사한 인연이었다.
가족 이외에 내가 기댄 사람은 남초롱이 처음이었으며.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남초롱이 유일했으니까.
“앉아. 인수인계 시작할게.”
“그래도 선배라고 익숙하게 리드하네?”
“그냥 선배가 아니라 무려 8개월 선배니까. 내 말을 잘 들어 두면 자다가도 떡이 나올 수 있어.”
우스갯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최후의 인수인계를 했다.
업무 중에 사용하는 크고 작은 팁.
효율적인 동선과 시간 관리.
마지막으로 인턴 업무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레지던트들의 성격 및 특징 파악까지.
남초롱과 남초롱 짝꿍 인턴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으로 인수인계의 막이 내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초롱과 악수를 한 번 더 나눈 뒤 소아 흉부외과 병동을 떠났다.
미련이 남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든 사람들의 모습은 멀찌감치 치워 버렸다.
거침없이 어린이 병원을 나와 본관으로 복귀하는 나.
흉부외과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 * *
흉부외과로 뻗어 나가는 통로를 걷던 도중 나는 의외의 인물을 마주쳤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손태호였다.
큰아버지가 신원대학교 병원의 진료 부원장으로 근무하는 사이코패스 이민호.
이민호의 오른팔이 바로 손태호였다.
손태호는 의대에 다닐 때부터 나와 질긴 악연이 있었다.
마주칠 때마다 기분 나쁜 말투와 기분 나쁜 언어로 내 감정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아마 남의 속을 긁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세계 일류가 되지 않을까.
“하. 재수 옴 붙… 아니, 똥 붙었네. 하필이면 짝꿍 인턴이 이믿음 너냐?”
손태호가 나를 발견하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불쾌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흉부외과에서 거북한 손태호와 근무를 하게 되다니…….
아무래도 내가 소아 흉부외과에서 8개월을 지내다 보니 전생과 달리 인턴 로테이션이 꼬였던 모양이었다.
전생의 나는 손태호와 인턴 근무를 한 적이 없었다.
이민호와 원한을 산 적이 없으므로 손태호와 마찰을 빚은 적도 없었고.
‘그럼 누구를 탓할 수도 없겠군.’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손태호와 마주친 것은 내가 인물 관계와 시간선을 다 바꿨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자업자득이랄까.
그렇다면 결자해지라고 내가 꼬아 놓은 매듭은 내가 풀 수밖에.
“네 얼굴이 역겨운 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공격적인 언사를 펼쳤다.
먼저 시비를 건 사람은 손태호였다.
또한 지금처럼 상대가 명백히 적대감을 드러낼 때는 맞불을 놓는 게 최선이었다.
허허 웃거나 침묵하면 만만한 사람 취급당한다.
“뭐? 역겨워? 너 말 다 했냐?”
사납게 도끼눈을 뜨는 손태호.
안 그래도 가느다란 눈매는 더 가늘어져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많이 자제한 건데 삼킨 말들, 다 해 줄까? 네 귀에서 피가 나도 괜찮겠어?”
“이 새끼가 못 본 사이에 하라는 인턴 수련은 안 하고 입 터는 수련만 했나?”
“네 이야기를 왜 나한테 갖다 붙이는 줄 모르겠다. 너야말로 입만 수련 중이잖아?”
“…….”
“이민호한테 아부 떨어서 어떻게든 출세할 생각으로 가득 찼으니까.”
나는 손태호의 치부를 송곳처럼 날카롭게 찔렀다.
이민호 주변에 있는 놈들의 대가리 속에 든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이민호에게 호감 사기.
그 호감으로 자신의 승진이나 개원에 도움받기 등등.
이민호에게 아양을 떨어서 떨어질 콩고물이 없다면 누가 이민호와 가까이 지내려 한단 말인가.
“그게 뭐 어때서?”
손태호는 어느새 냉정을 되찾았다.
“너처럼 백 없고 모난 인간은 결국 어느 지점에서 낙오하기 마련이야.”
“…….”
“끝까지 살아남는 인간은 나 같은 인간이라고. 그 나이를 먹고도 사회의 이치를 모르겠니?”
손태호의 저급하고 속물에 찌든 논리에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초중고에 의대를 졸업하고 이제 막 병원 인턴 생활을 시작한 손태호였다.
그런 손태호가 벌써 세상을 다 있다는 듯 겁 없이 촐랑거리고 있었다.
전생에서 단맛, 쓴맛, 신맛, 매운맛, 짠맛까지 다 보고 온 내 눈에는 손태호가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이민호가 끝까지 널 책임져 줄 것 같아?”
“당연하지. 난 쓸모가 있으니까. 쓸모가 있으면 버림받지 않아.”
손태호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똥 닦은 휴지를 챙겨 다니는 사람은 없어. 그런 휴지는 필연적으로 버려지지. 그리고 그게 너야.”
이민호에게 충성을 다한 손태호의 비극적인 결말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먼 미래에 손태호에게 닥칠 일을 비유해서 한마디 해 주었다.
“재수 없는 새끼. 꼭 너 같은 비유만 하네.”
치고받고 싸우는 사이 도착한 흉부외과 병동.
병동 복도에 들어선 순간 나는 손태호와 다투던 것도 잊고 깊은 감회에 빠졌다.
죽은 후 새로운 삶을 얻었던 것도.
새 삶을 얻고 나서 실력을 키우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것도.
다 흉부외과로 돌아와 활약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흉부외과는 내 과거와 미래마저 고스란히 담긴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번 달 흉부외과에서 근무하게 된 이믿음입니다.”
스테이션 앞에 서서 나는 근무 중인 간호사에게 인사를 했다.
이지원 간호사.
다람쥐처럼 귀엽고 앙증맞은 외모에 체구가 작은 간호사.
감수성이 풍부한 이지원은 중견 간호사가 되어 에세이를 출판한다.
나와 사이가 좋아서 에세이 추천사를 써 주기도 했는데.
그 일을 미래의 일이라고 해야 할지, 과거의 일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살짝 헷갈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당직실은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이지원이 친절하게 당직실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뒤 당직실로 이동했다.
사실 당직실의 위치는 너무나 잘 알았지만.
드르르륵.
당직실에 들어가자 짐을 챙기고 있는 저번 달 흉부외과 인턴들이 있었다.
나와 손태호는 짧게 인수인계를 받았다.
인턴은 이번 달이 마지막이었고, 업무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터라 긴말은 필요 없었다.
“레지던트 선생님은 어디 있어?”
“2년 차 선생님 두 분 계신데, 한 분은 중환자실에서 처치 중이고 다른 한 분은 방금 응급실 내려갔어.”
“…….”
“나머지 선생님들은 전부 수술방에 있고. 거짓말하나 안 보태고 여긴 지옥이다. 각오 단단히 해.”
저번 달 인턴들이 겁을 주고 당직실을 떠났다.
‘그 지옥에서 돌아온 게 나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나는 간신히 참아야 했다.
당직 레지던트가 자리를 비웠으므로 나와 손태호는 당직실에서 계속 대기했다.
당직실을 비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 어디서 콜이 올지 몰랐으니까.
지이이잉.
이믿음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고,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전화가 울렸다.
전화는 내가 받았다.
“흉부외과입니다.”
-선생님, 스테이션인데요. 레지던트 선생님, 응급실에서 아직 안 올라오셨죠?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801호 양태웅 환자분이 심장 두근거림과 호흡 곤란 호소하세요. 이틀 뒤에 관상동맥 우회술 예정되어 있는 환자거든요.
간호사의 노티에 느슨했던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수술 예정 환자에게 닥친 흉통과 호흡 곤란.
증상 자체는 흔하고 대수롭지 않아 보였으나 환자의 처치를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이 아니었다.
나는 EMR(전자 의무 기록)에 접속해서 신속하게 환자의 간호 기록지를 훑었다.
환자의 개요를 파악한 뒤 진료를 볼 계획이었다.
“선생님, 일단 저라도 갈게요. 오전이랑 똑같이 포터블 ECG(심전도) 준비해 주세요.”
인턴답지 않게 똑 부러진 오더를 내리고 나는 당직실을 나왔다.
근무를 시작하자마자 병동 환자 진료라니…….
흉부외과에서 시작하는 두 번째 의사 생활은 역시 만만치 않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