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130)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130화(130/373)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몇 명 안 되는 소규모 모임이면 몰라도 수십 명은 넘어 보이는 이런 곳에서 사용자의 눈을 쓸 필요는 없지.
어차피 베르뷔트만 조심하면 나머지는 별 볼 일 없을 확률이 높다.
아, 베르뷔트의 호위 겸 칼은 조심해야겠지만.
‘그건 케인과 제로를 믿는 게 낫지.’
“샤하드 님!”
“샤하드 님. 오셨습니까.”
여자아이들이 드레스를 살짝 들고 급하게 걸어간다. 또래의 남자들도 어른 인체 굴며 점잖은 척 한곳으로 몰려갔다.
안 그래도 사람이 꽤 많다 싶었는데 황족도 참석할 만큼 규모가 큰 모임이다.
‘드디어 만났네.’
사실 세 장의 초대장 중 한 장 정도는 황족 중 누군가와 겹칠 거라 생각했으나 그게 딱 맞춰 샤하드인 건 좋은 소식이지.
이번 모임은 표면적으로는 주조장을 가진 귀족이었기에 대륙 곳곳에 있는 자신의 주조장에서 생산한 가문의 와인을 하나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마셔보실 와인은 북부에서 가져온 것인데 몇 번이나 얼었다 녹았다 했던 포도로 만들어 유난히 단 게 특징입니다.”
“샤하드 님, 맛보세요. 정말 달아요.”
“으웩. 난 너무 단 건 별로.”
샤하드가 와인의 향을 한 번 맡은 후 입에 넣어 굴리더니 고개를 젓는다. 마치 이렇게 달콤한 와인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
한데 그런 것치곤 계속 홀짝거리고 있구만.
원래 저 나이 때는 허세가 있는 법이지.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대화 중인 샤하드를 가볍게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남부 쪽 피가 진한지 피부색이 살짝 그을린 것처럼 갈색인 데다 노을을 받은 것 같은 적금발을 지니고 있었다.
저번에 본 트레잇 중 허약과 예민이 대표 트레잇이었지. 그래서인지 영 성깔 나빠 보이는 눈매네.
제 입맛이 아니라고 하면서 은근슬쩍 단맛이 도는 와인만 잔이 줄어 있다. 주위에는 여자아이들도 남자아이들도 많이 엉켜 있었는데 역시 황족은 황족이라는 소리겠지.
언뜻언뜻 보이는 손은 거칠고 굳은살이 박혀 있다. 뭔가 부단히 노력은 하지만 몸에 근육은 없는 걸 보니 아마 트레잇이 봉인된 상태인 데다 대표 트레잇이 허약함과 예민함인 게 문제겠지.
아델리안과 비슷한 상황인가.
그래도 저 녀석은 봉인을 풀고 나면 날아오를 수 있는 잠룡이나 다름없으니 나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적어도 아주 놈팡이는 아닌 것 같고. 몸에 난 상처나 손을 보면 노력은 하는 녀석인 걸 알 수 있으니까.
문제는 지금 저렇게 사람이 많아서는 내가 접근하기 힘들다는 것에 있다.
‘어쩐다.’
적당히 둘만 대화할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래야 봉인을 해제할 수 있는 아티팩트로 꼬셔보든가 하지.
사실 일단 만나면 의례의 술자리처럼 서로 섞여 대화도 하고 그러다 보면 넌지시 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약간의 소동이 필요한가?’
처음엔 봉인을 풀 수 있는 아티팩트에 대해 은밀하게 소문을 내볼까 싶었지만 그러면 샤하드의 이목뿐 아니라 봉인을 건 당사자가 먼저 나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본인에게 직접 말하는 게 나은데 저렇게 군중에 둘러싸여 있으니 당장은 힘들겠지.
나는 와인의 떫은맛 뒤에 은근하게 퍼지는 향을 숨과 함께 삼키며 잔을 내렸다.
케인에게 (소)폭발 포션이라도 들려주면…….
“으음, 그냥 폭발은 심한가…….”
조금 변형하는 게 낫겠지?
생각을 마친 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샤하드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누군가 내 곁에서 중얼거린다.
“후응, 이걸 어떡하지.”
어쩐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으악 하고 소리칠 뻔했다.
‘여기가 베르뷔트의 함정이었구나.’
몽실거리는 갈색 머리와 졸인 설탕처럼 달아 보이는 갈색 눈동자.
가면을 쓰지 않았어도 그 눈빛은 여전하다.
남을 도구로만 보는 그 차가운 눈.
“너무 도수가 강한걸… 못 마실 것 같아.”
손등까지 덮는 드레스의 소매를 살짝 손끝으로 쥐고 뺨에 대며 한숨을 폭 내어 쉬는 모습.
누군가 보면 대신 술을 마셔주고 싶을 정도로 가녀리고 달콤한 모습이다.
“아.”
그러다 문득 인기척을 느낀 것처럼 베르뷔트가 내 쪽으로 눈동자를 돌리더니 배시시 미소 짓는 것과 동시에 시선 올려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팔랑대는 속눈썹이 작은 나비의 날갯짓 같아 보이기도 했다.
루나만큼 아담한 체구에 얼굴을 밀 빛으로 밝고 환한 데다 머리카락은 한 올도 갈라짐 없이 작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누구나 이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너 진짜 거절당해 본 적 별로 없구나?’
아니, 누가 대신 마셔주겠다고 여기서 바로 나서겠어?
“저기… 괜찮으시면…….”
“싫…….”
“내가 마셔줄까?”
베르뷔트가 넌지시 운을 띄우고 내가 칼같이 거절하려는데 누군가 나와 베르뷔트 사이에 끼어들어 잔을 낚아챈다.
있구나. 그런 머저리가.
“베르뷔트 양은 이런 데 잘 안 오잖아. 하하. 여기서 아카데미 교복이 아닌 옷으로 보니 못 알아볼 뻔했어.”
“아… 그래요?”
“이 술은 쓰지? 저기 저 술이 아주 달고 맛있는데, 어때? 나랑 저리로 갈까?”
“아… 그래요?”
베르뷔트가 입을 가리고 상냥하게 웃지만 눈가로 핏줄이 올라온다.
아, 재미있네.
“안이 좀 쌀쌀하지 않아? 어깨라든가.”
“아… 그래요?”
저게 창과 방패인가.
나는 아, 그래요? 방패를 장착한 베르뷔트에게 눈인사하고선 냉큼 뒤로 빠졌다.
“자, 잠깐!”
내가 얼른 베르뷔트에게서 벗어나려 움직이는데 베르뷔트가 급하게 손을 뻗어 내 옷으로 와인이 튄다.
“아, 갈아입어야겠네.”
“제, 제가 실례를… 저쪽 방으로 가시면 옷이… 저기요?”
베르뷔트가 내 옷에 와인을 뿌린 김에 이때다 싶은지 내 쪽으로 다가오는데 창이 냉큼 방패를 막아섰다.
“저쪽 방? 역시 잠깐 쉬고 싶지? 저기 어때? 아, 그리고 이번에 우리 아버지가 광맥을 하나 파기로 했는데 이게 잘 되면 골드가 어마어마하게 벌릴 것 같거든. 베르뷔트는 보석 좋아하지?”
“아… 그래요?”
좋아, 잘한다. 광맥이 부디 팡팡 터지길 기원할게.
베르뷔트는 지금까지 쌓아둔 이미지가 있어 쉽게 뿌리치고 나에게 오진 못할 테고.
그동안 나는 샤하드와 대화하면 내 승리지.
“그래도 이왕 모임에 온 거. 1번부터 6번까지의 술 전부 내 궁으로 보내. 아, 어머니 드리게 아까 아이스와인? 그건 두 배로 보내줘.”
“여부가 있겠습니까.”
역시 애들인데 그냥 (소)폭탄 포션을 터트려 혼란을 주도하는 건 좀 그렇지? 나는 와인에 젖은 옷을 매만지는 척 몰래 아공간에 손을 넣어 속성석 몇 가지를 빼냈다.
“케인, 할 수 있지?”
“아마.”
저 녀석 입에서 아니라고 나오지 않은 한 할 수 있다는 소리다.
오러뿐 아니라 마나에도 어느 정도 장악력을 발휘하는 데다 이미 트레잇이 완벽으로 변한 이상 저 녀석이 못하는 일은 한정적이지.
“원래 행사에는 폭죽이지.”
로브를 뒤집어쓰고 인식 저하 배지까지 쓴 케인이 유령처럼 사라진 뒤. 나는 제로만 대동하고 천천히 샤하드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제로도 준비되었고?”
“예. 아델리안 님.”
샤하드는 원작에서도 이노센트 사가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적어도 악신교단 쪽으로 넘어가진 않았단 소리.
‘그냥 쓰레기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교단 쪽 쓰레기는 아니란 소리니까.’
어차피 나와 손잡을 녀석은 너무 깨끗할 필요가 없다. 그럴 거면 저번에 만난 사파이어색 머리의 페이아 황녀와 손을 잡았겠지.
오히려 적당히 나쁜 녀석이 내 양심 지키미가 되어 줄 테니까.
펑! 퍼벙!
“어? 불꽃?”
“불꽃놀이라니, 준비 많이 했네?”
“그, 그렇습니다! 모두들 보러 나갈까요?”
물건을 팔려면 임기응변에 능해야지. 와인 시음회를 주최한 녀석은 자신이 준비한 불꽃놀이가 아님에도 냉큼 기세를 타 사람들을 이끌고 나간다.
“샤하드 님 우리도 보러 가요.”
“샤하드 님?”
“곧 끝날 텐데… 먼저 갈 테니 어서 오세요!”
어쩐지 소파에 기대 늘어져 움직이지 않는 샤하드를 제외하고 그의 근처에 몰려 있던 아이들이 하늘 높이 터지는 불꽃을 보기 위해 우르르 테라스로 뛰어갈 때 즈음.
나는 제로와 함께 검은 로브를 쓰고 인식 저하 배지를 착용한 뒤, 전체적으로 어두운 이 홀의 그림자에 숨듯 천천히 걸어가 몸이 굳은 샤하드의 옆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황자님.”
아까 이 병이 맛있던데.
나는 테이블 위의 와인을 천천히 따라 한 모금 마시며 제로의 살기 덕에 몸이 굳은 샤하드에게 말을 건넸다.
“조용하게 뵙고 싶어 이렇게 무례하지만, 자리를 만들어 봤습니다.”
난 히죽히죽 웃었다. 아 즐겁네, 이거. 흑막 컨셉.
“너… 이 자식… 암살자냐?”
제로의 살기 덕에 입만 겨우 뗄 수 있는 상황에서 몸을 덜덜 떨면서도 날 노려보는 게. 의외로 강단 있네.
“그럴 거면 지금 이렇게 옆에 앉지도 않았죠. 샤하드 님.”
나는 샤하드의 빈 술잔을 채우는 척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허약과 예민… 샤하드 님의 트레잇일 겁니다.”
내 말에 굳은 몸을 어떻게 건 풀려 한 듯 움찔움찔거리던 샤하드가 멈췄다.
“…그래서, 그걸 비웃으려고 이렇게 번거롭게 찾아왔나?”
밖에서는 아직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고작 폭발 포션에 속성석만가지고 저렇게 화려한 불꽃을 내는 케인이 대단하지.
“그럴 리가요. 고작 그런 이유라면 제가 이러는 게 우스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테라스의 한쪽에서 베르뷔트가 날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모습 또한 눈에 들어왔다.
테라스보다 상대적으로 어두운 안쪽 소파라 바로 들키진 않겠지만 혹여나 베르뷔트가 오면 초 치는 일이니 조금 서두를까.
“알고 계실지 모르겠군요. 샤하드 님에 걸린 봉인 말입니다.”
“봉인? 그게 무슨 소리지?”
샤하드의 손끝이 조금씩 달싹거린다. 제로에게 한 번 더 신호하면 다시 몸을 공포로 굳힐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지금도 마이너스 된 이미지가 더욱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
“설마 지금까지 모르고 계셨습니까?”
나는 일부러 음습하게 큭큭거리며 웃었다.
“샤하드 님. 당신은 참 어리석군요. 지금까지 자신의 재능이 사슬에 묶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손을 잡을 만한 가치를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다시 저와 만나고 싶다면 저를 초대하는 파티를 여세요. 글쎄… 미로의 정원 정도면 단둘이 대화할 수 있겠지.”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그대로 소파 뒤로 몸을 숨기듯 이동해 크게 홀을 돌아 로브를 벗은 뒤 사람들이 몰린 테라스로 합류했다.
“케인, 돌아와.”
<마지막 불꽃을 터트리고 합류하지.>
펑! 퍼엉!
지금까지 터진 불꽃 중에 가장 큰 불꽃이 하늘을 수놓은 순간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재능 있네. 못하는 게 뭐야? 나중에 이쪽으로 나가도 먹고 살겠는데?”
“허튼소릴.”
“하지만 선배님. 정말 멋있습니다.”
나와 제로의 말에 케인이 미간을 좁힌다. 역시 케인은 둘 이상 모여 놀릴 때가 제일 재미있지.
그렇게 시시덕거리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하늘을 바라보던 베르뷔트가 천천히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개를 숙임에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다.
마치 우연처럼 필연처럼.
시선이 얽히고 나를 바라보던 베르뷔트가 분홍빛 입술에 호선을 그리며 아까 죄송했다는 듯 살짝 고개만 움직여 인사했다.
고개를 기울이는 것이 말랑하고 포근한 매력을 풍긴다.
물론 나에겐 안 통하지만.
‘일단 슥삭은 아니고.’
뭔가 단둘이 빠지자든지 할 분위기는 아니고. 애초에 시음회라 사람도 많은 걸 보니.
‘미인계?’
저번처럼? 베르뷔트. 아무리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저번과 완전히 같은 계략은 좀 게으르지 않냐?
나는 촉촉한 눈으로 날 올려보며 수줍게 웃는 베르뷔트를 바라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예전에도 생각한 적 있는 것 같은데.
난 사실 누님 스타일을 좋아한다.
물론 이곳에 와 부유감 덕에 누구에게도 반응하지 않아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취향이지만.
“아깐 죄송했어요. 성함을 알려주시면 제가 옷을 보내드리고 싶어요.”
인파를 헤집어 나에게 다가온 베르뷔트가 순진한 소녀처럼 뺨을 붉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난, 위험한 건 일단 곁에 두고 보는 성격이거든.
“내 이름은 아델리안이야.”
“아, 크루거 가문의 영식이셨군요. 저는 베르뷔트라고 해요.”
살짝 나를 올려보다 떨린다는 듯 눈동자를 내리는 각도, 아주 조금 붉어진 눈가와 약간 가빠진 숨.
연기(A)의 힘이란 이 정도인가?
거기에 지배(B)와 베르뷔트 자신은 아직 자각하지 못한 세뇌(A)의 트레잇까지.
아마 그 누구도 베르뷔트의 말에 쉬이 거역할 수 없겠지.
“저…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나와 베르뷔트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