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131)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131화(131/373)
“아직도 누군지 몰라?”
캉!
황금으로 만든 술잔이 벽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사내의 발치에 떨어진다.
샤하드의 보좌관은 허약한 몸으로 벽까지 컵을 던지지도 못하고 숨을 몰아쉬는 샤하드를 바라보다 다가가 수건을 건넸다.
“아니, 명단이 있잖아! 그런데 왜 못 찾는 거야!”
“그날 밤 사내는 총 31명. 그중 와인 향의 향수를 쓰는 사내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향수를 쓰는 사람이 많지도 않았거니와 후반에 있던 불꽃놀이로 테라스에 사람들이 대부분 몰려있던 터라…….”
건네는 수건을 쥐고 보좌관의 손을 뿌리치듯 밀어낸 샤하드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때 없던 놈을 찾으면 되잖아!”
“다들 그것에 눈이 팔린 데다 워낙 사람이 많아 수소문해도 다들 기억이 없습니다.”
“젠장.”
샤하드가 받은 수건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자신의 목덜미를 훔치며 어금니를 갈았다.
얼마나 은밀한 살기로 자신의 몸을 공포로 굳힌 것인지, 데려간 근위대 중 그 누구도 살기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니 샤하드 자신이 위험해 처했던 순간, 아무도 몰랐다는 소리.
그게 더욱 화가 났다. 이 비루먹은 몸뚱어리는 최후의 최후에도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
“…좋아. 그건 둘째치고. 내가 말한 다른 일은?”
“은밀하게 주술사와 거울의 신관을 데려왔습니다.”
식은땀을 닦아낸 수건을 아무렇게나 던진 뒤 샤하드가 자신의 적금발을 쓸어넘겼다.
“…실수 없었겠지?”
“아무도 모르게 데려왔으니 그들조차 누구의 명으로 온 건지 모를 겁니다.”
샤하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 재수 없는 녀석이 말한 대로 정말 자신의 몸에 봉인이 걸려 있는 거라면 그건 황실 내부의 소행이란 말이니까.
감히 황족의 몸에 장난질할 정도의 인물인 데다 아직까지도 들킨 적이 없을 정도라면 이렇게 자신이 봉인의 존재를 파악하고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할 테니.
‘사실 그냥 날 휘두르려고 한 소리일 게 뻔하지만.’
단 하나의 가능성, 그런 걸 그냥 두고 넘어가기엔 찝찝하니까. 그게 이유라며 중얼거린 뒤 샤하드가 손바닥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지르며 그때의 기억을 다시 되새겼다.
술에 적당히 취해 기분 좋게 늘어질 때쯤, 마치 뱀 앞의 개구리라도 된 것처럼 이유 없이 쏟아진 공포로 몸이 마비되었다.
암살자인가? 하고 생각한 순간 그 압도적인 공포 속에서 피어오른 것은 고작 자신을 노리다니 정말 멍청한 암살자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약한 자신에 대한 증오.’
가지고 태어난 트레잇은 고작 허약과 예민한 성격뿐. 황족은 황실에 묶인 존재라서인지 소문으로만 듣던 금력조차 뜨지 않았지.
그런데, 이 나약해 빠진 자신의 트레잇이 설마 거짓이었다?
“당신은 참 어리석군요. 지금까지 자신의 재능이 사슬에 묶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몸이 굳어 버린 뒤 자신에게 다가온 사내.
고개를 돌릴 수 없어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에겐 와인 향이 진하게 풍겼다.
‘체구는 나랑 비슷하거나 약간 큰 정도. 그리고 목소리는 중저음인가.’
그리고 피부로도 느낄 수 있었던 그 오만함.
감히 황족을 상대로 전혀 지지 않고 상대방을 제 아래로만 대하는 그 태도.
‘절대 하급 귀족은 아니야.’
“샤하드 님의 말을 전부 합친다면… 글쎄요. 그중 가장 신분이 높은 이는 크루거 가문의 영식인 아델리안입니다.”
“하, 그 망나니? 그 망나니일 리 없으니 제외시켜.”
자신과 비슷할 만큼 형편없는 트레잇과 비슷하게 행하는 기행 덕에 샤하드는 아델리안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더 구제 불능의 쓰레기.
가진 것이라곤 가문의 돈밖에 없는 주제 파악도 못한 망나니.
그러니 아델리안이 그날의 사내일 리 없지.
“차라리 타국의 귀족이 숨어들어 왔다는 게 더 말이 되겠지.”
그래, 오히려 그게 더 맞을 것 같다. 알려진 것만 취합하면 이 제국에서 가장 쓸모없는 재능과 성품을 가진 게 그 아델리안이니까.
‘재능도 노력도 근성도 없는 자식.’
샤하드의 적금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주술사와 신관을 만나보도록 하지. 찜찜한 건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거 같으니까.”
“예.”
보좌관의 부축 아래 샤하드가 천천히 일어섰다.
만약 봉인된 재능. 그런 게 정말 나에게 있다면.
‘악마라 해도 영혼을 팔아주지.’
샤하드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중얼거렸다.
* * *
“흐응, 후후.”
베르뷔트가 샤워를 마친 후 가운만 입고 침대에 뒹굴며 허밍하자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소녀가 수건을 가지고 오며 입을 열었다.
“기분이 좋으시네요, 베르뷔트 님.”
“너도 그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
잔뜩 젖은 머리로 침대에 비비던 베르뷔트는 소녀의 손에 이끌려 앉아 머리를 톡톡 두드려주는 걸 느끼며 무릎을 안고 턱을 괴었다.
“쿠쿡.”
가진 것도 없는 놈의 오만함으로 뭉쳐있던 그 얼굴이 아주 희미하게 다른 감정으로 풀린 순간.
베르뷔트는 아델리안을 떠올리며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분명 나에게 빠졌어.”
“그럴 줄 알았어요. 베르뷔트 님에게 벗어날 사람은 없으니까.”
소녀가 눈치를 보며 맞장구치자 베르뷔트가 달콤하게 목소리를 흘렸다.
“맞아, 가디아만 빼고.”
그건 사고나 다름없으니까.
베르뷔트의 얼마 없는 실패. 가디아가 떠오른 순간 미간을 좁히다 말고 다시 생긋 웃었다.
“대신 가디아의 동생을 내 손아귀에 쥘 거야. 그 얼마나 재미있는 복수야? 혹시 알아? 동생을 쥐고 흔들면 가디아도 나에게 복종할지.”
그만한 우애는 없어 보였지만 아니라도 괜찮아.
그 고고한 절벽 위 얼음꽃에 흠집을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감히 성신의 품을 거절한 대가는 치러야지.”
그냥 곱게 무너졌다면 좋았잖아. 모두가 비난하고 욕할 때 바닥까지 무너져 베르뷔트 자신을 잡고 의지하였으면.
그래서 교단의 품에 들어와 자신의 수집품이 되어 앞으로도 강한 이들의 어머니가 되었다면 모두가 행복했을 텐데.
“그날이 오면 얼마나 후회할지 벌써부터 기대돼.”
그러기 위해 아델리안을 가지고 노는 거지만.
“그 돈과 얼굴에 매달리는 여자들은 많을 테니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다가가는 게 잘 통하겠지?”
다음은 어디서 만나볼까. 길거리에서 코너를 돌다 부딪쳐볼까? 아니면 자주 가는 가게에서 같은 물건을 쥐려 하며 손을 맞잡아볼까?
“뭐가 나을 것 같아?”
아델리안에게 베르뷔트 자신이 소중하고 소중해서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상대가 되도록.
그때까지는 좋은 사람인 척 어울려 줄 테니까.
“재미있어, 정말.”
“다음은 이런 게 어떨까요? 무능한 이에게 유일한 자랑거리를 하나 만들어 주는 거 말이에요.”
베르뷔트는 속삭이는 숨이 간지럽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 * *
“전부 근질근질했나 보지? 야만스러운 남부 촌뜨기라고 욕하더니.”
“확실히 대놓고 투기장을 연 파티는 거의 없었으니 그럴 만하죠.”
남부 제독의 후계자. 아르만이 원형 투기장을 내려보며 피식 웃었다.
이제 막 시작한 결투는 아직 오러 사용자가 등판하지 않아 일반인 둘이서 서로 씩씩거리며 주먹을 주고받고 있었다.
“한 번 이길 때마다 상품을 걸어두니 나름 진지한데.”
“상품은 출전자들이, 데려온 귀족은 누가 이길지 돈을 거는 것으로 즐기니 서로 좋은 일이겠죠.”
“1번 이기라고! 네놈에게 걸었다니까?”
“2번에 걸어야지! 그 녀석이 내 노예인데 얼마나 다부진 줄 알아?”
난폭하고 야만적이며 바다의 짠 냄새와 피 냄새를 구분도 못 하는 남부의 촌뜨기가 개최한 투기장을 수도의 얼간이들이 아주 제대로 즐기고 있군.
아르만이 비스듬하게 서 주위를 훑어보다 아직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는?”
“아델리안이라면 저기 오는군요.”
아르만이 자신의 은색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황금처럼 빛나는 금색의 머리칼과 오만함을 뭉쳐 박아 넣은 것 같은 푸른 눈동자.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여인은 짙은 붉은색 머리와 루비와 같은 눈동자. 보통의 남자보다 훨씬 큰 키에 늘씬하면서도 탄탄한 육체, 더불어 강인하며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호위를 데려오라 했더니 애인을 데려온 건가.”
아르만이 중얼거리는데 거침없이 다가온 아델리안이 손을 내민다.
“재미있는 파티네. 마음에 들어.”
“그런가? 그쪽이 좋아할 거 같긴 했지. 이왕이면 괜찮은 호위를 데려와 경기에도 참여했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아르만이 억센 손으로 아델리안의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제대로 무언가를 해본 적 없는 손.’
굳은살이 있긴 하지만 빈약하다. 한 가지 무기나 일을 꾸준히 하면 그것에 맞춰 굳은살이 생기지만 이 손은 다르다.
고작 악수 한 번으로 알아낼 수 있는 일이었다. 아델리안이 얼마나 불성실한 인간인지.
검술도 활도 창술도 단련하지 않은 손.
아르만의 눈이 아델리안의 몸을 훑었다.
그리고 단련하지 않은 육체.
‘역시 소문 그대로인가.’
아마 여자들이 보기에 반반한 낯짝이 비실거리며 웃는다.
“무슨 소리. 참여하려고 데리고 왔는데.”
아델리안이 엄지로 자신의 등 뒤에 선 여인을 가리켰다.
분명 무투복을 입고 있으며 어지간한 사내보다 키가 크고 강인해 보인다고는 하지만…….
“오러 사용 금지인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잘 알지. 레이첼 잠시 여기서 기다려.”
여성이 남성보다 약한 것은 미각성자에게나 통하는 상식.
오러, 혹은 마나를 다루는 이들은 성별에 강함이 구애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투기장은 오러를 사용할 수 없으니 기본적인 맨손 결투인데.
아무리 무투가 출신이라고 해도 아델리안 정도 되는 신분이라면 분명 호위는 많을 텐데 굳이 여자 호위를 데리고 왔다?
‘쓰레기로군.’
이런 자식이랑 손을 잡으려 해야 하다니. 아무리 세이렌이란 물건이 엄청나다고는 하지만…….
아르만은 잠시 두통이 이는 감각에 이마를 매만지는데 이런 곳은 처음 온다는 듯 두리번거리는 아델리안의 호위가 눈에 들어왔다.
약간 상기된 얼굴, 떨리는 손. 분명 겁먹은 게 틀림없겠지.
곁눈으로 보니 아델리안은 레이첼이라는 자신의 호위를 여기 세워 둔 뒤 근처에 놓인 샴페인을 가지러 간 모양.
아르만은 투기장을 보며 호흡이 가빠지는 레이첼을 조금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레이디. 굳이 참여하지 않아도 됩니다.”
분명 겁먹어 그런 거겠지. 아무리 강한 이들이라 해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힘을 쓰는 것과 단순하게 누군가에게 폭력을 향하는 것은 느낌부터 다르니.
저 망나니 아델리안이 어쩌면 레이첼이라는 이 여인을 길들이려 데려온 것일지도 모른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오러를 사용할 수 없는 저 투기장에 던져 넣어 몇 번이고 두들겨 맞게 해주겠다는 비열한 속삭임을 불어넣었을지도 모르지.
‘거대한 이권보다, 난 눈앞의 약자가 더 중요하니까.’
이런 성격 탓에 몇 번이고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렸지만.
별수 없는 일.
“레이디. 제가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 이쪽으로…….”
아르만이 몸을 덜덜 떠는 레이첼에게로 손을 뻗는데 그 아름다운 얼굴이 히죽 웃었다.
“너무.”
“너무 두려워 마시고.”
“너무 신나!”
응?
아르만이 잠시 눈을 크게 뜨고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투기장으로 뛰어 들어가는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크하하! 이겼다! 다음!”
“다음은 나다!”
“어?”
아르만이 번호표도 안 받고 바로 원형 투기장으로 뛰어 들어가며 주먹을 으득거리는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하하! 뭐야, 이 계집은?”
“하하! 뭐야, 이 X끼는?”
레이첼의 옹골찬 주먹이 자신보다 더 큰 사내의 턱에 그대로 꽂힌다. 사내의 몸이 휘청하더니 레이첼의 머리통만 한 주먹으로 레이첼을 후려쳤다.
서로 한 대씩 번갈아 때리는 호쾌한 개싸움.
“뭐야. 내 허락도 없이 벌써 시작했네. 뭐 상관없나.”
잠시 멍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르만에게 아델리안이 술을 홀짝이며 다가왔다.
“그… 저 레이디는…….”
“내 호위. 한 명씩 데리고 오라며.”
“억지로 데려온 게 아니고?”
“안 데려왔으면 내 멱살 잡았을걸?”
아르만은 아델리안이 자신의 어깨에 어깨동무하며 피식피식 웃는 것도 모를 정도로 입을 벌린 채 투기장을 바라보았다.
“끄억!”
“하하, 캬하하핫!”
흐르는 코피를 손등으로 훔친 뒤 레이첼이 어느새 사내를 눕혀 올라탄 마운팅 자세로 양 주먹을 연신 꽂아 넣고 있었다.
“아, 내가 돈 건 다음에 들어가지…….”
굳어버린 아르만의 옆에서 아델리안이 아쉬운 소리를 하며 남은 술을 전부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