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151)
151화 제1장 날실과 씨실(1)
나는 손태호를 뒤따라 회의실로 이동했다.
예상치 못한 호출이자 원수의 호출이었기에 졸린 기운이 싹 달아났다.
손태호가 나와 단둘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대체 뭘까.
저번처럼 녹음 파일을 떠서 본인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해코지를 하려는 것일까.
제아무리 추측하려고 해도 손태호의 의도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회의실에 들어선 후 내가 먼저 운을 뗐다.
의대 시절부터 우리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이였다.
날씨나 안부를 묻는 쿠션 언어.
상대를 공감하고 배려하는 화법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사람을 불러 놓고 왜 말을 못해? 계속 입 다물고 있으면 나 그냥 간다?”
“잠깐만, 잠깐만. 이제 말할 테니까 기다려.”
내가 다그치자 손태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한 번 호되게 당한 뒤라서 그럴까.
손태호의 눈빛과 말투, 행동에는 독기가 많이 빠져 있었다.
“믿음아.”
“…….”
“그동안 내가 너한테 몹쓸 짓을 많이 했다. 이민호 옆에서 붙어먹으려다 보니 널 괴롭히고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어.”
“…….”
“아, 참 저번처럼 녹음기 같은 건 없어. 봐 봐.”
손태호는 의사 가운과 바지 주머니를 뒤집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준 뒤 말을 이었다.
손태호의 자기 고백과 반성을 나는 팔짱을 낀 채 듣고만 있었다.
조금 의외이긴 했다.
그 콧대 높았던 손태호가 이런 그림을 연출이야.
회의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나는 사실 육박전까지 각오했다.
이민호에게 버림받은 손태호라면 어떤 미친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정중한 사과를 하다니…….
재미있는 점은 손태호의 사과에 진실성이 묻어난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 잘못을 왜 저질렀는지.
그 당시의 심정은 어땠고 지금의 심정은 어떠한지 등등.
손태호는 육하원칙에 본인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잘 녹여낸 사죄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손태호를 조금도 신뢰하지 않았다.
손태호가 지금까지 내게 저지른 악행들이 있었으니까.
첫째, 악행이란 쉽게 뉘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악행을 뉘우칠 양심이 있었다면 애초에 악행을 저질렀을까.
둘째, 피의자가 뉘우친다고 해서 피해자의 상처가 아무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잘못했으니까 용서해 달라는 거야?”
이야기를 다 듣고 나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주면 고맙겠지만 쉽지는 않겠지. 아니, 아마 불가능하겠지.”
“물론이다. 이 지경으로 몰락하지 않았다면 과연 네가 내게 사죄했을까? 넌 아직도 어떻게든 네 몸만 빠져나갈 생각하는 미꾸라지일 뿐이야.”
나를 혀를 칼날처럼 세워 손태호를 찔러 댔다.
이번 생의 나는 전생처럼 나약하지 않았다.
옳은 것은 끝까지 품을 줄 아는 인내와 그른 것은 단칼에 잘라 낼 아는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손태호는 당연히 후자였다.
“너 때문에 난 이민호한테 버림받았어. 난 이제 끝장이라고. 성형외과 레지던트도 합격 못할 거야.”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내가 손톱만큼이라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 날 도와줘.”
손태호가 간절한 목소리와 간절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이민호 밑에 있을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네 밑으로 갈게.”
얼마나 다급하고 궁지에 몰렸으면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충격 선언을 할까.
이럴 거면 처음부터 나를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너도 이민호 싫어하잖아. 내가 함께 있으면 이민호 엿 먹이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안 그래?”
손태호는 본인이 내 편이 되겠다며 달콤한 유혹을 했다.
손태호 같은 모사꾼 동기가 있다면 말이다.
의국에서 정치질에 쏟는 에너지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에너지를 환자 관리와 의술 수련에 힘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결국 돌고 돌아 인성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나는 내 등 뒤를 손태호에게 단 1초도 맡길 수 없었다.
“태호야.”
나는 나지막하게 손태호를 불렀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응? 이민호한테 버림받았다고 이젠 나한테 기생할 생각이야?”
“…….”
“우리 정도 나이 됐으면 자립해야지. 앞으로 이딴 일로 내 시간 뺏으면 죽는다?”
으름장을 놓고서 나는 유유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질긴 악연을 완전히 잘라 내자 속이 후련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주변 정리를 마친 나는 오로지 흉강경 폐암 수술 준비에만 몰두했다.
이 과장의 함정에 빠진 양 교수를 구해야 했으니까.
못된 이 과장에게 멋지게 한 방 먹여 주고 싶었으니까.
수술 준비의 최전선은 당연하게도 논문 탐색이었다.
나야 흉강경 수술을 완벽하게 이해했지만 다른 스태프들은 아니었기에.
총 100여 개에 달하는 논문을 대충 읽어 보고 나는 필요한 논문만 10개로 추렸다.
지금은 논란이 있지만 먼 미래에는 정석으로 받아들여지는 논문들이었다.
이 논문들만 제대로 익힐 수 있다면 수술은 실패하지 않으리.
논문을 번역하고 정리하는 한편
나는 흉강경 폐암 수술의 스태프들을 구성해 보았다.
이번 수술 준비에서 가장 쉬웠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누가 믿을 만한 스태프이고, 누가 걸러야 하는 스태프인지 나는 벌써 다 알고 있었으니까.
집도의는 당연히 양 교수.
제1 보조는 전생의 멘토이자 현재는 펠로우 2년 차인 서인석.
제2 보조는 레지던트 3년 차 허성호.
마지막으로 제3 보조는 나였다.
백업 멤버로는 2년 차 황은우.
내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흉강경 수술의 스태프들은 하나같이 실력이 뛰어나고 인성까지 훌륭했다.
그래서 함께했을 때 시너지가 기대되는 조합이었다.
흉강경 수술의 청사진을 짠 뒤 나는 양 교수에게 논문을 첨부한 메일을 보냈다.
양 교수와의 미팅은 바로 그다음 날인 주말로 잡혔다.
의국 회의실에서 만난 양 교수는 근래에 부쩍 늙어 보였다.
이 과장이 자신을 내쫓기 위해 진료 부원장에게 남몰래 로비하고 인사 고과까지 망쳐 놓았다는 사실 때문에 심적 고생이 큰 모양이었다.
하지만 피로해 보이는 것과 달리 그의 눈빛만큼은 이채를 띠고 있었다.
양 교수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 과장에게 받은 상처를 이 과장에게 고스란히 갚아 주겠다고.
복수를 벼르는 양 교수의 뜨거운 눈빛이 나는 좋았다.
“보내준 논문 잘 읽었다. 괜찮은 논문만 추리느라 수고가 많았겠는걸?”
“아닙니다.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믿음이 너만 부려 먹는 것 같아서 나도 논문을 좀 살펴봤는데 말이야.”
양 교수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믿음이 네가 보낸 준 몇몇 논문은 이슈가 좀 있더구나. 표본이 너무 적은 것도 있고 수술 효과를 비약한 것도 있고 말이야.”
“교수님… 저 믿으십니까?”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니?”
“저를 믿는다면 그 논문들도 믿어 주세요. 제 계산에 따르면 지금은 문제가 있어 보여도 나중에 다 옳다고 판명될 것들이니까요.”
나는 논문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대신 마음과 믿음의 영역으로 옮겨 버렸다.
어차피 이 시점에서는 해당 기법들의 데이터를 얻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그동안 보여 준 활약이 있었기에.
내 목소리가 너무 확신에 차 있었기에.
양 교수는 알겠다며 고개만 끄덕였다.
흉강경 수술을 위한 첫 번째 고비는 순조롭게 넘긴 셈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고비가 찾아왔으니…….
바로 수술 스태프를 선정하는 일이었다.
내가 점찍은 스태프와 양 교수가 점찍은 스태프는 완전히 달랐다.
양 교수의 경우 제1 보조에 폐식도 파트 조교수 박성진을.
제2 보조에 의국장 신창수를 낙점했다.
그 순간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 마이 갓을 외칠 뻔했다.
교수님은 의술에는 일가견이 있을지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영 꽝이었다.
박성진과 신창수.
이 두 사람 다 속칭 이 과장 라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두 사람을 수술 스태프로 쓴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일단 수술 준비 과정이 이 과장에게 전부 노출될 것이다.
두 사람은 수술 연습도 대충대충 할 가능성이 컸고.
실전에서는 고의적으로 수술을 지연시키거나.
최악의 경우 실수를 가장한 의료 사고를 저질러 흉강경 수술을 망쳐 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날지 몰랐다.
‘와,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그 두 사람이 고의적으로 수술을 망칠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상상하자 등골이 서늘했다.
상상이 현실로 벌어질 가능성이 꽤 높다는 사실에는 오금이 저렸다.
정말 최악의 상태가 벌어진다고 가정하면 말이다.
순진한 양 교수는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자책할 테고.
이 과장은 양 교수를 내쫓을 더 완벽한 명분을 얻게 될 것이고.
박성진과 신창수는 이 과장의 예쁨을 듬뿍 받게 될 것이다.
이번에도 결국 손해는 양 교수만 보게 되는 것이다.
“이거, 의외의 부분에서 갈리는걸?”
양 교수는 이럴 줄 몰랐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성진이, 그 친구는 일 잘하는 친구란다. 폐·식도 파트에 관해서라면 나 다음으로 가는 실력자지.”
“…….”
“레지던트 중에서는 아무래도 창수를 높이 사 줄 수밖에 없어. 4년 차고 경험도 많으니까.”
두 사람을 치켜세우는 양 교수의 목소리는 살짝 들떠 있었다.
두 사람을 대쪽 같이 신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박성진 교수는 기회주의자 박쥐고, 신창수는 윗사람 앞에서만 착한 척하는 위선자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나는 간신히 참았다.
“그런데 교수님, 박 교수와 의국장 둘 다 이 과장 편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교수님 앞에서 차마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걸 겁니다. 저 말고는.”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양 교수에게 정신적인 타격을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그 어떤 망나니짓을 한다고 해도.
박 교수와 신창수가 흉강경 수술 어시스트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제가 지금까지 지켜본 교수님은 너무 훌륭하고 선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점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먹잇감이라…….”
먹잇감이라는 단어에 양 교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잘해 주면 보답하려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나를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
“세상 경험이 적은 풋내기이지만 감히 부탁드립니다. 교수님께서 부디 이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을 가려내시길 바랍니다.”
“믿음아.”
이야기를 찬찬히 듣던 양 교수가 내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쉬운 말을 어렵게 돌려서 하는구나. 그러니까 내가 호구라는 뜻이지?”
“…네.”
“그래, 이젠 나도 네 말에 일리가 있다고 본다. 나는 나만 좋게 좋게 생각하면 일이 잘 풀린다고 착각하고 있었지.”
“…….”
“하지만 돌이켜 보니 아닌 것 같더구나. 알게 모르게 등 뒤에서 맞은 상처들이 떠올라.”
지난 인생을 반성하는 노 교수의 모습은 어딘지 처량하고 안쓰러운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웃기는 일이 아닌가.
의술과 환자에 모든 것을 바친 명의가 왜 존경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앞으로 성장하면서 의료계의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면 결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눈앞의 양 교수는 물론이요.
제2의 양 교수, 제3의 양 교수, 제4의 양 교수도 나오지 않게 만들 것이다.
“어쨌거나 믿음이 넌 박 교수와 신창수가 스태프로 들어온다는 건 반대한다는 뜻이지?”
“네, 결사반대입니다.”
“그래, 처음부터 널 믿기로 하고 벌인 일이니 끝까지 널 믿어 보마. 흉강경 스태프는 네가 짜 놓은 대로 진행하자꾸나.”
“감사합니다, 교수님.”
뜻을 양보해 준 양 교수를 향해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직까지는 계획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