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148)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148화(148/373)
집중이 잘되지 않네요. 이리도 날이 좋은데.
“아리아. 잉크 떨어진다.”
“아앗, 넵.”
휴. 서류에 잉크가 떨어지기 전 정령이 받아줘서 다행이에요. 아니면 곤란했을 텐데.
하지만 이게 다 아델리안 님 때문이에요.
‘제가 누군지 어찌 아셨을까요. 그리고 아셨으면서 왜 저를 이렇게 아직도 혹독하게 부리는 것일까요.’
아차차. 깃펜이 망가질 뻔했네요.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대우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해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 그러니 말이에요.
비록 계승권과도 멀고 향상심도 없는 저라지만 그래도 이 나라의 황녀니까.
이렇게 서류 노예… 아니, 서류를 담당하는 직원처럼 쓰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가치를 끄집어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게 테이트리아 황가와 알게 모르게 알력 다툼 중인 세 대공가 중 하나인 크루거 가문의 사람이라면 말이에요.
게다가 제 자랑은 아니지만 꽤 오래 궁리를 하여 완벽하게 탈출한 뒤 미궁 도시로 갔던 터라 정말 그 누구도 제 정체를 알 수가 없었을 텐데.
“할론 비서관님.”
“말해.”
“도련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평소 같이 투덜거리며 농담조로 말했던 것과는 달리 제법 진지하고 진중한 지금의 제 질문이 할론 비서관님에게는 제법 생뚱맞았는지 정말 골렘처럼 일하시던 분께서 손이 멈칫하시네요. 드문 일이에요.
“악덕 고용주.”
“아, 그건 맞아요!”
역시 할론 비서관님! 저랑 마음이 너무 잘 통해요!
약간 피곤해 보이는 눈가를 매만지던 손으로 서류를 다시 넘기며 입을 여시네요.
“뭐 대외적으로는 그리 좋은 평판을 지닌 분은 아니시지. 카이만 가주께서 자리를 비우자마자 밖으로만 나도시며 유랑하시는 중이니까.”
하긴. 종종 시녀들이 지금쯤 골드를 마구 뿌리며 술로 된 호수에 들어가 계실 거라며 험담하는 걸 종종 듣긴 했죠.
“하지만 정말 그런 분은 아니시잖아요?”
“그건 너와 나 외에는 몇몇만 아는 이야기니까. 특히 내성에서도 기사단을 제외하면 나돌지 않는 이야기인데 외성은 더하지.”
조금 의아하긴 해요. 보통사람이라면 자신을 안 좋게 말하는 것이 신경 쓰일 텐데 아델리안 님은 보란 듯이 더 부풀리기도 하셨으니까.
“지금 뭘 하고 계실까요? 왜 그릇된 평판을 계속 끌어안고 계실까요? 어째서 다른 후계자들처럼 가신들을 모아 회의하며 굳건한 권력을 확인하지도 않고 이리 무방비하시나요.”
알게 모르게 산재해 있는 문제가 너무나도 많아요. 아직 확실한 후계자로 공인된 게 아니니 가디아라는 경쟁자는 물론이거니와 방계 쪽에서도 호시탐탐 군침을 삼킬 텐데.
가장 확실한 억제력인 카이만 가주는 최측근 사람들만 아는 이유로 잠적한 상태에서 어째서. 어째서 사람들을 구슬려 평판을 회복하고 지지를 받을 생각 하지 않는 건지.
제가 배우던 것 어디에도 이런 건 나오지 않아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죠.
군주가 아닌 작은 시골의 영주도 쉬이 하지 않을 행동이에요. 밖으로만 나돌며 재산을 탕진한다는 소문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모를 분이 아니라는 게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 거죠.
“도련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무엇을 바라고 저를 여기서 단순하게 서류 보조로 쓰며 내치를 하지 않고 밖에서 무려 1황녀 세리아 님과 견주려 하시는 걸까요.
비록 세리아 황녀께서는 트레잇의 문제로 평가 절하당하고 있긴 하지만 알게 모르게 굳건한 황위 계승자이신데.
‘도대체 본성을 두고 수도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 걸까요.’
그 와중에 세이렌은 뭔가요. 갑자기 내성에서 근무하는 사람에게만 먼저 지급되는 혜택이라며 나눠준 그 상식을 파괴하는 아티팩트는 뭘까요.
“이해하려 들지 마.”
“네?”
제 무한한 상념을 알아차리신 듯 할론 보좌관께서 말을 건네시네요.
“보통사람의 머리로 이해되는 분은 아니시니까. 원래부터 그랬지.”
역사서건 음유시인의 입이건.
어디엔가에 결국 이름이 오르내릴 사람은 일반 사람의 상식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이들이었으니.
그리 말을 잇던 할론 보좌관님께서 오늘치 서류를 전부 끝내셨는지 일어나셔서 다가오셨습니다.
“도와줄까? 대신 밥은 네가 사고.”
“좋아요!”
당장은, 아델리안 님에 대한 원망보다 서류를 일찍 끝낼 수 있다는 기쁨이 커서 그 모든 의혹이 한 번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 * *
케인의 말에 내 방 밖으로 나가니 그때처럼 옷을 잘 차려입은 풍채 좋은 중년 사내가 자신의 콧수염을 둥글게 말며 서 있었다.
“카이만 진원 크루거 대공의 영식, 아델리안 수호 크루거는 테이트리아 제1 황녀 되시는 세리아 폰 테이트리아 님께서 내리는 말씀을 받으시오.”
황제 폐하의 정식 칙서도 아니니 무릎 꿇고 경의를 표할 것도 없이. 나는 약식으로 예법에 명시된 공경 섞인 인사 후 비딱하게 섰다.
그런 내 모습이 보기에 껄끄러운지 무려 1황녀의 사자께서 눈썹을 까딱거리지만.
어쩌겠는가. 저자가 이리 비공식적으로 나에게 왔다는 것은 나름 세리아가 신임하는 작자라는 소리고 그럼 저번 사건도 알 테니.
누가 지금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알겠지.
“황녀께서 내일 오후 1시 황녀 별궁으로 오라는 전언을 남기셨소.”
“아, 정말입니까? 큰일이네. 저를 그렇게 부르시면 소문에 박차를 가하는 거 아닐지……. 제가 너무나도 세리아 황녀 저하를 위하는 마음에 저어되어 걱정이 먼저 앞섭니다만?”
왜 날 불렀나 했더니. 저번에 날 얕보고 크루거 가문에 항의 넣은 일로 내가 엿 먹인답시고 낸 소문 때문이겠네.
짐작이 맞았는지 내 말에 콧수염 사내의 콧수염이 파들파들파들 떨려 댄다.
그래도 나름 황녀의 사자인지라 더 긁어도 이 이상의 반응은 없이 기계처럼 단어를 나열했다.
결국 축약하자면 할 이야기 있으니 만나자를 종이 몇 장에 써 보내는 건지 원.
“…내가 전달받은 명은 그게 끝이오. 그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던 사자가 돌아간 후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방에서 슬금슬금 나온 아이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가기 전에 누구 신경줄 좀 더 긁고 가야겠다.”
내 말에 리프가 드물게 미소 짓는다. 더불어 레이첼도 배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크, 누군지 모르겠지만 운도 지지리 나쁘지. 굳이 떠나려는 재난 덩어리 잡고 복장 터지게 생겼네.”
레이첼이 낄낄거리며 하는 말에 루나가 눈짓하자 레이첼이 제 손으로 입을 가린다.
“도련님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
“아니, 그 솔직히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다 이거지.”
그 지체 높은 황녀의 이미지에 똥물 튀긴 적이 얼마냐 있겠냐고오 하며 변명하는 레이첼을 보며 루나의 눈꼬리가 더 올라간다.
“우리 도련님이랑 소문난 게 똥물이구?”
점점 구석으로 몰리는 레이첼과 구석으로 몰고 가는 루나를 보며 나는 루나를 열심히 응원했다.
루나 이겨라. 루나 이겨라. 레이첼 요즘 날 너무 막 굴리는 경향이 있단 말이지.
“그래도 이번엔 저희들이 따라갈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아델리안 님.”
“아아, 호위를 데리고 와도 좋다고 하니까.”
마음 같아선 케인과 당당하게 들어가는 김에 성소에 한번 집어 넣고 싶긴 한데.
‘케인과 만났다는 그 수호자가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성소 자체가 황족만 아는 비밀 통로와 황도 지하의 수로와 연결이 되어 있으니 애매하게 접근했다가는 오히려 이쪽이 난처해질 수 있다.
원작의 흐름으로 봐서는 몇 년 안에 죽는 인물이라 나중에 성소에 잠입했어도 별 탈이 없었던 거 같고.
‘그렇다고 대놓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도 좀.’
일단 성소에 들어가는 건 뒤로 미루고.
“레이첼, 사고 안 칠 자신 있지?”
“당연하지.”
“루나랑 리프는 황도라는 특수성 때문에 미안해.”
―아닙니다. 관리자님.
“걱정 마세요, 도련님.”
“그럼 호위는 케인과 레이첼에게 맡길게. 그리고 제로.”
내 부름에 제로가 녹색의 보석안으로 나와 마주한다.
“예. 아델리안 님.”
“넌 내가 따로 뭐 좀 부탁하자.”
내가 느리게 웃으며 입을 열자 제로가 살짝 미묘한 얼굴을 한다.
“무엇 말씀이십니까?”
“네가 아르만에게 다녀와야겠어.”
보기보다 신중한 성격이라 화답이 늦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보기보다 결단력 있는 성격이었다.
남해 군도에 있는 자신의 선단에 대한 전수 조사 및 나와 손잡았을 때 서로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최저점으로 잡아 계산한 것들부터.
선박과 선원을 교체하고 질을 끌어 올렸을 때 들어갈 비용을 산출한 보고서와 어떤 식으로 교체하고 꾸려나갈 건지에 대한 계획안까지.
모든 걸 준비한 뒤 연락한 아르만은 결국 나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가 아는 아르만은 이렇게 나온 이상 절대로 배신하지 않지.
‘그러니 적당히 이노센트 관련해서도 끌어 들여야 해.’
물론 사람의 일에 100%란 없다. 특히 현실에서는.
내가 아는 아르만은 절대로 타인을 배신하지 않는 성정이나 그것은 소설과 게임에서 나온 설정이고.
현실이 된 지금은 어떤 변수가 톱니에 끼여 망가질지 모르는 법.
어디서 갑자기 닌자라도 나타나 아르만의 목에 수리검이라도 대고 협박하면 일이 틀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내 편으로 끌어들인 사람에게는 보통 하나에서 두 가지 이상의 안전 장치를 마련해 뒀다.
뭐 흔하게는,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고는 하나 대부분은 알지 못할 신의 계약서. 그리고 마음의 빚. 레이첼의 경우 맹약까지.
마음의 빚을 어찌 그 어깨에 올리는가. 보통은 그 사람에게 절실한 것을 제공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법.
어찌 보면 너무 계산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 같겠지만, 최소한의 안전 장치는 나에게도 필요했다.
여긴 세이브가 없으니까.
더불어 내 그릇된 현실 감각도 언제 함정으로 돌아와 내 발목을 잡을지 모르고.
‘그러니 아르만에게도 하나 더 걸어두는 게 맞지.’
더불어 지금 할 일은 미래의 전력상승 및 저비용 고효율 전략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르만의 저택에 잠입할 수 있겠어?”
내가 생각을 마친 후 제로에게 물으니 제로가 큼지막한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사실 지금까지 저희가 제대로 잠입한 적은 없지 않습니까, 아델리안 님. 황궁도 알람 마법이 꺼진 채 정문으로 들어갔고, 가든파티도 미로 정원의 경우 의도적으로 길이 트인 부분이 있었고요.”
대륙 최대의 제국. 테이트리아의 황도이니 어지간한 저택은 전부 강화된 알람 마법을 걸어뒀을 거란 말이었다.
“그러니 흔적도 없이 잠입했다가 다시 곱게 나오는 것은 좀 힘들고. 들어갔다가 걸려도 안 잡히고 나올 수는 있습니다.”
하고 제로가 느리게 웃는다.
제법 자신감이 붙었네, 제로. 과거에는 도움 되는 게 없어서 어깨가 처져 있던 날도 있더니.
나는 제법 기특하다는 눈으로 제로를 바라보다가 안 들키는 것은 무리지만 잡히진 않는다는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좋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잠입할 수 있다 했어도 네 모습을 한번 드러낼 일이 있어서.”
내 말에 제로가 조금 의아한 얼굴을 한다.
“원하시는 바가 있으신가 봅니다. 그런데 왜 케인 선배님이 아닌 제게 맡기시려는 겁니까? 저야 좋긴 한데.”
신임받는 거 같고 하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제로를 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세리아 황녀를 만나는 시간에 맞춰 진행할 거거든. 거기에 더불어 이미 우리 파티의 인원과 인상착의는 전부 파악된 상태일 테니.”
제로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다른 이로 변해 일을 진행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대외적으로는 이노센트의 살짝 드러난 연락용 창구 정도의 포지션을 지키고 싶거든.”
하지만 저번에 아르만과 대면할 때 내가 소문대로 망나니에 머저리가 아님을 보여준 게 약간 걸렸다.
이 상황에서 이노센트에 대해 어느 정도 오픈하면 내가 원하는 포지션을 고수할 수가 없을 것 같았기에.
그러니 케인에게 일을 시키는 경우 일말의 의심이 번질 수도 있으나 나와 케인, 레이첼이 다른 곳에 있는 상황에서 제로가 다른 모습으로 교란하면 훨씬 일이 쉬워질 터.
내 말에 제로가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아델리안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