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150)
150화 제5장 한번 붙어 보자(5)
지이이잉.
수술실에서 나온 이진영은 수술 마스크와 장갑, 가운 등을 내팽개치듯이 수거함에 던졌다.
지금까지는 가까스로 점잖은 척했지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풋내기 인턴 주제에 감히 과장의 수술을 검사해?
이진영은 자신의 문합 완성도를 의심한 이믿음의 행동이 영 괘씸했다.
이믿음의 말대로 실시한 환류 테스트에서 자신의 문합이 부실했다는 점이 사실로 밝혀진 것도 못마땅했다.
흉부외과 과장의 체면이 진흙탕에 처박힌 셈이었으니까.
[과장님, 저기… 누수 있는데요?]자존심을 은근히 깔아뭉갰던 이믿음의 말과 말투가 떠오르자 이진영의 두 볼은 화끈 달아올랐다.
치욕의 열기였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본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12월 중순의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매서운 겨울바람은 그의 얼굴을 할퀴었으며 의사 가운을 제멋대로 흔들며 회롱하기도 했다.
이진영은 겨울 추위를 맞닥뜨린 후에야 속에서 끓어오르던 열불을 식힐 수 있었다.
찰칵.
후우우우.
이진영이 뿜어낸 담배 연기가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는 다른 스태프들의 연기와 합쳐져 하늘로 솟구쳤다.
그 모습은 꼭 무언가를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것 같았다.
담배를 피우며 이진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추어도 아니거늘 왜 우회혈관 문합이 그렇게 엉성했을까.
내일 진료부원장과 함께 골프 치러 갈 생각에 벌써 마음이 들떴을까.
아니면 나이 탓에 수술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일까.
이진영은 후자에 더 무게를 두었다.
첫 번째로 연결했던 좌전하행지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시간 후에 이어진 좌선회관상동맥에서만 혈관 누수가 생겼으니까.
“과장님, 여기 계실 줄 알았습니다.”
안경 낀 호리호리한 중년 사내가 이진영에게 다가왔다.
흉부외과 조교수 박성진.
박성진은 이진영의 오른팔로 수술을 잘하고 처세에도 밝아 이진영이 특별히 아끼고 있었다.
“담배도 안 피우는 사람이 꾸역꾸역 옥상에 올라오는군.”
“저라고 담배가 좋아서 오겠습니까? 과장님 얼굴이나 한 번 더 뵈려고 오는 거죠.”
박성진의 사탕발림에 이진영은 껄껄 웃었다.
이래서 박성진을 싫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수술이 평소보다 늦으신 거 아닙니까? 한 40분 전에 끝났어야 했던 것 같은데.”
“수술 중에 좀 피곤한 일이 있었지.”
이진영은 대충 얼버무렸다.
이믿음에게 당한 굴욕을 굳이 본인의 입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노인네는 동태가 어때?”
이진영은 양순재를 화제로 돌렸다.
근래 이진영의 목표는 양순재를 지방 분원으로 쫓아내고 박성진을 부교수로 올리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흉부외과를 그의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었으니까.
노인네.
왜 귀찮게 복귀해서 날 피곤하게 하는 거야.
맨날 환자만 위하지 말고 출세하고 싶은 후배도 좀 위할 것이지.
전직 과장이자 선배인 양순재는 이진영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양순재를 끌어내린 계획을 진행했던 것이고.
“안 그래도 방금 전까지 휴게실에서 대화하고 오는 중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던대요?”
“순진한 양반이군. 내가 아직도 선배님, 선배님거리던 후배인 줄 아는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 혹시 이믿음이라는 인턴 아나?”
“아…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친구지?”
“서 선생 말로는 수술 어시스트가 끝내준다고 하더군요. 응급으로 CABG를 할 때 이믿음을 퍼스트로 세웠는데 별 탈 없이 끝냈답니다.”
“이… 인턴이 우회술 퍼스트를? 컥, 컥.”
이진영은 너무 놀란 나머지 담배 연기에 사레들리고 말았다.
“농담이 지나친 거 아닌가?”
“서 선생 말로는 그랬습니다. 워낙 우직한 친구긴 해도 이번만큼은 저도 믿기 어렵더군요.”
박성진이 전해 준 정보를 들으며 이진영은 연거푸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까 이믿음이 보여 준 활약상을 생각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인턴 주제에 인비저블 리킹을 알고 있을 줄이야.
설령 안다고 해도 실전에서 현상을 단번에 꿰뚫어 줄이야.
이진영은 이믿음이 건방진 것과는 별개로 이믿음의 능력만큼은 인정했다.
“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방금 끝난 수술에 이믿음이 들어왔거든. 좀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어서 말이야.”
“듣자 하니 양 교수 제자라던데요? 의대 시절부터 키웠다고…….”
“그래? 어쩐지 하는 꼴이 재수 없더라니. 크아아악, 퉤!”
이진영은 이믿음에게 탄 부정을 떨치기 위해 휴지통에 걸쭉한 가래를 뱉었다.
어쩐지 하는 짓 하나하나가 미워 보이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정의롭고 헌신하는 척하는 노인네의 제자였으니까.
‘차라리 잘된 걸지도…….’
이진영은 이믿음이 양순재의 제자라는 사실을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였다.
3개월 뒤 인사 평가가 끝나면 양순재는 지방 분원으로 쫓겨날 것이다.
이믿음 또한 스승을 잃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것이고, 그때 이믿음에게 분원행을 제안한다면 어떨까.
이믿음은 제안을 덥석 물지 않을까.
두 사람이 지방에서 지지고 볶을 그림을 상상하니 이진영은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정말 무슨 일 있으셨던 거 아닙니까?”
“아냐,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보다 자네는 지금처럼만 하라고. 양 교수를 위하는 척하면서 정보만 살살 빼 오란 말이지.”
이진영은 담배를 비벼 끄고 박성진의 어깨를 다독였다.
앞으로 딱 3개월이었다.
양순재와의 끈질긴 악연을 끊어 내는 것도.
선을 넘은 인턴 이믿음을 내치는 것도.
* * *
지이이잉.
중환자실에 들어서자마자 강한 소독약 냄새와 살 썩는 냄새, 사람의 각종 분비물 냄새가 섞인 고약한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이것을 나 혼자서 죽음의 냄새라고 불렀다.
죽음이 가까운 환자들은 항상 이와 비슷한 냄새를 풍겼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고약한 냄새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힘껏 들이마셨다.
이것 역시 나만의 의식이었다.
죽음은 항상 곁에 있으니 방심하지 말자는.
“방금 관상동맥 우회술 끝난 유정해 환자인데요. 저쪽으로 옮기면 될까요?”
“네, 그러세요.”
나는 간호사들이 비워 둔 자리에 환자의 침상을 이동시키고 고정시켰다.
중환자실을 떠나기 전 최종적으로 환자의 상태를 체크했다.
혈압, 맥박, 체온, 호흡, 산소포화도, 심전도 그래프 등등.
모든 의학적 지표가 환자를 향해 웃어 주고 있었다.
바이탈 수치로만 놓고 본다면 환자는 일상을 활보하는 정상인이나 다름없었다.
편안하게 잠자는 듯한 환자를 지켜보고 있자니 나도 편안하게 마음이 놓였다.
‘내가 있었길래 망정이지…….’
전생에 그녀는 아마 지금까지도 수술실에 있을 것이다.
어설프게 문합한 부위에서 출혈이 터지면서 빈사 상태에 몰렸을 것이다.
끝내 출혈을 막지 못해 사망했을 것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환자를 살린 건 100퍼센트 내 덕분이었다.
내가 문합을 확인하는 환류 테스트까지 집요하게 집중력을 유지한 덕분이었다.
수술이 끝날 무렵,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의식이 느슨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졌으니까.
환자를 살려 낸 뿌듯함을 충분히 음미한 후 나는 스테이션으로 이동했다.
수술 후 처방을 내린 뒤 중환자실을 나왔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중환자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유정해 환자의 보호자가 나를 발견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겠어요. 수술은 다 교수님이 하셨는데요.”
“그래도요. 저희 어머니하고 제게도 잘해 주셨잖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전생에서 안경에 김이 서릴 정도로 울었던 보호자.
나를 원망하여 내 가슴을 찢어지게 만들었던 보호자.
그녀가 지금 나를 보며 방긋 웃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이 꽃 같은 미소를 보고 싶어서 수술실에서 고군분투했는지 모르겠다.
“보호자분은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으세요.”
“감… 감사합니다.”
“환자분 건강하게 퇴원하실 때까지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나는 보호자와 따뜻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병동으로 이동했다.
전생의 비극을 잘 마무리했음에도 이상하게 기운이 빠졌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약간의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나는 인턴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외래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하긴, 힘들 수밖에 없었지. 힘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지도…….’
돌이켜 보면 지난 며칠간 나는 삼각형의 꼭짓점 위에 올라선 것처럼 위태로운 나날을 보냈다.
첫째, 손태호가 나와 황은우 사이를 이간질하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렀다.
그로 인해 손태호와 이민호 사이를 이간질하는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했다.
둘째, 돈이 아깝다며 검사를 거부한 환자를 가까스로 설득해서 수술실로 보냈다.
정규가 아닌 응급이라 스태프가 모자란 상황.
나는 서인석 펠로우를 도와 관상동맥 우회술을 소화해 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기구한 날들이었지만 놀랍게도 내 앞에는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형 봉합 연습을 하러 찾아간 회의실에서.
나는 놀라운 첩보를 입수했다.
이 과장이 양 교수를 내쫓으려 한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엿듣고 만 것이다.
그로 인해 다급하게 양 교수를 찾아갔다.
당시 녹음 파일을 들려주고 이 과장에게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 교수는 고뇌 끝에 내 주장을 받아들여 주었다.
이번 흉강경 폐암 수술에 내 뜻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주겠다고 했다.
‘이제는 내가 교수님께 보답할 차례란 말이지.’
의대 시절 내게 모든 것을 베풀어 준 양 교수였다.
그런 양 교수에게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은 것은 흉강경 폐암 수술을 성공시키는 것뿐이었다.
수술을 성공시켜 양 교수를 쫓아내려는 악독한 이 과장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나는 흉강경 폐암 수술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머릿속으로 작성했다.
방대한 논문 자료 수집.
마취의를 포함한 수술 스태프 선발.
모형을 활용한 수술 연습 등등.
일정은 빠듯하고 험난했지만 미래의 의료 기술을 경험해 본 나라면 충분히 수술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래야 회귀한 보람이 있을 테지.’
나는 볼을 가볍게 두드리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시 씩씩하게 병동으로 돌아갔다.
“허 선배한테 이야기는 들었다. 과장님 수술에서 인간도 아니었다며?”
1년 차 황은우가 익살맞은 말투로 말을 걸었다.
“그 뭐야? 인비저블 리킹이라고 했나? 교과서에도 안 나오는 걸 용케 알았네?”
“논문에서 우연히 본 내용이 나와서요.”
“그래. 인턴인데 논문까지 찾아보고, 넌 태생부터 흉부외과의야. 그런 의미에서 전공 선택할 때 배신 때리기 없기다?”
“만약 제가 배신을 때리면 선배가 저를 죽도록 때리지 않을까요?”
“암, 그것도 맞는 말이지.”
황은우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태호의 이간질 사건을 넘긴 후 우리 둘 사이는 더욱 친밀해졌다.
비 온 뒤의 땅이 굳는다는 속담은 적어도 나와 황은우 사이에서는 통용되는 속담이었다.
“다음 오퍼(수술) 언제 있어?”
“1시간 정도 여유 있어요.”
“그럼 좀 쉬어 둬. 과장님 수술이라 피곤했을 텐데.”
“그럼 염치 불고하고 딱 30분만 잘게요. 감사합니다, 선배.”
황은우의 호의를 받아들여 침대로 향하던 순간 드르륵 당직실 문이 열렸다.
불청객 손태호가 불쑥 나타나 나를 찾았다.
“믿음아, 잠깐 이야기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