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Hunter Killer RAW novel - Chapter 75
75
거무튀튀한 구름이 빠르게 움직여 하늘을 뒤덮는다. 이내 길고 굵은 빗줄기가 마른 대지를 적신다. 푸른눈의 영혼이 빠져나간 노인의 몸이 비에 흠뻑 젖었다.
여울은 그 처량한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어차피 지구에 와서는 다크니스를 사용할 일이 없다. 블레이드를 필요로 할 만큼 단단한 가죽을 지닌 몬스터도 없고, 버서커를 사용할 만큼 강한 몬스터도 없다. 충격파는 다크니스가 아니고, 다치지 않으니 큐어도 필요치 않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다크니스 능력자들. 이 숫자는 그들의 수를 의미하는 것인가? 모르겠다. 푸른눈의 말이 아니더라도 적당한 돈만 모으면 은서와 함께 조용히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 것이다.
은서의 퇴원 날이 다가왔다. 두 달간 11억을 모아 퇴원 날짜에 맞춰 작은 빌라의 꼭대기 층을 얻었다. 방은 두 개밖에 없지만 보조로 태양열 에너지판이 있고 1, 2층은 몬스터를 대비하여 철갑판이 둘러져 있는 곳이다.
여울은 은서와 함께 마지막 진료를 받았다.
“뼈도 잘 붙었고, 힘줄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고요. 천천히 걸어도 됩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드린 번호로 바로 전화 주십시오, 헌터님.”
처음에는 그렇게 아니꼽게 굴던 의사가 이제는 태도가 180도 바뀌어 있다. 헌터증을 보여 준 적도 없는데 어느새 A랭크 헌터라는 소문이 병원 내에 일파만파 퍼진 것이다.
며칠 전에는 명함을 주며 개인 휴대전화 번호까지 알려 주었다.
“이제 걸어도 된대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연이 물었다. 그녀도 은서의 퇴원 날을 기억했다가 온 것이다. 그녀는 이제 항상 투피스 정장을 차려입고 나타난다. 그 모습이 퍽 잘 어울렸다.
“천천히 걸어도 된대요. 이제 아빠가 나 학교도 보낸대요.”
“학교? 잘됐다. 그 나이 때에는 특히 친구들이랑 같이 보내야지.”
“응, 나도 좋아요. 얼른 친구들 사귀고 싶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서한의 입원실에 도착했다. 그는 은서보다 한 달은 더 머물러야 한다.
“이야, 벌써 교복으로 갈아입었네? 환자 동기가 떠난다니 눈물이 다 나는구나.”
서한이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잡으며 짐짓 눈물을 흘리는 척을 했다. 은서는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아저씨 진짜 심심하겠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빨리 퇴원하세요.”
“뭐지, 이 팩트 폭력은?”
은서의 말에 지연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게요. 원팀은 어떻게 된 거예요? 지엠에 올려 봤어요?”
지엠은 재앙으로 인해 흩어진 가족들을 찾기 위한 사이트다. 최근에는 귀환자들로 인해 사이트가 더욱 활발해졌다.
“뭐 대충 올려놓기는 했는데, 알아서 찾아오겠지.”
“그런데 연락이 없어요? 한번 보여 줘 봐요.”
원팀이라면 우리나라 어디에 떨어져도 살아남아서 대도시로 피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데 두 달이 넘었는데도 게시판에 글도, 연락도 오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으음…….”
-제목: 나 서한이다.
-내용: 나 5월 19일에 퇴원한다. 그날부로 사냥 개시다.
연락처도, 머무는 도시도, 병원 위치도 적혀 있지 않다. 지연이 아는 서한은 매우 영리하고 약삭빠른 사람이다. 그러니 파티 단위로는 최강이라고 불리는 원팀의 리더이지 않은가?
지연의 의문을 표정을 보고 읽었는지 서한이 말을 덧붙였다.
“아니, 케라브에서의 연은 연이고 여기는 대한민국이니까, 찾아오고 싶으면 찾아오고 아니면 말라고…… 하는 거지 뭐.”
다시 뭉치고 싶으면 위치를 알아내는 간절함 정도는 보이라는 것이다. 서한다운 처신이다.
“그렇군요…….”
“그 덩치는 언제 오지?”
서한은 여울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우리 담덕이 보고 덩치라니. 이름 좀 외워라. 걔도 뭐 병원비 잔액 결제할 때 오겠지, 나는 빈털터리니까. 혹시 모르니까 안 오면 너네한테 연락할게. 알겠지?”
그 말에 여울은 바로 뒤돌아섰다. 지연은 그의 침상에 검은색 명함을 한 장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얼른 나으시고요.”
“아저씨, 안녕.”
“으, 응, 그래, 고맙다. 다들 잘 가라고. 젠장.”
서한은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병실, 그나마 마음을 두고 있던 사람들마저 가 버리니 적적하기 그지없다.
군인 시절 부하들의 유품을 그의 부모들에게 보낼 때 이후로, 책임져야 할 누군가를 아래에 둔다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런데 그 단단한 마음을 어쩔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 훅 깨고 들어온 놈들이 있다. 이제 다시 그들을 놓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모순된 마음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서한은 공허한 눈으로 병원 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 *
지연은 자신의 차로 은서와 여울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오빠, 길드에 들어가는 건 어때요? 지금 A랭크 헌터라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연봉을 받을 거예요.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고, 은서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그녀의 말을 들어 보면 마석을 팔아서 얻는 이익 외에도 길드의 행보로 인한 이익이 추가적으로 작용하여 솔로로 마석을 얻는 것과 비슷한 연봉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신경 쓸 일도 적어지고 가족 보호도 신청할 수 있다. 은서를 보호할 급은 되지 않겠지만 시간을 끌어 줄 소모품 정도는 될 것이다.
“생각해 보지.”
“그래요. 나중에 한번 말해 줘요. 그럼 가 볼게요.”
“언니, 고마워요. 잘 가요!”
“응, 은서…… 안녕!”
새로운 집은 7층짜리 빌라로 한 층당 두 세대가 사는 곳이다. 여울의 집 맞은편에는 아직 아무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끼익.
“삑!”
문을 열자 시이가 먼저 날아가며 집 안을 한 바퀴 돌았다. 같이 안으로 들어선 은서는 눈을 반짝이며 집을 구경했다. 한쪽 면은 통유리로 뻥 뚫려 있고 방은 두 개지만 31평이라 둘이서 쓰기에는 좁지 않았다.
“우아아, 좋아!”
은서는 빠르게 목발을 짚으며 집을 둘러보았다. 급하게 구한 집인데 은서가 이렇게 좋아해 주니 살며시 미소가 흘러나오는 여울이었다.
짐을 대충 정리하고 은서를 방 안에 눕힌 여울은 한쪽무릎을 꿇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다음 주부터 학교 가는 거야. 괜찮겠어?”
“응,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는데, 다른 평범한 아이들이랑 부대끼다 보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은서는 두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떤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죽이지는 말고, 힘 조절 잘하고.”
“웅웅, 안 그래도 간호사 언니들 상대로 힘 조절 연습 많이 했어.”
어쩐지 간호사들이 병실로 들어오는 것을 꺼려 했다. 상태를 체크할 때도 간혹 손이 떨리던 것은 초보여서가 아닌 듯하다.
“잘했어, 우리 딸. 이제 자자.”
“웅. ……아빠.”
천장을 바라보던 은서는 고개를 돌려 여울을 바라보았다. 여울은 뭐든지 들어줄 기세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둥둥이는…… 잘 지낼까?”
여울은 순간 멈칫했다. 지구로 돌아오니 그의 전적이 더욱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주보라에게 치료를 받았으니 살아 있을 테지만 굳이 찾아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가 은서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
“둥둥이 보고 싶어?”
“아니 뭐…… 잘 살아 있는지 궁금해서…….”
여울은 은서의 머리를 두 번 쓰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잘 있을 거야, 걱정 마.”
“우웅…….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은서는 누워 있는 상태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네고는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여울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방을 나섰다.
“시이.”
“삐삑.”
새하얀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온 시이가 어깨 위에 살포시 앉았다.
“둥둥 찾아 줄 수 있겠어?”
“삑!”
성질을 내는 건지, 당찬 대답인지 헷갈린다. 눈빛이 비장해 보이는 것을 보니 후자인 듯하다. 시이는 곧바로 창문가로 날아갔다. 여울은 그가 창문을 깨 먹기 전에 재빨리 열어 주었다.
그는 바로 가공할 속도로 밤하늘 위로 날아갔다. 마치 자유를 얻은 듯이 시원한 비행이었다.
케라브는 층으로 나눠져 있었으니 공간이 제한되어 있어 찾는 데 기간이 대충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수십 배는 넓으니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실내가 많아서 시간도 면적에 비해 배 이상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시이는 찾을 것이다. 누군가를 찾는 것은 자신이 아는 한 시이를 따라갈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둥둥이 주보라와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 *
처얼썩!
높은 파도가 돌무더기를 강하게 내리친다. 물보라가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바위 위, 한 덩치 큰 사내가 가만히 앉아 파도를 바라보고 있다.
“둥문 아저씨!”
“어어!”
두 소년소녀가 저 멀리서 달려온다. 그들의 부름에 둥문이라 불린 사내는 급히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어디 갔었어요! 아저씨 없으면 불안하단 말이에요.”
“미아, 미안.”
소녀가 입을 삐죽 내밀며 투정을 부렸다. 사내는 옆에 내려놓았던 도끼를 챙겨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 역시 둥문 아저씨가 있어야 든든해.”
“나도, 나도.”
“가댜, 디브로 가댜.”
두 소년소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양쪽에서 그의 팔짱을 끼었다. 사내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저 멀리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은떠는…… 아빠가 이따. 이데 둥둥은 피료엄따.’
*
2개월 전.
꿈뻑, 꿈뻑.
케라브에서 벗어난 둥둥은 눈을 떠보니 다 쓰러져 가는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가 최근에도 생활한 흔적이 있었지만 모두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것이 마치 도둑이 든 것만 같았다.
밖으로 나와 보니 몬스터들이 덤벼들었지만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놈들을 처리하며 걸음을 옮기던 중에 돌연 우뚝 멈춰 섰다.
“은떠, 은떠를 찾아야…….”
둥둥은 가슴속에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은서의 곁에는 자신보다 훨씬 강한 그녀의 아빠가 함께한다. 그녀를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
이제 어떻게, 뭘 하면서 살아야 하나 고민하며 주변을 배회하던 중이었다.
“꺄아아악!”
“오, 오빠아!!”
“도망쳐, 빨리!”
무너진 건물 안쪽, 한 소년이 오크에게 팔이 잡힌 채로 높이 들어 올려져 있다. 그의 손에는 식칼이 들려 있었다. 그 뒤쪽 구석에는 이제 열 살 언저리에 있는 소녀 둘이 쭈그린 채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크하!!”
오크가 그녀들의 비명을 포효로 맞받아치며 다른 손으로는 소년의 다리를 잡았다. 팔다리를 당겨 찢어 버릴 심산인 것이다.
“꺄악!! 오빠!!”
“닥치고 빨리 도망쳐!! 빨리…… 제발.”
아무리 힘을 주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죽음을 직감한 소년은 여동생들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자신이 죽으면 누가 그들을 지키겠는가?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보지만 단단히 잡힌 팔다리는 오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으드드!
팔다리에서 어마어마한 고통이 느껴진다. 눈앞에서 팔꿈치 부분의 살이 점점 찢기는 것이 보인다.
“도망…… 으, 으아아악!”
퍼석!
이제 죽는가 싶은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통이 멈췄다. 얼굴을 들어 보니 오크의 대가리에 커다란 도끼가 박혀 있다.
“갠탄나?”
그 뒤에는 오크만한 사내, 둥둥이 있었다. 그는 도끼를 뺐다가 다시 휘둘러 머리통을 아예 날려 버리고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우와…….”
“오, 오빠 괜찮아?!”
두 여동생은 소년을 챙겼고, 소년은 무언가에 홀린듯한 눈으로 둥둥을 올려다보았다.
“그…… 잠자던 아저씨…….”
소년은 둥둥을 본 적이 있다. 전에 쓰러진 채 누군가에게 끌려가던 아저씨다.
퍼억!
또 다른 곳에서 달려드는 트롤을 도끼질 한 방에 으깨어 버린 둥둥은 그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디켜 두마.”
둥둥은 그들을 보니 은서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그는 생각했다. 이제 이들을 지키며 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