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117)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117화(117/373)
“아.”
볼펜을 쓰던 버릇은 몸이 아닌 영혼에 남는 건가. 잠시 딴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펜 돌리기를 했더니 이 모양이다.
깃펜이라 가벼워서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고 잉크만 튀었다.
“도련님. 옷 갈아입으시겠어요?”
내가 무심코 낸 소리에 루나가 슥 다가오더니 자신의 손수건을 꺼냄에 내가 제재하듯 고개를 저었다.
“뭐 하러.”
마법이 있는 곳인데.
잉크 같은 경우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는 얼룩이 아닌 염색으로 치부되는지 클린으로도 다 지워지지 않지만 이렇게 방금 튄 경우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무슨 세제 광고 멘트 같네.’
부유감이 제법 떨어져서일까. 오늘따라 강수호일 때의 기억이 스믈스믈 올라오는 것이.
이럴 때는 일을 해야 하는 법.
나는 잠시 아공간에서 꺼냈던 코덱스를 다시 집어넣으며 베르뷔트에 대해 적은 메모지를 다시 읽었다.
[베르뷔트 더 아그리아―악신교의 세 번째 선별자]대표 Traits : [연기(A)] [지배(B)] [탐욕(B)]
히든 Traits : [세뇌(A)] [무정(C)]
세 번째 선별자.
세 번째라고 하면 최소 둘은 더 있다는 소리다.
거기에 선별자.
‘무엇을 선별한다는 거지?’
내가 도플갱어 포션을 이용한 가짜 가디아를 해결한 후 붙은 교단 측이니 일단 가디아, 즉 사람과 연관된 일일 것이다.
원작에서 이런 내용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가디아 성격에 자신의 과거를 하나하나 다 밝히는 편도 아니었거니와 화자가.
―애플 시나몬 스틱이 맛있군요.
“리프, 애플 시나몬 스틱이 맛있구나. 그렇지? 생크림 더 발라 줄까?”
작문 트레잇이 드미트리보다 등급이 낮은 리프니까 이제는 더더욱 원작 신봉은 할 수 없는 셈.
‘파이얀이 혼혈이 아니었다면 어떤 식으로건 아카데미에 넣어 봤을 텐데.’
아쉽게 되었다. 그럼 가디아의 동향을 비롯해 베르뷔트와 더불어 다른 악신 교단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터.
‘아니지. 학생은 아니더라도…….’
가디아만 잘 꼬시면…….
나는 눈을 감고 명상하는 것처럼 보이는 케인을 흘긋 바라보았다.
베르뷔트의 트레잇 중 연기와 지배. 거기에 히든 트레잇인 세뇌까지 포함해서 생각해 보면 베르뷔트가 아카데미 내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얼추 그려진다.
내 생각이 맞다면 어차피 가디아는 내가 가짜를 밝혀냈다고 해도 점차 더 고립될 수밖에 없는 셈.
‘그렇다면야.’
나는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다 급히 새로운 양피지를 꺼내 몇 자 적은 뒤 밀랍으로 밀봉하고선 고개를 들어 제로를 불렀다.
“아카데미로 이거 보내.”
가디아를 좀 만나야겠다.
그리고 더불어 파이얀의 입지를 조금 강제적으로라도 빠르게 정리해 주는 게 낫지.
나는 다시 양피지를 한 장 더 꺼내 파이얀에게 보낼 글을 적기 시작했다.
“케인.”
“말해라.”
내가 나직하게 케인을 부르니 케인이 천천히 눈을 뜬다. 내가 이쪽으로 와보라는 듯 손짓하지만 얼마나 엉덩이가 무거우신지 그 자리에 앉아서 입만 움직였다.
“오늘부터 파이얀을 좀 도와줘야겠어.”
원래 세력이란 게 그렇다.
너무 빠르게 커지면 원래 있던 세력들이 더 크기 전에 밟으려 드는 법이지.
그러니 최대한 잔잔하게 수면 아래서 키울 수 있을 만큼 키우며 건드리기 애매한 크기까지는 몸을 납작 엎드려 있으라고 전달해 둔 상태였는데.
‘한참 세력을 키우면서 투잡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지.’
그러니 그냥 빠르게 밀어버린다. 보통 뒤쪽 세력은 돈, 정보,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지.
그중 돈은 내가 정보는 파이얀이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견고하게 쌓을 수 있다.
그렇다면 폭력은?
‘만능 케인에몽 뿐이지.’
이런 일을 말하는 게 좀 꺼림칙하긴 하다만. 그래도 죄 없는 사람들이 아닌, 생각을 구체화하기도 싫을 만큼 더러운 짓에 손댄 세력을 밀어버리는 일이라면…….
‘거기에 좀 무리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최단 시간 수도의 암흑가 통일. 이런 업적이 있을지도 모르고.’
“파이얀의 일을 좀 도와야겠어.”
“언제까지.”
“내가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하는 말에 케인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내가 밀랍으로 봉인한 양피지를 들고 나간다.
‘그러고 보니.’
명색이 흑막을 노리는 엑스트라면서 기본은 갖춰야지.
나는 내 이름 강수호를 한자로 적은 뒤 루나를 불렀다.
“실링용 반지를 하나 의뢰해 줘.”
내 이름으로 된 인감도장을 다른 세상에서도 만들어보네.
“밖은 원형으로, 안쪽은 육각형 모양으로. 글자는 입체적인 사각형으로. 추적되지 않게. 이것은 크루거 가문이 아닌 오로지 내 이름이 필요할 때 쓸 예정이야.”
내 말에 루나가 종이를 받아들고 물끄러미 보다가 환하게 웃는다.
“최고루 만들어 달라 할게요.”
“배지하고 가. 혹시 모르니 레이첼과 리프랑 같이 가던가. 난 아이기스가 있으니까.”
공식적인 가문의 인장을 제작하는 게 아닌 데다 나중에라도 역추적을 피하려면 의뢰하는 지금부터 신원을 숨겨야 할 터.
내 말에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간다.
케인은 파이얀에게 제로는 가디아에게 보낸 후라 루나와 리프, 레이첼까지 나가니 이 넓은 숙소에 나 혼자.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사방이 너무 적막강산인 거 아닌가.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똑, 또독, 똑, 똑.
아, 깜짝이야.
내가 트레잇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해야 하는데 한글을 알려달라고 하는 바람에 일이 좀 꼬였다.
그래서 일반 정보가 아닌 트레잇은 다시 영어로 정리하던 와중에 들린 노크 소리에 내가 어깨를 한번 들썩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장난처럼 정한 리듬의 노크 소리.
그나마 고급 여관이다 보니 문에 방범 마법이 걸려 있어 안에서 문을 열어주기 전에는 밖에서 못 들어오는 터라 좋긴 한데.
우리도 꼭 누가 문을 열어주거나 해야 하니 번거롭네.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선배님들 후배님들은 어디 갔지 말입니까?”
“다 심부름 갔다.”
내 말에 제로가 씩 웃곤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가디아 아가씨의 시종인 리제 양에게 편지는 전달했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정도에는 오겠네. 안 오면 케인을 호위로 붙여버린다고 적었으니 무조건 올 게 틀림없다.
“이 몸 돌아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조금 기다리니 레이첼이 무언가 한 아름 들고 온다.
여러 가지 과일을 한입 크기로 잘라 그릇에 담은 것부터 고기꼬치와 떡도 빵도 아닌 간식거리.
레이첼의 등 뒤로 루나와 리프도 따라 들어오면서 로브를 벗었다.
―관리자님. 다녀왔습니다.
“인장은 마법 효과를 전부 추가하니 일주일 정두 걸린대요.”
“수고했다.”
나는 레이첼이 건네는 모둠 과일을 잡고 대나무 막대로 하나씩 골라 먹으며 입을 열었다.
잠깐 나 혼자 있으면서 적막하다 싶더니 금세 이렇게 시끌벅적하다.
“케인두 이거 먹어 봐.”
그리고 파이얀에게 보냈던 케인까지.
“벌써?”
“내가 할 일은 하고 왔다.”
아니 그야 그렇겠지만. 케인은 한동안 파이얀과 다니다가 같이 올 줄 알았는데 말이지.
“따로 나에게 말할 건 없고?”
파이얀에게 보낸 양피지에는 당분간 케인을 파이얀의 호위 겸 다른 세력과 충돌할 시 유용한 내 검으로 적었다.
그러니 최소 일이 주, 파이얀이 어느 정도 위협받지 않는 자리까지 올라간 다음에나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 설마 출퇴근인가?
“글쎄 따로 들은 건 없다.”
나는 화덕에 구워 양념을 바른 쫄깃한 빵 같은 것을 손으로 찢어 한입 먹는 케인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너. 대충하고 왔지?”
“글쎄.”
“글쎄는 무슨.”
케인이 무슨 사고를 치고 온 건지. 파이얀도 오늘은 무리지만 내일은 나에게 들이닥치겠어.
“야! 화덕구이 너만 먹냐!”
“싸우지 말구 나눠 먹으면 되지.”
“후배님. 제 거 나눠 드릴까요?”
―관리자님은 제 것 나눠드리겠습니다.
나는 간식거리 하나에도 시끌벅적한 녀석들을 보다 말고 그냥 웃어버렸다.
* * *
저번에 내가 경매장에 팔아넘긴 갑옷 아티팩트를 드뷔오나가 입고 나왔었지.
내 사소한 행위가 내 의도와는 상관없는 결과물로 내 앞에 나온 게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 내가 문득 생각나서 따로 보관한 아티팩트들도.
무언가의 봉인을 푸는 아티팩트나 대륙판 원숭이의 손. 즉 즉발성 기적 아티팩트. 외형을 랜덤하게 바꿔 주는 것도 있었지.
그것 외에도 대상을 순간적으로 모든 법칙에서 벗어나게 하는, 내가 명칭 하기로는 존야라 불리는 아티팩트와 더불어 다른 몇 개들도.
‘그리고.’
샤하드 폰 테이트리아.
교단의 꼭두각시.
도플갱어 포션의 사용자를 찾던 와중에 봤던 황족.
‘일단 대외적으로는 난 황족에게 연을 대기 위해 드미트리와 드뷔오나를 상대한 거니까.’
당분간은 그런 척하기 위해서라도 관심을 끌 수는 없다.
더불어.
‘분명히 봉인 트레잇이 있었거든.’
그걸 이용을 할까 말까.
내 계산대로면 트레잇에 걸린 봉인도 봉인이라 내가 가진 봉인 해제 아티팩트나, 하다못해 조건부로 소원 성취가 가능한 원숭이 손 같은. 즉발성 기적 아티팩트 등으로 풀 수는 있을 것이다.
원작에서도, 게임에서도 샤하드라는 황족은 본 적이 없다.
애초에 소통 불가 노답 파티들이 만나 봐야 얼마나 만나고 다녔겠는가.
원작에도 게임에서도 나오지 않은 이들이 나온 이들보다 수배는 많겠지.
‘그렇다 해도.’
분명 트레잇에 단명이 있었단 말이지.
보통 단명이라고 하면 길어야 30세 이전에 죽는 것을 떠올리지 않나.
그렇게 치면 길어야 10년 정도?
나에게 아예 방도가 없다면 모를까. 내 전력을 크게 갉아먹지 않으면서도 타인에게, 그것도 황족에게 빚을 하나 지울 수 있는 건 큰 이득에 속한다.
다만, 그것은 저 샤하드라는 녀석이 어느 정도 말귀가 통하는 녀석일 때 일이고.
사실 무도회 때 꼬라지만 보면 말이야, 황족인 데다 몸이 약해 오냐오냐하고 자라나서 건방지기 짝이 없는 데다 자기만 아는 안하무인일 확률이 더 높지.
‘그래도 뭐 조사하는 건 큰 품이 안 들어가니까.’
그걸 파이얀에게 맡기면 될 것이다.
“아, 또 졌어. 이거 완전 세상 지혼자 사는 놈 아냐?”
내가 생각하는 동안 주위가 좀 조용하다 싶더니 레이첼이 무언가를 흩뿌리며 뒹군다.
자세히 보니 나무를 깎아 만든 네모나고 세모난 모형들.
‘아니 오두막, 여관, 저택 모형을 저렇게…….’
별장, 빌딩, 호텔 대신 대륙에 맞춘 부루마불 건물들이 날아다닌다.
“황금 열쇠 룰 추가해. 케인은 무조건 무인도 보내기 이런 거! 아니, 애초에 내가 능력이 없어, 뭐가 없어? 왜 내 말이 무인도 갔다고 내가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게 말이 돼?”
“응, 말이 돼. 레이첼. 치우는 사람 따루 있어? 얼른 정리하자.”
또 레이첼이 진 모양.
도대체 레이첼은 이번 유희에 제약을 몇 개나 걸고 나온 것일까.
마나를 몸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마법을 쓰지 않는다. 무투가로서만 활동한다. 그리고 도박과 같은 게임을 잘하지 못한다.
이 정도는 짐작되긴 하는데, 정작 자신이 건 제약 덕에 번번이 케인이나 루나, 제로와 리프에게 털리는 걸 보니 저런 게 고인물의 취향인가 하고 생각하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살기 없음. 공격형 아티팩트 반응 없음.”
케인에게 씩씩거리던 레이첼이 흘긋 보더니 하는 말에 제로가 일어난다.
“아, 그러면 가디아 아가씨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파이얀이거나.
제로가 천천히 문을 여는데 보이는 건 환한 색의 머리칼.
청은발과 크림색 같은 백발.
나는 문 앞에 서로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는 가디아와 파이얀을 바라보았다.
둘이 딱 만났네.
“잘됐네. 안 그래도 둘 서로 소개해 주려고 했는데.”
내가 싱글싱글 웃으며 하는 말에 서리 베일을 쓴 가디아의 입매가 비틀리고 파이얀은 도대체 뭘 시키려고 그러냐는 얼굴로 파르르 떤다.
“들어와.”
“…….”
내 말에 파이얀은 가디아의 눈치를 본 뒤 안으로 들어왔지만 가디아는 팔짱을 끼고 서서 서리 베일 너머로 제로와 케인을 바라본다.
까다롭긴. 어차피 나중에는 다 같이 다니게 될 텐데.
따로 떨어지는 순간 교단이 잡아먹으려 들 테니.
“제로랑 케인은 둘이 나가서 놀던가.”
“애도 아니고.”
“케인 선배님이랑만… 말씀입니까?”
나는 과자 사 먹고 하며 둘에게 용돈 쥐여 주고선 내보냈고 그제야 가디아가 천천히 서리 베일을 녹이며 들어온다.
“공주님이네, 아주.”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레이첼이 장난스럽게 속삭인 말에 내가 웃으며 저리 가라 손짓했고 그에 레이첼이 투덜거리며 부루마불을 리프와 같이 치우기 시작했다.
루나는 다과를 내오기 위해 물을 끓이는 모양이고.
원형 테이블에 삼각형으로 나와 가디아. 파이얀이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왜 불렀지.”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가디아의 질문에 내가 히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누나. 지금 데리고 있는 그 로제라는 하녀는 본가로 보내고 새로운 메이드를 들이는 게 어때?”
내가 손바닥으로 파이얀을 가리키자 파이얀이 깜짝 놀란다.
“저, 저요?”
“무슨 꿍꿍이지.”
당황한 파이얀과 황당해하는 가디아.
그 둘을 보며 나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