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129)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129화(129/373)
‘자랑스러운 황립 아카데미 좋아하시네.’
소년은 입 안에서 번지는 핏물을 꿀꺽 삼켰다. 혹시 입 안에 고인 채로 한 대 맞아 어디론가 튄다면 지금보다 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하, 거지도 아니고 진짜. 귀족 출신이면 골드 좀 가지고 다니지 실버가 뭐냐.”
“한두 번도 아니고, 아니 이런 정신머리로 어떻게 점수는 그렇게 잘 받으세요. 네? 딱 봐도 돈을 좀 가지고 다녀야 몸이 편하겠네 하는 정답이 안 나와?”
소년의 얼굴로 비어버린 돈주머니가 툭 하고 부딪혔다 떨어진다.
양손을 뒤로 맞잡은 상태로 벽을 등지고 서서 고개를 떨궜다.
코에서 흐른 피가 툭툭 떨어져 바닥의 잔디 끝이 붉게 물든다.
순수한 인간족 혈통의 귀족 출신만 들어올 수 있는 황립 아카데미.
그 교칙에 분명 모든 학생은 가문의 위광을 버리고 하나의 개인으로 서로를 대하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사실 그럴 리가.
허울뿐인 교칙이다.
애초에 전부 익명으로 가면을 뒤집어쓰고 다녀도 결국 파벌이 생기고 어떤 식으로건 상하 관계는 생기기 마련.
그런데 고작 교칙 하나로 그것을 뒤집을 수 있을 리 없지.
아주 어린 나이, 보통 10대 초반부터 들어와 길게는 10년도 넘게 다니는 곳이 이 황립 아카데미다.
바깥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이 어리면 어린 대로, 나이가 많으면 많은 대로 그들만의 규율이 정해진 곳.
“다음에 또 불시에 뒤져서 골드 하나도 안 나오면 재미없을 줄 알아.”
“야, 그만하고 가자. 이걸로 몰래 술이나 한잔하자고.”
바닥에 침을 탁 뱉는 소리와 더불어 잔디가 바스락하고 짓밟히는 소리.
그것들이 점점 멀어진다.
혹시 가는 척하고 기다렸다가 고개를 들면 그 얼굴 우리 눈에 언제 보이랬냐며 다시 날아올 폭력이 두려워 한참이나 고개 숙이고 있다가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그렇게 한참 숨을 고르던 소년이 천천히 주머니를 주우려 몸을 숙이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어머…….”
연한 라벤더 향.
갈 곳 없는 분노와 수치를 희석시키는 그 향에 소년은 웅크려 앉은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괜찮니?”
연한 보라색의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땋은 여인. 순하고 맑은 진한 보라색 눈에 비친 소년의 얼굴은 핏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아 소년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괜, 괜찮아요.”
뭐가 부끄러운지 모르겠지만 부끄러웠다. 소년이 잘못한 것이라곤 단 한 가지도 없는데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수치스러웠다.
‘그냥 모른 체 가줬으면…….’
아무 말 없이 그냥 소년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시하고 가주는 게 더욱 마음 편했을 텐데.
풀썩하고 소년의 발치에 내려앉은 치맛자락이 무거웠고 자신의 앞에 같이 주저앉은 그 온기가 두려웠고 얼굴을 가린 소년의 손을 잡아내는 그 손이 더웠다.
“괜찮아. 괜찮아.”
얼굴을 가린 손의 손목을 잡는 그 손가락은 가는데 왜 이렇게 뿌리칠 수가 없을까. 천천히 소년이 얼굴을 드러내자 눈앞의 여인이 자신의 소매로 소년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내가 많은 것은 해줄 수 없지만, 가끔 맛있는 차 한 잔이랑 쿠키 정도는 나눠주며 네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어. 알겠니?”
코끝에 스치는 라벤더 향.
천천히 품에서 꺼내는 종이로 싼 쿠키와 그것을 쥐여주는 부드러운 손.
바람이 불어 다 묶이지 않아 조금 흘러나온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흔들리자 천천히 하얗고 가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다.
“…이름이 뭐예요?”
소년은 눈에 그 광경을 한 아름 담아내며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고 조금 쳐진 눈썹과 눈 아래 눈물점이 순해 보이는 여인이 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바이올렛이란다.”
* * *
“아가씨는 피부도 매끈매끈하고 머릿결도 좋아서 어떤 헤어스타일을 해도 다 예뻐서 좋아. 오늘도 내 마음대로 해도 되죠?”
열 개의 손가락 전부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르듯 쥐는 손에 가디아가 입을 열었다.
“마음대로 하거라.”
미리 아델리안에게 듣지 않았다면 저번에 만났던 그 여자와 같은 인물이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하얀 백합같이 청초하고 어리숙했던 소녀로 기억하는데 말이지.’
처음에 가디아 자신의 기억보다 몇 살은 더 성숙한 느낌의 여인이 찾아왔을 때 티를 내진 않았으나 제법 놀랐었다.
‘체형마저도 좀 달라진 것 같고.’
그때는 좀 더 가녀린 체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풍만한 느낌이라.
거울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여러 갈래로 땋아 매듭처럼 장식하는 바이올렛, 아니 파이얀을 바라보던 가디아가 입을 열었다.
“그대의 변장 말이야. 체형도 조절 가능한 건가.”
“어머. 눈썰미 좋으시네, 아가씨. 보스는 모르는 것 같던데. 맞아. 크지 않은 범위 내에서 가능해요.”
반푼이 아델리안과 고용 관계라고 했나.
그 때문인지 아주 공손하지는 않은 시녀가 생겼다.
재미있는 건 그게 아주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는 것. 저에게 아주 깍듯하게 잘하여 결국 정을 주었던 베르뷔트에게 실망해서 그런지 차라리 이런 타입이 나았다.
게다가 아카데미에서 베르뷔트의 입지를 약하게 만들기 위해 잠입한 사람치고 일도 잘하고.
“완성. 진짜 예쁘다. 공예품 같아, 아가씨.”
자신의 청은발을 여러 가닥으로 땋아 화려하게 뒷머리를 장식한 모습을 거울로 비춰줌에 가디아가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당장 황실 무도회에 참석해도 될 정도의 퀄리티. 분명 알기로는 모험가 출신의 용병일 텐데, 지금 모습만 보면 상상이 가지 않는다.
가디아는 자신의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다 문득 드는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하는 일은 잘 되어가는가.”
이 일은 아델리안의 어리디어린, 치기 어린 생각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글쎄, 가디아가 생각하기로는 이번 도플갱어 소동은 감히 크루거 가문에 대한 도전 정도로 아델리안은 받아들였을지도.
‘뭔가 미심쩍게 느물거리며 웃더니 모든 건 졸업 후 말해 준다 했던가.’
그래서일까 베르뷔트를 아카데미 내부에서 견제한다더니 아직 가디아는 그게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바로 성과가 드러날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뿌린 씨앗은 튼튼하답니다. 좀 기다리면 아주 크게 영글 것 같던데.”
이제 얼른 수업을 들으러 가라며 손가방을 챙겨주는 모습이 기꺼워 가디아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가면 그대의 임무가 시작되니 어서 보내려 드는 건가.”
“아. 그런 건 모른 체해 주세요, 아가씨. 쉿.”
하는 일이 꽤 즐거운 듯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이미 선량하고 다정한 연상의 어른이라는 가면이 깨진 모습이다.
음습하고 아릿한 미소.
그에 가디아의 눈길이 가늘게 변하자 파이얀은 과장스럽게 어머 하며 자신의 입을 가리곤 다시 자상한 얼굴로 웃었다.
“에이, 그래도 교직원이 아니면 고작 10세 이상 25세 이하의 아이들뿐인데 못된 짓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요, 아가씨.”
“…나이가?”
“비밀인데요?”
감히 지금까지는 자신과 말로 맞먹으려던 이는 없었기에 가디아는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드물게 입꼬리를 올렸다.
* * *
“그래서 잘 지낸다고?”
<응. 보스와는 다르게 나랑 엄청 말도 잘 통하고 말이야.>
네가 남자였으면 안 그랬을걸?
나는 어쩐지 뭔가 모르게 내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진 느낌에 미간을 좁혔다.
“아니, 일하라고 보냈더니 누이랑 노닥거리기만 해?”
<그럴 리가. 내가 누군데. 응? 나 파이얀이야.>
“제가 당신의 업적을 잘 몰라서 그만.”
저는 고작 오우거 잡고 사이클롭스 잡은 것 외엔 없어서 이름을 날리지도 못하였는데!
<…진짜 성격 나빠.>
“내가? 네가?”
<이 씨…….>
나 강 씨야.
요즘은 부유감 덕인지 약간 낯설어진 이름이지만 말이지. 아델리안으로도 강수호로도 정착하지 못한 기분이 드네.
“그래서 뭐 들은 거 있나?”
상념에 빠지기 전에 일 이야기나 하자. 내가 레몬티에 꿀을 섞어 스푼으로 휘휘 젓는데 파이얀이 들뜬 목소리로 세이렌을 통해 입을 열었다.
<재미있더라 보스. 귀족 놈들도 별거 없더라?>
“그 귀족 놈, 지금 귀 열고 듣고 있다.”
<앗, 실수.>
실수는 무슨. 지금 목소리가 신났다, 신났어.
“빠진 것 없이 적어서 보내주면 좋겠는데. 말로 들으며 내가 정리하자니 못 미더워서.”
<그럴게. 그런데 재미있더라. 베르뷔트? 아직 그쪽은 날 모르는 단계라 나만 알면서 일을 진행하는데 고 작은 계집아이가 제법 영향력이 커.>
그렇겠지. 악신교단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중적으로 활동 중인 게 베르뷔트다.
대부분 몸을 숨기고 대륙을 돌아다니며 공양하거나 비공정에서 만난 체이서처럼 유물과 아티팩트를 찾아다님과 동시에 배신자를 처형하고 다니지.
그런데 베르뷔트는 그 안에서 회유와 세뇌 등을 한다는 핑계로 아카데미를, 그것도 황립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으니.
‘교단에도 실세에 가까운 파벌일 거야.’
그런 베르뷔트를 어떻게 건 엿먹이면 얼마나 즐거울지.
<그런 계집아이를 괴롭히는 게 또 내 전문이지.>
“뛰어난 전문가님을 믿으며, 전 이만.”
나는 세이렌의 연결을 끊은 뒤 레몬차를 한 모금 마셨다.
초대장 중 하나는 신전이 뒤에 있는 걸 안 데다 1주일에 한 번 있는 도박 일에나 진행될 테니 이건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고.
‘분명 둘 중 하나는 베르뷔트인데.’
만약 투기장이라면 좀 위험하다.
내가 데려갈 수 있는 호위는 표면적으로 단 한 명.
그런데 나머지 참여자가 전부 악신교단의 수하들이라면.
‘수적 열세.’
물론 나는 어릴 때부터 본 히어로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다.
보통 히어로 하면 5인 이상이 1마리의 괴수를 패지 않는가.
반대로 악당 쪽이 여러 명이다?
그럼 이쪽에서는 보통 메카같이 체급 자체가 다른 하나가 나와 쓸어버리기 마련.
‘레이첼은 대놓고 데리고 가고 케인과 제로는 숨겨서 간다.’
정의는 승리하는 법.
이기면 그것이 정의다.
‘혹은 투기장이 아니라 단순한 와인 시음회로 포장된 술자리 모임이 베르뷔트의 초대장이라면.’
더 쉽지.
투기장같이 대놓고 나를 슥삭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면 나에게 일말의 아쉬움을 가지고 있단 소리니까.
나를 이용하려 들건 아니면 날 교두보로 내 파티에 손을 뻗고 싶어서건 간에.
당장 내 목에 칼을 찌르는 상황은 아닐 테니.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한 고작해야 약이나 마법 같은 것으로 내 이지를 흐리게 만들어 조종하려 들지 않을까.
‘믿는다. 부유감.’
나는 이 애물단지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든든한 부유감을 떠올렸다.
“아니, 꼭 이런 옷 입구 가셔야 해요?”
“요즘 수도에서 유행한다잖아.”
“그래두 옷이 너무…….”
루나의 취향은 땡땡이 바지 같은 거니까 그렇지.
나는 단추가 좀 느슨해 보이는 것 외에는 그리 나쁜 티가 나지 않는 셔츠와 짙은 색의 바지를 보며 으쓱거렸다.
“그럼 루나는 내가 뭘 입고 가면 좋겠는데.”
“아무래두 시음회니까 술도 마실 테구, 그럼 표적인데두 잘 안 보일 수 있으니까. 여기 깃털이 이렇게 풍성한…….”
“안 돼.”
제로에게 입히자, 제로.
내가 제로를 흘긋 바라보니 제로의 큼지막한 몸이 바들 떨린다.
“호, 호위가 그렇게 눈에 잘 보이는 옷은…….”
“무슨 소리야. 그럼 호위가 어그로를 끌어야지. 내가 끌어?”
―맞습니다. 언제나 앞에 서는 자가 타인의 눈과 귀를 끌어야 합니다.
“리프의 말이 맞아. 앞에 서는 자가 감당해야지.”
루나가 리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제로가 억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 능력은 보통 후위인데요!”
“검술도 쓰잖어.”
“활도 쓰고 드루이드 기술도 쓰고 보는 눈 없으면 바하디와 가뮈르 씨로도 잠시 변해서 정령술도 쓸 수 있습니다!”
당장 오늘 밤에 있을 와인 시음회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고르는 것부터 난관이다.
베르뷔트, 이런 정신 공격을 예상하고 초대장을 보낸 건 아니겠지.
“아, 왜 투기장이 다음인데! 거기에 난 왜 오늘 못 따라가는데!”
“그렇게 성질부리니까.”
그 와중에 아직 스트레스를 풀지 못한 레이첼은 소리치고 루나는 리프와 같이 깃털 셔츠를 들고 제로의 몸에 대보고 있으며 제로는 살려달라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이런 아수라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케인을 내가 살짝 고까운 눈으로 보는데 루나가 다가온다.
“곧 나가실 시간이에요.”
“그래? 그럼 다녀올게.”
내가 억울한 듯 한쪽 눈꼬리에 눈물을 찍 매단 제로와 케인에게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