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128)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128화(128/373)
좀이 쑤셨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몸속에 화가 차오르는 것 같은 상태가 얼마나 되었을까.
까마득한 예전인 것만 같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 알에서 깨어난 그 직후부터일지도.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기도 싫고 생각할 여유도 없으나 모든 근심과 걱정. 분노와 노여움은 주먹에 닿는 둔탁함만으로 달랠 수 있었다.
“심심해.”
길고 쭉 뻗은 팔이 움직인다. 허공을 정확한 자세로 한 번 치자 팡! 하는 충격음과 더불어 창문 닫긴 방 안에서 커튼이 흔들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텐데, 약속이란 게 뭐라고.
그냥 복면 하나 뒤집어쓴 채로 나가 거리를 쏘다니며 나쁜 짓이나 하고 다니는 놈들의 복부에 주먹 한 방씩만 박아 주고 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범죄 소탕과 더불어 레이첼 자신의 스트레스도 날아갈 텐데.
‘꽤 좋은 생각인데?’
게다가 그 김에 아델리안이 정해 준 사람을 밤에 습격하거나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무단 침입해 다 패버리고 가지고 나온다거나.
그런 것도 괜찮지 않나?
레이첼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많이 무르단 말이야.”
레이첼의 중얼거림에 뜨거운 오븐 팬을 큼지막한 장갑을 끼고 옮기던 루나가 입을 열었다.
“레이첼, 또 도련님 흉보지?”
“아, 그렇지만 솔직히 맞잖아.”
레이첼은 자신을 나무라면서도 크게 부정은 안 하는 루나를 바라보았다. 오밀조밀 귀여운 얼굴의 저 토끼족을 왜 이길 수가 없을까.
마치 잘못이라도 한 번 한 것처럼.
“그래두.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갓 만든 옥수수빵을 손에 쥐여줌에 레이첼이 피식 웃었다.
방금 오븐 팬에서 나와 뜨거운 김이 나는 그것을 한입 크게 베어 무니 옥수수가 알알이 터지며 아직 물처럼 흐르는 크림도 나오는 빵을 우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지만 나쁘지 않다는 게 좋다는 건 아니잖아?”
레이첼의 말에 빵을 반으로 나눠 식히고 있던 리프도 말을 얹었다.
―확실히 관리자께서는 무른 구석이 있으십니다.
“리프까지.”
루나가 입술을 조금 내밀며 한숨 쉬었다. 레이첼과 리프가 어떤 의미로 말하는 건지 잘 알고 있다.
몇 번이고 숙소에까지 나타나 테러하려 했다든가, 자신들의 모습으로 변해 주위를 맴돌던 치졸함.
만약 아델리안의 파티가 일반적인 사람이나 적당한 수준의 강한 사람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면 누구 한 명은 미쳐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
정작 육체적인 강함이 가장 떨어지는 아델리안마저 신경 쓰지 않는 공격이었기에 모두 가만히 있었던 거였지만.
레이첼은 턱을 괸 채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마도 아델리안이 두려워했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
아델리안이 아무것도 하지 말란 명령을 내렸을지라도 모두 나갔을 것이다. 특히 루나는 무조건이지. 레이첼은 그것에 돈도 걸 수 있다.
그리고 사실 문제는 여기 있었다.
아델리안이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그 수작을 부린 이를 찾아가 죽일 수 있었다는 것.
아델리안이 말해 준 것과 더불어 눈치로 보자면 지금 수작을 부리는 교단의 사람은 아마 아델리안의 또래일 것이다.
그럼 고작 30년도 살지 못한 인간족이란 소리인데.
케인 같이 특출난 개체가 아닌 이상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는가.
레이첼이 옥수수빵을 세 개 반째 입에 넣으며 고민했다.
물론 그 교단이란 것은 아델리안이 계속해서 신경 쓰는 것을 보아하니 세력이 제법 큰 모양이었다.
하긴 대륙 곳곳에서 꼬리를 밟히지 않고 계속해서 공양하며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심상치 않은 수준이긴 했다.
그러니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일이 커지는 걸 염려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딛는 거겠지만.
“그냥 확 쓸어버리면 안 되나?”
못하니까 손가락 빨며 참는 것과 할 만한데 그냥 참는 건 기분 나쁨의 급이 다르다고!
레이첼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내가 막 사고 쳐도 아델리안이 어떻게 잘 무마하지 않을까?”
“그러다 마스터급 암살자라두 오면?”
루나가 조금 차가운 눈으로 내려봄에 레이첼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아 왜, 그 대단한 케인 있잖아.”
쟤도 아무리 마스터 초입이라지만 저 나이에 마스터라는 단계에 발을 디딘 건 괴물이라는 말이라니까? 하며 이번엔 사과를 먹는데 루나가 차가운 눈 그대로 입만 느리게 웃었다.
“둘 이상 오면?”
“어…….”
“네가 해줄 거야?”
―저도 비공정이 근처에 있는 게 아니라면 마나 심장을 폭주시켜야 마스터의 경지까지 출력을 낼 수 있습니다.
레이첼은 붉은 눈동자로 분명 순하게 웃는데 어쩐지 한기가 도는 루나와 무표정하지만 어쩐지 압박감이 심한 리프를 보다가 슬금 시선을 내렸다.
“그, 그게.”
“도련님께서 그걸 모르시진 않으실 거야.”
물론 지금 한 방 먹이면 속이야 시원하겠지만 괜히 잘못 건드리면 일만 커지는 꼴이다.
“하긴, 그건 그렇지.”
레이첼은 은근슬쩍 말을 돌리며 넘어가 주는 루나를 흘긋흘긋 바라보다가 차마 덧붙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마스터 급이 그렇게 많겠어?’
* * *
내가 언젠가 한번 말했던 거 같은데.
원작은 후반으로 갈수록 파워 인플레가 미쳐 날뛰었다고.
전설에나 나오는 용살자.
즉, 드래곤 슬레이어가 후반에 가면 거짓말 좀 보태서 드래곤 수만큼 나온다.
‘게다가 마왕이라고 표현된, 악신교단의 살아 있는 신과 케인은 막판에 말 그대로 대륙을 지도에서 지워 가며 싸웠고.’
그러니 어지간한 유닛은 메인 파티나 네임드 출신이 아닌 이상 무조건 강하기만 하다고 눈에 익을 리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에리엘 야리카―양면의 신 바사하의 성녀]대표 Traits : [기적(S)] [고통 내성(S)] [고통 전이(S)]
히든 Traits : [양면(S)] [언령(D)]
나는 순간 정색할 뻔했지만 애써 거만하게 웃으며 제 몸보다 더 큰 로브를 입고 온 덕에 옷에 푹 파묻힌 것 같은 에리엘을 보며 속삭였다.
“눈썰미가 좋은 거야? 아니면 뭐 트레잇? 뭐 상관없어. 다음 수는 뭐야?”
일단은 태연한 척하자.
이유가 있으니 저 무시무시한 걸 나에게 붙였겠지.
나는 히죽거리며 남의 옷을 훔쳐 입은 것처럼 헐렁한 로브 덕에 팔을 접어 올려도 손등이 가려지는 에리엘을 곁눈으로 흘긋거렸다.
루나는 작고 아담한 이미지라면 에리엘은 그냥 말 그대로 어린애 같은 외형이라 누구나 에리엘을 보고 겁먹을 일은 없겠지만.
난 다르지. 알아도 너무 잘 안다.
침착하자, 아직 양면이 대표 트레잇이 아니니까 괜찮아. 최악은 아니다.
‘아니, 이미 엮이고 있는 게 최악 아니냐고.’
나는 괜히 게임이 잘 안 풀리는 척 블러핑 하는 셈 치고 표정을 구겼다.
진짜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려니 괴로울 지경.
원작을 포함해 이노센트 사가에서 유명한 세 명의 미치광이가 있다.
메인 파티의 루나, 중립의 에리엘, 악신교단의 카이자.
다른 말로는 혈탐의 루나, 고통의 에리엘, 광기의 카이자.
아무리 지금 미치광이로 개화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중 하나인 에리엘을 만나니 등골이 오싹하다.
나는 옷을 걷어 올린 탓에 보이는 팔 위로 소름이 돋은 걸 확인한 뒤 카드 패를 뒤집으면서 동시에 옷 소매를 내렸다.
쓸데없는 상상으로 위화감 만들지 말자. 차라리 정보를 취합하며 추론하는 게 나은 일이다.
‘도박장, 이곳은 바사하 신전의 함정이었구나.’
양면과 동전의 신. 어찌 보면 행운과 불행의 신인 하뢰르 만큼이나 도박장에 어울리는 신이다.
‘그런데 잠깐만… 바사하의 교단에 대사제가 있었나?’
나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세이렌을 뿌린 건 신전에서 대신관급일 뿐일 텐데.’
내가 알기로는 바사하 같은 경우 대중적인 이미지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 그만큼 세력이 크지 않다.
그래서 안 그래도 몇 안 되는 신관중 공식적으로 대신관은 없는 데다 성녀인 에리엘마저도 지금은 발표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셈.
그 소리는 이 함정을 만든 대신관은 표면적으론 다른 신의 대신관이란 말인데.
지금 생각에 너무 잠겨 있을 순 없으니 간단히 머릿속에서 정리만 한 뒤 나는 의자를 까닥거리며 에리엘에게 다음 주사위의 눈을 맞춰 보라는 듯 턱짓했다.
“이번에도 맞춘다면 내가 크게 떼어 줄게.”
“정말요? 저 돈 필요해요…….”
네가 왜 필요해. 바사하의 성녀인 네가 돈 걱정하면서 살 일이 뭐 있냐.
일단 에리엘이 나에게 바라는 관심의 방향이 뭔지 알겠다.
뭔가 특출 난 트레잇과 제법 뛰어난 외모. 거기에 유약해 보이는 성격과 돈이 필요하다는 설정까지.
그냥 아주 쥐고 흔들며 망나니짓 하라고 입에 떠먹여 주는 꼴이다.
‘내가 에리엘을 탐내서 더러운 짓이라도 하길 바라는 건가.’
하지만 단순하게 그걸 노리고 자신들의 성녀를 내보냈다라…….
‘상대해야 할 수가 느니 그만큼 변수도 늘었어.’
단순하게 악신교단만이 최대의 적이라 여기며 멍청하게 불빛에 홀리는 부나방처럼 달려들어선 안 된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시피 적대 관계라는 것은 유동적이니까.
크게는 세상을 멸망시킨 뒤 새로 시작하려는 사이비 종교가 악이지만 작게는 날 제 입맛대로 굴리려 하는 이도 적이므로.
‘하지만 필요하다면 손을 잡을 순 있지.’
나는 히죽거리며 에리엘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말했다.
“다음은 뭘까. 홀? 짝?”
“아마 짝수. 하프 다운인 거 같아요.”
“그래?”
그 말에 나는 4와 6에 코인을 조금씩 걸었다.
짝수에 하프 다운, 즉 6 이하의 수에서 원 더블, 즉 2는 아까 나왔으니 배제한 것이다.
“6입니다.”
나는 딴 칩의 일부를 쥐어 에리엘에게 건네며 속삭였다.
“재주 좋은데? 비법이 뭐야? 왜 직접 하지 않지? 종잣돈이라면 이제 제법 모였을 텐데.”
“그, 그런 거는 없고… 저는 혼혈이라 순혈 인간족만 배팅 가능한 이곳에서 게임에 참여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거짓말하긴. 너 인간족이잖아.
그렇지만 나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깔보는 투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수를 맞추는 건… 이미 자각한 기적인가? 아니라면 무의식적으로 쓰는 언령으로?’
혹은 둘 다 일지도 모르지.
뭐든 너무 쓰게 해서 쓰러지게 하거나 혹은 언령까지 자각시키면 곤란하니까.
“오늘은 이 정도 땄으면 된 거 같은데. 그나저나… 너 나랑 이야기 좀 할까?”
네게도 나쁘지 않을 이야기라 속삭이며 나는 에리엘과 일행인 것처럼 어깨동무했다.
어차피 대외적으로 내 이미지는 망나니. 그러니 에리엘을 나에게 붙인 이유도 감이 잡힌다.
그러니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줘야겠지.
“너 나랑 다니면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어때? 너도 그런 능력을 누가 써 줬으면 하고 나에게 말 건 거잖아. 그렇지?”
“그, 그렇지만 대형 카지노는 이렇게 얼굴을 가릴 수도 없어서 저는 출입 금지라…….”
“뭐야,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이미 한번 털었어? 용케도 밖에 돌아다니네.”
“하하…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이곳에서만…….”
아, 그러니까 여기서 너랑 자꾸 만나며 쉽게 이기는 도박에 빠져라?
함정은 뭘까. 널 너무 믿고 감당할 수 없는 큰돈을 날리거나.
혹은 널 믿고 이런 시시한 도박이 아닌 뭔가 다른 종류의 도박을 하거나?
아니면 네 능력을 탐해 납치 감금이라도 한다면 성녀 유괴죄로 처넣을 생각인가.
무엇이 되었건, 너희들이 어떤 것을 노리든지 간에.
나는 나름 잘 버틸 자신이 있거든.
“그래, 그럼 그때마다 잘 부탁해.”
“저야… 돈만 잘 주시면야…….”
웃었다. 저 미묘하게 안도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날 제법 수월하게 속여 넘기고 있다고 생각해?
나는 악수하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내가 뻗는 손에 무엇을 생각했는지 남의 것을 빌려 입은 것처럼 큰 로브 안에서 에리엘이 어깨를 움츠리더니 이내 천천히 손을 내민다.
그 하얗고 작은 손은 보기에는 말랑하고 보드라워 보였지만 악수할 때 내 손아귀를 잡는 힘은 제법 강했으며 손바닥 또한 보기보다 억세었다.
‘그러고 보니. 에리엘은 대형 양날 도끼를 쓰던가?’
서로 다른 생각이 교차하고 있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