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118)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118화(118/373)
‘그 자식, 아니지…….’
이왕 충성하기로 했으면 홀로 생각할 때부터 호칭 정도는 바꿔야 하는 법. 사소한 것부터 마음가짐을 바꿔야 상대방도 알아채는 법이니.
파이얀이 홀로 중얼거리며 손톱을 깨물었다.
‘보스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파이얀은 살면서 자신과 비슷한 트레잇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물론 존재한다는 거야 상식으로 알고 있긴 했지만.
애초에 트레잇이 무엇인가. 재능 아니겠는가. 언변이 뛰어나거나 신체가 강인한 것 같은 트레잇이 흔하지 누군가의 감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트레잇이 흔할 리가 없다.
‘그런데 나보다 내 트레잇을 더 잘 안다고?’
처음에 이성 말고 동성에게도 매료가 통한다는 말에 코웃음 쳤지.
통해 봐야 그건 독특한 취향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정신력이 나약하거나 나에게 최소한의 성적 호감이 있거나 혹은 나를 전혀 경계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동안 동성에게 통하지 않은 건 어린 시절부터 용병 일을 해서일 것이다.
그야 파이얀 자신이 어린 날 몸을 의탁한 용병대는 종종 도적으로도 변하던 무리였고 딱 봐도 험악한 이들이었으니 파이얀이 아무리 어리고 약해 보이더라도 경계심을 푼 여자들은 없었겠지.
조금 자라 독립한 후에도 얕보이지 않으려고 강한 체하며 돌아다녔고 루비라는 가명을 쓸 때쯤엔 이미 동성에게는 매료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을 때니까.
‘그런데 아니란 말이지?’
그러면 일이 쉬워도 너무 쉬워진다. 게다가 이번에 초보자를 사냥하기 위해서 잡은 컨셉도 백합.
하얗고 순진무구하게 무해한 느낌이 아니겠는가. 혹시 몰라 울먹이며 여러 여자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매료를 걸었더니 다들 넘어오기도 했고.
중요한 건 매료로 올라간 호감은 계속 관리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것.
그러니 매료의 힘으로 얻은 만큼 정말로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동안 보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해도 사이가 틀어질까 겁내지 않게 된다.
‘사실 마음 같아선 보스나 보스의 파티원들에게도 호감을 얻고 싶지만.’
아델리안 빼면 전부 파이얀 자신보다 강자인 데다 분명 보기에는 나약한 아델리안도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매료에 걸린 적 없으니 그건 요원한 일일 터.
‘아쉬워라.’
파이얀이 키득거리며 자신이 받은 그 많은 보석과 마정석을 팔아 꾸린 아지트를 한번 훑어보았다.
매료를 이용해 단기간 얻은 인맥과 인재를 이용해 이득을 뽑아내는 수완 덕에 조직은 작지만 내실이 꽤 튼튼한 상태.
더불어 괜찮은 전력은 매료가 풀리기 전 어떻게든 조직에 제대로 말뚝 박게 만들었고 반대로 폭탄이 될 것 같은 녀석들은 매료의 힘으로 다른 조직에 떠넘기기까지.
이대로 수년만 지나면 수도뿐 아니라 제국에서도 알아주는 암흑가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힘이 좀 따라준다면.
‘매료는 나보다 강한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으니까.’
통하려면 파이얀 자신에 대해 아무런 의심 없이 믿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 정도 관계면 이미 매료가 필요 없거니와 애초에 일정 이상 되는 강자는 늘 타인을 경계하기 마련.
그러니 이 이상 세력의 규모를 한 번에 늘리는 방도는.
‘자잘한 다른 세력들을 잡아먹거나 혹은…….’
“파이얀.”
“깜짝이야!”
파이얀이 의자에서 펄쩍 뛰었다. 작지만 나름 아늑한 아지트의, 그것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집무실에 귀신처럼 나타난 사람.
“케, 케인?”
검은 머리와 황금색 눈동자. 그리고 어쩐지 모르게 한겨울 밤에 내쫓긴 것 같은 한기.
‘거슬리면 죽는다.’
파이얀이 천천히 눈동자를 내리는데 얼굴 앞으로 곱게 접힌 편지를 케인이 내민다.
“이건…….”
“아델리안이 전하라는군.”
왜 하필? 파이얀은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의 보스인 아델리안은 뭔가 다 아는 것처럼 굴면서, 실제로 뭔가 많이 아는 것은 확실한데.
단 한 가지.
자신의 파티원에 대해선 정말 하나도 모른다.
정확하게는.
“어서.”
‘자신의 파티원들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몰라.’
대놓고 은은한 살기. 그나마 견딜 만한 이유는 파이얀 자신이 완전한 인간이 아닌 요마족 혼혈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주 만나지 않은 파이얀도 알 정도로 케인은 인간에 대한 혐오를 제대로 숨긴 적이 없었기에.
말로는 하지 않지.
다만 그 눈빛, 그 살기.
상대방을 절대로 믿지도 신뢰하지도 않고 관심조차 없는 그 무심한 눈.
아예 일반인은 그 은근한 살기를 느끼지 못해서, 느끼는 이들 대부분은 기저에 깔린 그의 강력한 힘과 아름다운 외모에 굴복하여 웃어줄 뿐.
그런데 아델리안은 그걸 모른다. 그러니 케인을 이렇게 혼자 밖에 내돌리는 거겠지.
‘거기에.’
이런 케인을 이용해 다른 조직의 세력을 깎아 내라고?
“무어라 적혀 있지.”
“하, 하하…….”
파이얀이 양피지를 들고 그 안에 적힌 글과 케인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것이 신경 쓰인 듯, 케인은 편지를 빼앗아 읽었다.
콰직―
그리고 그의 손안에서 뭉그러지는 양피지.
대놓고 얼굴에 귀찮다고 쓰여있는데 아니 그전에 파이얀 자신의 말은 귓등으로 듣지 않을 것 같은 맹수의 위용에 오랜만에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리는 그때.
“다녀오지.”
“네? 네?”
파이얀은 자신의 눈앞에서 마치 마법으로 이동한 것처럼 단숨에 사라지는 케인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뭘 하려는 거야?”
그리고 그날 파이얀은 수도에서 가장 세가 큰. 가장 강한. 가장 가게를 많이 보유한 세 개의 조직 모두가.
우두머리를 포함한 간부진 대부분이 목이 잘렸음을 케인에게서 통보받았다.
* * *
“아가씨… 머리 빗겨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니 간단한 손질은 내가 하마.”
“그, 그럼 제가 마사지라도 해드릴까요?”
겁먹은 눈. 떨리는 어깨. 가디아는 저를 물 묻은 눈으로 바라보는 리제를 보며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려무나.”
“네! 아가씨!”
도플갱어 소동이 있었던 후. 리제는 10년 넘게 지켜봐 온 가디아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던 걸까.
‘하긴, 가족보다도 더욱 오래 본 사이인데 고작해야 아델리안 같은 녀석이 구분했으니.’
그것이 미안한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챙겨주려 하고. 마치 입 안의 혀처럼 굴려고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가디아가 자신의 청은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 몸짓에 흠칫하는 손길.
‘미안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하긴, 아델리안의 평판을 생각하자며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마법을 써 진짜 가디아의 외모를 평범하게 바꿔 가짜로 몰아 처리한 뒤 가짜를 진짜로 만들었다고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러니 리제는. 아주 오랫동안 모신 자신의 주인을 계속 의심했다가 반성했다가 다시 의심하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소리.
그리고 이것은 리제 본인이 믿음을 가져야 끝나는 것이니 가디아 자신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과거의 기억을 대조하는 행위도 이미 아델리안이 오기 전 몇 번이나 행했으니까.
“좀 쉬고 싶구나.”
“네, 아가씨!”
자신에게 떨어지게 되어 기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휴식 시간이 주어져 좋은 것인지.
‘곤란해.’
남성을 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뿐이지 그것 외에는 자신에게 흠결이란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타인에 대한 기대 대신 의심을 키우면 누군가의 위에 올라설 자의 위상이 서지 않는 법.
‘본가에서 새로운 아이를 데려와야 하나.’
혹은 본가가 아닌 외부에서?
그리고 그렇게 온 아이를 가디아 자신이 온전히 마음을 주고 품어줄 수 있을까.
아델리안이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심은 첩자는 아닌지 의심하게 되지는 않을까.
‘어렵군.’
저를 경계하는 리제를 내치지도 그렇다고 의심을 풀어줄 방법도 모른 체 시간은 지나만 간다.
톡톡―
작디작은 노크 소리.
가디아는 홀로 와인을 컵에 따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애초에 아카데미는 교육을 위한 장소. 그러니 주말도 아닌 평일, 그것도 가디아 자신이 쓰는 숙소에 타인이 온단 말인가.
게다가 중요한 건 자신을 찾을 사람이…….
“누이, 그거 사랑이야.”
순간 가디아의 등줄기가 오싹했다. 아델리안이라면.
그 망나니라면 자신을 굴복시키기 위해 그자를 보냈을지도 모르지.
보기만 해도 저절로 무릎을 꿇고 싶게 만드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지금 팔의 솜털까지 바짝 세우는 자.
“들어오라.”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서리 베일을 쓰고 굳건하게 바닥을 디뎌 선 채로 몸 주위에 얼음송곳을 띄운다.
더불어 만년설을 깎아 마법으로 형상을 고정시켰다는 빙룡의 활을 들고 아무것도 없는 활시위에 천천히 얼음 화살을 생성했다.
‘허튼짓을 한다면 단번에 머리를 노려야…….’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맥이 탁 풀린다.
허공에 떠 날이 서 있던 송곳도.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위의 화살도 봄볕 아래 아지랑이처럼 사라진다.
단 하나, 시야를 가리는 서리 베일을 빼고.
‘흐리지만, 잿빛 머리.’
가디아가 예상했던, 그 강렬한 황금색 눈동자와 검은 머리를 가진 사내가 아닌.
눈앞에 보이는 건 잿빛 머리에 키가 크고 순하디순해 조금 몰아세우면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유순한 얼굴의 남자.
그러면서도 그 멀끔한 가죽 아래 혼돈으로 채워진 것 같이 살아 있는 것들의 본능을 찌르는 공포를 몸에 두른 사내였다.
“저, 제가 혹시 뭐 잘못한 것이라도……?”
“그런 것 없다. 용건만 말하도록.”
서리 베일 덕에 흐린 시야 사이로 잿빛 머리의 사내가 머리를 긁는 게 보였다.
“아델리안 님께서 이걸 전하라 하셨습니다.”
“건방지게 말이지.”
하긴, 본가를 통해 명령조로 전달하지 않은 것만 해도 참으로 감읍하나이다. 하고 말해야 하나.
가디아의 차갑고 하얀 손이 제로가 건넨 편지를 받았다.
“감히.”
이 가디아를 오고 가라 해?
건방지기 짝이 없는, 명령문.
오지 않으면 그자를 보내겠다.
그리고 영영 너의 호위로 삼겠다.
“이 반푼이가.”
튼튼하지 못해 노역으로 돌릴 수도 없고 머리가 좋지 못해 영지에서 잉크 내나 맡고 살지도 못할 녀석이.
감히.
가디아가 차갑게 분노하며 제로를 서리 베일 너머로 노려보았다.
“널 보낸 것도 내 심기를 긁기 위함이겠지.”
“그건… 아닐 겁니다.”
수인족인 루나나 가디아와 말 한마디 못할 리프, 혹은 단순하고 다혈질인 레이첼을 보내기엔 불안했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제로는 주위로 냉기가 어리는 저 분노한 가디아에게 차마 변명은 하지 못하고 난처하게 웃었다.
* * *
“뭐라 했느냐.”
못 들은 체하긴.
나는 히죽거리며 가디아를 바라보았다.
“리제를 돌려보내고 저 아이를 누이의 시종으로 데려가라니까?”
“네가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구나. 감히 나에게 네 간자를 심는단 소리를 내 면전에서 하다니.”
가디아의 머릿속에 내 평가가 얼마나 나락인 줄 잘 알겠다.
“그럴 리 있겠어? 애초에 누이가 아카데미에서 어찌 생활하는지 저 아이를 붙이지 않아도 알고 싶으면 알카이도에게만 물어도 될 것을.”
내 말이 맞는지 베일 아래의 입술이 우물거린다.
“어차피 리제 그 아이. 누님 곁에 계속 두면 망가질 게 뻔하잖아.”
“그건…….”
파이얀만 봐도 알겠다. 부유감으로 소실된 나는 느끼지 못하나 일반인은 도플갱어 포션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아주 어릴 때부터 모셔왔던 자신의 주인이 정말 진짜일까 늘 의심하고 그 의심에 스스로 죄책감을 느껴서 더 잘해 주고.
그러면서도 내 손을 타고 있는 이 사람이 가짜라면 자신은 진짜를 배신한 게 아닌가.
이 사람이 모두를 속이고 기만하고 있을 때 진짜는 어딘가에서 비참하게 갇혀 있거나 혹은.
이 가짜가 죽인 게 아닐까.
그런 혼란과 심적인 고통.
“가디아, 누님도 대충 짐작하잖아? 그러니 그 아이는 본가로 보내. 그리고.”
나는 파이얀을 보며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파이얀, 넌 아카데미로 들어가. 나 대신할 일이 있어.”
알아본 바로는 베르뷔트가 알게 모르게 아카데미의 여왕이라지?
거기에 파이얀이라는 여왕을 집어넣으면 어찌 될까.
“네? 제가 여기서 일을 더 늘려야 해요?”
내가 진하게 웃자 파이얀이 몸을 바르르 떨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