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141)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141화(141/373)
먹을 것도 잘 곳도 준다는 말에 혹해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계약을 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잠시.
레피드는 제법 이 유유자적한 생활에 적응하다 못해 이제는 만끽하고 있는 요즘이었다.
애초에 드래곤이 어떤 종족인가. 단일 개체를 평균으로 잡으면 이 대륙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지 않은가.
아니, 강하다 못해 단지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도 반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그 어떤 자극도 처음이 지나면 그보다 못하게 되는 법.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닳아 사라지는 것들을 잡기 위해서 필요한 게 유희며 꿈이었으니까.
그래서 레피드는 지금이 꽤 만족스러웠다. 제힘의 일부가 봉인된 것만 제외한다면.
그것만 풀려 있었어도 좀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이 미친놈들이랑.
“인간들은 원래 그렇게 사는 건가? 다들 그대처럼? 그 아델리안처럼?”
오만한 얼굴 감추지 않고 레피드가 웃자 알카이도는 익숙하게 칼로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 핏물을 움켜쥔 그대로 유리병에 흘려보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산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몸을 불태우는 것처럼 구는 걸 말하지.”
한 병, 두 병, 세 병.
도플갱어는 한 사람을 통째로 삼켜도 그 기억이 끊어지는 모순을 가진다.
하지만 오랜 시간 천천히 먹여 하나의 사람을 통째로 삼키는 것보다 더욱 많이 먹인다면 얼마나 더 같아질까.
알카이도는 여상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피드 님의 말씀에는 어폐가 있군요.”
“무슨 소리지.”
알카이도의 말에 레피드는 크루거 가문에 고용된 마법사라는 자신의 거짓 신분을 증명할 마법서를 장난스럽게 흔들며 물었다.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부분 말입니다.”
알카이도는 진득하게 피가 묻은 단검을 마른 수건 위에 올린 후 길게 찢어진 자신의 손에 포션을 뿌리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숨을 읊었다.
“그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레피드는 희끗한 회백색의 머리카락과 그레이블루의 눈동자를 지닌, 꼿꼿한 자세의 사내를 눈에 담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디가 잘못되었단 거지?”
알카이도는 상처가 사라진 손으로 자신의 수염을 한 번 훑은 뒤 마른 수건으로 검에 묻은 피를 천천히 한 면씩 닦아내기 시작하며 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레피드. 그는 드래곤이라 가장 낮은 이들의 삶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의문이었다.
알카이도는 붉은 기가 사라지며 천천히 제 얼굴을 띄우는 은색 검면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카이만 대공이 없는 지금, 크루거 가문의 모든 것은 아델리안 도련님의 손에 쥐여 있습니다.”
가주 대리란 그런 자리이므로.
비록 카이만은 아델리안을 너무나도 하찮게 여겼기에 살아 있는 반지걸이, 발이 달려 도망칠 수 있고 쉬이 훔쳐 가기 힘든 반지 보관함 정도로 여긴 모양이지만.
“크루거 가문은 아주 오랜 시간 대륙의 상권을 장악하며 골드를 모아왔고 또한 그만큼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힘과 지혜를 숭상하는 무리들이 많은 이 세계에서 골드만 밝힌다는 이미지 아래 가려진 또 다른 힘.
돈이 가진 위력.
모든 이들의 지탄을 끌어안고자 결심한다면 최소 대륙의 절반은 식량을 가지고 하는 장난질만으로 무릎 꿇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지 않는 건 결국 끝까지 갔을 때 무너지는 건 절대적 강자가 없는 크루거 가문일 게 뻔하니 하지 않는 것일 뿐.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알카이도가 천천히 몸을 돌려 레피드를 바라보았다.
모종의 실험을 하고 있는 카이만과 미래에 투자 중인 아델리안.
그 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나 그 종착지는 결국 이 가문의 영광일 테니.
그것만으로 알카이도는 짙게 웃었다.
“수단과 방법은 아직 너무나 잘 가리고 있습니다, 레피드 님.”
레피드는 창틀에 걸터앉은 그대로 입을 조금 벌리다 그대로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이쪽이 악당이라 생각해.”
“혹은 구세주일지도 모르죠.”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둘 중 누가 진정한 가문의 주인이 되느냐에 따라.
알카이도는 자신의 피가 담긴 유리병을 천천히 품속에 넣었다.
* * *
“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라죠, 여러분들. 트레잇이란 쓸수록 강력해집니다. 갈고 닦을수록 아름다워지죠. 그것이 재능이고 그것이 노력입니다.”
커다란 동글뱅이 안경을 쓴 교수가 자신의 지팡이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계속 읊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트레잇만큼 가장 나다운 것은 없다. 내 행동, 성격, 가치관, 나의 마음가짐까지 전부 트레잇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죠. 나도 모르는 나를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멈추지 말고 움직이세요.
동글뱅이 안경 너머의 눈이 흉흉하게 빛난다. 교수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찧자 사방에서 넝쿨이 자라나 손처럼 움직이며 쏟아졌다.
“후.”
그리고 가디아는 자신의 몸을 낚아채려 다가오는 넝쿨을 순간적으로 얼린 후 화살을 날려 산산조각을 낸 뒤 뒤쪽으로 급하게 빠졌다.
발목을 낚아채려 바닥을 스멀거리며 기어 다니는 수많은 넝쿨을 피해 마치 춤을 추듯 몸을 비틀어 아무것도 없는 시위에 얼음 화살을 몇 가닥 생성해 낸 뒤 사방으로 쏘아 발 디딜 공간을 만들어낸 순간.
그곳으로 누군가 사뿐하게 뛰어 들어와 몸을 웅크리더니 긴 창을 휘둘러 원을 그리듯 물보라를 일으키며 그곳에 섞인 바람 속성의 힘으로 다시금 밀려온 넝쿨을 전부 갈기갈기 찢었다.
“페이아.”
“가디아.”
가디아의 아이스블루 눈동자가 짙은 사파이어색 페이아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무슨 일이지.”
외가만 따지면 아주 먼 친척이 되는 둘이 같은 공간에 서서 사방에서 자신들을 낚아채기 위해 뱀처럼 기어오는 넝쿨을 찢어발기며 낮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가디아, 그대의 동생 말이에요.”
“…아델리안? 당신이 그 녀석을 어찌 알아.”
약간의 당혹감이 차가운 가디아의 얼굴에 스쳤다.
냉기처럼 차갑고 고고한 가디아와 낯가림이 심해 무표정한 데다 고요한 페이아가 등을 맞댔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요.”
“뭐?”
순간 가디아의 화살이 넝쿨이 아닌 바닥에서 부서지며 손바닥만 한 얼음 지대가 생겼다 사라졌다.
그리고 페이아는 허공으로 창을 내지르듯 바람을 섞어 넝쿨을 갈아내며 입술을 질근거렸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이들을 부리는 사람이란 걸 가디아는 알고 있을까.
지금까지 아카데미에서 들어왔던 가디아라면 그녀의 동생이 그렇게 무서운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상황일 테니.
페이아는 쉬이 말하지 못했고 돌려돌려 말했지만.
페이아의 부족한 대화 스킬로 인해 가디아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페이아.”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저는 당신의 동생인 아델리안 공자에 대해 알고 싶어요.”
얼마나 강한지. 탐욕스러운지, 잔인한지. 정말 소문대로 망나니라던데 자신이 본 그는 조금 그 소문과 다른 것 같아서.
두렵고 거대하며 의뭉스러웠으므로.
페이아가 곧은 눈으로 제 등 뒤에 선 가디아를 돌아봤으나 가디아는 온통 혼란스러운 얼굴로 화살을 쏘고 있었다.
“그, 나는. 찬성하지 않아.”
“무슨 의미입니까.”
“그 녀석은 페이아, 당신이 관심 둘 만한 게 아냐.”
관심 둘 만한 존재가 아니다?
더 크단 말인가?
이 나라에서 황족이 감히 관심줄 수 없을 만큼?
페이아의 짙은 푸른색 눈이 일렁거렸다.
“그게 어떤 의미죠, 가디아.”
페이아의 질문에 가디아가 난처하게 눈가를 찡그렸다. 그 망나니 녀석을 황족 중 그나마 정상인에 가까운 페이아가 관심을 가진다?
‘페이아를 위해서라도.’
가디아는 차갑게 일갈했다.
“아델리안, 그 아이를 궁금해하지 마. 그 아이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니까.”
그 어떤 비밀이 있기에…….
페이아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망나니에게 잘못 걸렸다간 순수한 페이아는 이용만 당하겠지.
가디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창과 화살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 * *
“늙은이, 제법이군.”
붉은 피 한 방울이 이마를 타고 내리다 케인의 속눈썹에 맺혔다.
한 번, 눈을 깜빡일 시간도 없이 응시하던 터라 핏방울은 아슬하게 그 첩모에 매달려 있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벌써 며칠째 이 공간에 있는 것인가. 달려도 달려도 잡을 수 없으며 검을 찔러도 닿을 수 없는 존재.
확실한 힘의 차이. 재능이 아닌 연륜과 경험으로 인한 벽.
그러나 당장 따라잡을 수 없다고 포기할 리가.
원래 케인은 불굴의 존재였으므로.
뒤틀린 공간의 마나를 읽고 자신 또한 뒤틀어 다가가고 검을 뻗은 지 얼마나 되었는가.
케인의 눈이 붉게 물든 채로 황금색 눈동자가 빛난다.
“아이야. 너야말로 제법이구나.”
그리고 그 모습에 어쩌면 지금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자.
황제의 검. 그의 그림자. 비수. 대륙의 전쟁 억제기.
초로의 사내 가낙스가 주름진 손으로 뒷짐을 진 채 허허롭게 웃었다.
그의 경이로운 마나의 양과 도달해 있는 경지에도 불구하고 마른 몸과 조금 굽은 등은 그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나약함을 뜻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허허, 아해야. 너도 괴물이구나.”
자신의 트레잇 [공간(SSS)]과 [시간(SS)]을 섞어 만든 자신만의 구역에 조금씩 파고들기 시작한 검을 보며 가낙스가 웃었다.
절대적인 권능의 영역.
가낙스가 모든 마나를 공격이 아닌 방어로 전환했을 때만 쓸 수 있는 힘.
가낙스에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거리는 멀어진다.
오로지 황실의 핏줄을 수호하기 위한 힘.
그것을 케인은 그 천부적인 재능과 괴물 같은 감각으로 마나를 뒤틀어 엉킨 공간을 쥐어뜯고 벌리고 짓이기면서.
한 치 한 치, 그 검 끝을 가낙스에게로 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보면 언제 닿을지 모를 무한한 시간 속에 멈춘 것 같이 보일 케인이었으나.
실을 풀고 풀어 나오는 그 가느다란 한 가닥 만큼씩 자신에게도 점점 다가오는 그 검에 가낙스가 크게 웃었다.
뒤엉키고 뒤섞였으며 굳어버린 마나로 가득 찬 그 공간에서 등 굽은 노인, 가낙스가 자신의 힘을 풀자 무엇보다도 느리게 움직이던 케인의 검극이 무엇보다도 빠르게 가낙스에게도 쇄도했다.
캉!
그리고 그 검날을 옥빛 롱소드로 쳐낸 가낙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길을 갈 생각은 없느냐. 네가 손잡은 이가 누군지는 내 모르나 필시 이로운 자는 아닐 터.”
가낙스가 스카를 쳐낸 반동으로 몸을 한 바퀴 돌리며순간 스카를 유성추로 바꾼 케인이 원심력으로 강하게 추를 휘두르자 가낙스가 몸을 뒤로 물린다.
가낙스의 얼굴에 손가락 반 마디만큼의 공간을 띄운 채로 추가 스쳐 지나감에 그 마나 섞인 풍압으로 가낙스의 뺨에 붉은 실선이 생겼다.
“거절하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아해야. 내가 직접 너를 지도해 주마. 네 누굴 모시는지 나는 모르나 제국의 황제 폐하보다는 그 영광이 낮으리라.”
가낙스의 말에 케인이 비틀어 웃었다. 그 시혜적인 태도로 누굴 가르치려 하는 건지.
“그런 건 내가 판단하고 내가 정해.”
“아직 네가 어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 눈에 가려진 것을 내가 거두어 주겠노라.”
가낙스의 말에 케인이 숨을 고르며 다시 검으로 변한 스카를 움켜쥐었다.
흐드러진 검은 머리칼 새로 황금색 눈동자가 강인하게 빛난다.
“그럼 나를 한번 부러뜨려봐.”
가낙스의 옥색 검과 케인의 무광의 흑색 검이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