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164)
164화 제3장 응급 아닌 응급(4)
흉부외과 숙직실.
2층 침대에 누운 후배들은 전부 곯아떨어졌다.
코를 골던 선배들은 전부 군대나 펠로우가 되어 떠났고, 새로 들어온 후배들은 아무도 코를 골지 않았다.
대신 그중 한 명이 이를 갈았다.
드르륵. 드르륵.
신경이 거슬려 누가 한 번 깰 법도 하건만 다들 잘만 잤다.
후배의 이갈이 소리를 배경 음악으로 깔고 나는 창가에 섰다.
병원 주변의 어두운 풍경을 무심하게 훑었다.
[양 과장님이 은퇴하신 후에 부임할 과장 말이다. 그 과장이 악질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단다.]서 교수가 전해 준 정보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래서 대동맥 박리 수술을 막 끝내서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바짝 긴장했으며 의식은 바짝 곤두섰다.
곧 다가올 위협에 불안을 느끼며 교감신경이 활성화된 것이다.
-후임 과장은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호기심에 자세히 물었더니 서 교수도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과장 물망에 오른 사람이 두 명 있다.
한 명은 외국 유학파 출신이고, 다른 한 명은 분원의 과장이다.
둘 다 들리는 소문이 썩 별로라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난감하단 말이지.’
외국 유학파 출신 과장 후보를 생각하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전생의 기억을 샅샅이 뒤져도 그런 인물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회귀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면서 전생의 시간과 사건에 뒤틀림이 생긴 모양이었다.
둘째로 분원의 과장이라는 사람.
그는 아마도 내 원수 강태섭일 확률이 높았다.
전생대로라면 내가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강태섭이 부임한다.
하지만 강태섭의 부임도 내 회귀로 인해 앞당겨진 게 아닐까.
나는 알게 모르게 주변의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 영향을 나밖에 모른다는 게 함정이지만.
과연 어떤 과장이 양 과장의 뒤를 이어받을까.
그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던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나중 일을 가지고 미리 고통받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걱정과 불안은 나를 강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좀 먹기도 한다.
지금은 후자 쪽에 가까우니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것 같은데.’
침대 1층에 누웠던 나는 2층 침대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을 활짝 펼친 채로.
전생에 경험과 지식에 이번 생의 경험과 지식이 더해지면서 나는 괴물로 성장했다.
솔직히 더 올라갈 곳이 없다고 자만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개월 전부터 그런 교만함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경지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단순하게 무아경이라고 불렀다.
그 경지에 빠져들면 자아는 사르르 녹아내렸다.
긴장, 초조, 불안, 짜증, 공포 등등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그 감정들을 나 자신과 분리시킬 수 있었다.
시각과 청각과 촉각과 후각이 극대화되면서 환자의 수많은 신체 정보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오늘 인조 혈관 치환술을 펼칠 때도 나는 무아경에 빠졌다.
무아경이 없었다면 아마 60분 안에 치환술을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무아경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지금의 나는 무아경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어쩌다 얻어걸리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아경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모든 잠재력을 집도에 퍼부을 수 있는 궁극의 경지를 가지고 싶었다.
그러면 전생에 구하지 못했던 환자들을.
내 모자란 능력과 미련함으로 놓쳐 버린 환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을 테니까.
쉽지는 않겠지만 무아경은 결국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다.
회귀한 나는 욕심쟁이라서 놓치는 것 없이 살아왔으니까.
천장으로 뻗었던 손을 움켜쥐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느낌이 무아경 같기도 했고 잠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 * *
오전 컨퍼런스와 회진이 끝난 후 나는 다시 회의실로 이동했다.
양 과장이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후배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금방 왔구나.”
“과장님이 부르시면 자다가도 뛰어나와야죠.”
나는 농담 섞인 말을 하며 양 과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제 송별식을 마친 후 양 과장의 얼굴은 한결 편해 보였다.
어깨에 잔뜩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게 된 당나귀처럼.
양 과장과 헤어지는 것은 싫지만 양 과장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양 과장과 단둘이 10분 정도 잡담을 나눴다.
송별회에 관한 이런저런 뒷이야기.
그리고 어제 내가 집도한 대동맥 박리 수술에 관한 것이었다.
“너도 벌써 그 감각을 깨우친 모양이구나.”
“교수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아무렴. 나도 그 감각에 자주 도움을 받았단다.”
내가 무아경에 대해 말했더니 놀랍게도 양 교수 역시 무아경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명의들은 다 그 감각을 알고 있단다. 이제 믿음이 너도 슬슬 명의 반열에 다다른 것 같구나.”
“아닙니다. 저는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화제는 곧 무아경으로 넘어갔다.
나는 무아경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단서를 양 교수에게 찾으려 했지만 안타깝게 실패했다.
양 교수도 의식적으로 무아경을 사용하지는 못했다.
다만 무아경에 빠져드는 횟수가 나보다 많을 뿐.
“너라면 그 감각을 충분히 자기 의지로 통제할 수 있을 거란다. 내가 50대에 느낀 감각을 너는 벌써 경험하고 있으니.”
양 과장은 내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지금은 레지던트 신분이라 주로 어시스트를 해서 성장이 더딜 뿐.
펠로우가 되어 본격적으로 집도를 맡으면 무아경을 익히는 일은 시간문제라고 했다.
무아경을 논할 수 있다는 스승이 곁에 있다는 위로의 감정.
그런 스승이 이젠 곁을 떠난다는 아쉬움의 감정.
이 두 가지 감정이 불쑥 내 마음속을 교차했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고 양 과장이 말을 이었다.
“화제가 여기까지 흐르는 걸 보니 아무래도 하늘은 너를 더 빨리 키우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양 과장의 평소답지 않은 거창한 언변에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사실 믿음이 너를 부른 건 용인에서 좋은 제안이 들어와서란다.”
양 과장이 말한 제안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용인 신원대학교 병원 흉부외과에서 나를 원한다.
둘째, 내가 6개월 동안 흉부외과 의국의 기틀을 잡아 주기를 바란다.
셋째, 양 과장에게 실력은 들었으니 응급 환자의 한에서는 내부적으로 집도까지 맡기겠다.
넷째, 6개월 파견이 끝나면 6개월짜리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보장하겠다.
‘가만 보자.’
나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기를 두들겼다.
그쪽에서 내게 집도를 맡긴다면 나는 무아경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이다.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보장한다는 사실도 무척 매력적이었다.
나는 이미 양 과장에게 6개월짜리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보장받았다.
용인에서도 프로그램을 보장받는다면 무려 1년 동안 해외 연수가 가능했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용인에 파견 가지 않는 것이 머저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불안 요소는 여전히 존재했다.
양 과장 다음으로 부임하는 후임 과장에 관한 것이었다.
용인에 파견 나간 6개월 동안 후임 과장이 의국의 화목한 분위기를 망칠까 봐 두려웠다.
맑은 연못을 진흙탕으로 만드는 건 미꾸라지 한 마리면 충분하니까.
“뭐 걱정되는 거라도 있니?”
양 과장이 내 표정을 읽고 먼저 물었다.
“과장님 후임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아서 걱정이 됩니다. 혹시 제가 파견 나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녀석, 걱정도 많구나. 지금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너만을 신경 써야 할 시기란다.”
“…….”
“네 의술이 더 깊어져야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지 않겠니?”
“…맞습니다.”
“의국 걱정이라면 용인에서 돌아온 후에 해도 늦지 않단다.”
양 과장의 조언이 이어졌다.
그 핵심은 의국 걱정 따윈 집어치우고 나만을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사람이란 한 걸음이라도 더 멀리 더 빠르게 나아가야 할 때가 있고.
다 함께 천천히 나아가야 할 때가 있는데 지금의 나는 전자라는 것이었다.
짧지만 깊었던 고뇌.
나는 흔들리던 마음의 중심을 단단히 잡았다.
“교수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용인으로 파견 가겠습니다.”
“모처럼 내 말을 듣는구나. 미국보다는 용인이 더 좋더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양 과장에 농담에 나도 농담으로 응수했다.
외과의사로서 나는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 싶었다.
양 교수의 말대로 내 그릇이 커져야 품을 수 있는 환자와 스태프들이 늘어날 테니까.
설령 후임 과장이 악당이라고 해도 6개월 동안 무슨 큰일이 있겠냐 싶었다.
흉강경 클리닉을 맡으면서 힘이 세진 서 교수가 잘 견제해 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용인에서 갑자기 왜 저를 찾는 겁니까?”
나는 곧 내 근무지가 될 용인에 관심을 보였다.
용인 신원대학교 병원 흉부외과는 흉부외과 분원 중에서도 최악의 험지로 손꼽혔다.
용인 신원대학교 병원이 권역 외상 센터였기 때문이다.
정규 외래 환자에 응급으로 실려 오는 환자들.
이 두 종류의 환자들이 합쳐진 병동은 그야말로 참혹한 전쟁터였다.
나도 2년 차에 짧게 파견을 나갔다가 극심한 탈주 충동을 느꼈다.
용인에서 쏟아지는 환자에 시달릴 바에는.
차라리 본원에서 선배들에게 못난이 취급받는 게 100배는 낫다고 생각하곤 했다.
“최근에 거기 의국장이 의료 사고를 일으켰단다. 사고를 일으킨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은폐를 위해 차트까지 조작했다는구나.”
“…….”
“그 탓에 분위기가 아주 뒤숭숭한 모양이야.”
병동은 레지던트의 힘으로 굴러가기 마련인데
그런 레지던트를 이끌어야 할 의국장이 대형 사고를 쳤다?
아직 용인에 가 보지는 않았지만 벌써 용인의 분위기를 알 것 같았다.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겠지.
용인에서 나는 의술 외에 다른 것도 배우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사람과 조직 관리 말이다.
양 과장과의 대화는 20분 동안 이어졌다.
양 과장은 오늘을 포함해서 내게 이틀의 휴가를 주었다.
이틀 쉬었다가 바로 용인으로 출근하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양 과장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없어서.
후배들과 제대로 작별할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나는 그 아쉬움을 애써 삼키며 병원을 떠났다.
봄바람이 서늘한 어느 아침의 일이었다.
* * *
청명한 하늘이 신기했다.
도로를 따라 달리는 자동차들, 길가를 따라 늘어선 상가들, 함께 걷고 있는 행인들이 다 신기했다.
너무 오랜만에 병원 바깥으로 나온 후유증이었다.
그러고 보니 병원 근처를 벗어나 역까지 걸어온 게 무려 2년 만의 일이었다.
모처럼 경험하는 병원 바깥의 세상은 나를 놀랍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 병원 바깥에도 세상이 있었지.
그 세상은 이런 세상이었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도 나는 새로운 세상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수술실에서 멀리 떨어진 세상은 너무 평화로웠다.
내 눈앞에 고통스러워 사람이 있는 것도.
죽어 가는 사람이 있는 것도.
죽은 사람이 있는 것도.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오랜만에 어깨에서 힘을 뺐다.
아니, 어깨에서 저절로 힘이 빠졌다.
병원을 벗어날 때 어깨에 짊어진 짐을 다 두고 왔으니까.
그렇게 나는 지하철에 몸을 맡긴 채 지하철이 가자는 대로 이동했다.
어느새 목적지까지 한 정거장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