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152)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152화(152/373)
저번처럼 대놓고 떨어진 별궁이 아닌 본궁의 곁에 붙은 후원의 한쪽.
볕 밝은 날, 화려하게 꾸며진 후원은 돈을 꽤나 쓴 것처럼 보이는 크리스탈 온실에 딱 봐도 먼 곳에서 공수해 왔을 독특한 식물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곳에 놓인 원형 티테이블 위에는 연한 핑크색 레이스 식탁보에 알록달록 장식된 컵케이크와 더불어 달콤한 과일차까지 아주 사랑스럽고 달콤하게 꾸며져 있었다.
누가 보면 아주 친근한 사이인가 싶겠지만 이건 무조건 나에게 보내는 도발이지.
나는 실실 웃으며 일단 의자에 앉아 세리아 황녀를 기다렸고 내 뒤에 좀 떨어진 곳에 케인과 레이첼이 대기한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제가 조금 늦었나요? 미안해요.”
들쩍지근하게 달라붙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몸을 돌려 이곳으로 걸어오는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물결치는 황금색 머리칼과 보석을 갈아 만든 것같이 진한 보라색의 눈동자.
햇볕 아래에서 보이는 그 얼굴은 마치 한 폭의 명화와 같았으나 그게 나에게 그 어떤 감흥을 주겠는가.
각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킨 순간 서로 아주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자, 그럼 서로 한번 엿 먹여 보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힘주어 꾸미고 나온 세리아 황녀를 보며 나는 그동안 빠듯하게 연습한 귀족식 예법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고귀한 얼굴을 뵙습니다.”
나의 완벽한 예법에 세리아 황녀가 눈웃음을 짓더니 손을 올려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는 소리를 허공에 녹였다.
“그리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됩니다, 아델리안 공자. 우리가 이 정도 만났으면 이제 아주 각별한… 친구 사이와도 같지 않나요?”
내 예법에 세리아 황녀가 예의상 화답을 한다.
원래 여기서 그 고귀함과 아름다움과 지성 등등을 계속 칭찬해 주며 무슨 암호처럼 돌려 말하기를 해야 하지만 굳이 뭐… 내가 세리아에게?
그러니 예의상 편하게 굴란 그 말을 내가 놓칠 리 없지.
“아, 그렇다면야. 앉으시죠. 맛있겠는데.”
세리아 황녀가 앉기 전에 냉큼 의자에 먼저 앉아 컵케이크를 집었다.
내가 의자를 끌어다 앉는 모습을 제로가 봤다면 반응이 웃겼을 텐데.
그나저나 다른 귀족 자제들이었다면 세리아를 위해 의자를 빼주며 그 미모에 찬사를 보내고 어쩌고 하겠지만.
우린 그런 사이 아니잖아?
내가 싱글싱글 웃으며 빡빡하게 저어 만든 버터생크림이 가득한 컵케이크를 한 입 크게 베어 무니 세리아의 웃는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하. 하하. 그러게요. 참 맛있어 보여요. 그렇죠?”
그렇지만 세리아도 짬이 있지.
다시 화사하게 웃으며 자기 손으로 알아서 무거운 의자를 끌어다 앉고는 찻잔을 들고 한 모금 삼키기 시작했다.
“그날 그렇게 보내드린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초대했어요, 공자.”
손끝으로 찻잔을 살며시 매만지며 상냥한 어조로 말을 건네는 세리아를 보면서 나는 단맛이 강한 컵케이크를 한 입만 먹고 슬며시 접시에 놓았다.
아,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봐. 달지 않고 맛있어요…가 좋은데 이거 너무 달다.
“저를 이렇게 부른 걸 호사가들이 알면 무어라 할지. 예견하고 초대하셨으리라 싶기는 한데.”
그게 아니라면 또 납치하듯 초대했겠지. 오늘은 나름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온 데다 날 알아본 이들도 많은데 어쩌려고 저러나.
물론 감 잡히는 거야 있다만.
내 말에 세리아가 자신의 물결치는 금발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상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말이 선하네요.”
하기야. 나올 말이야 뻔하다.
내가 퍼트린 추문.
세리아의 경우 봉인 이외의 트레잇은 평범보다 더 이하인 데다 지금까지 경쟁자들을 전부 봉인 트레잇과 더불어 황족이니 누릴 수 있는 권력과 금력으로 견제했을 터.
정작 본인이 가진 능력은 미흡하기 그지없으니 내가 끌어들인 진흙탕 싸움에서 고단수의 견제는 애초에 포기한 모양.
지금 공공연하게 퍼진 소문은 테이트리아 제국의 제1 황녀 세리아가 대륙에서 제일가는 망나니와 눈이 맞았다든가, 가문만큼은 강성하니 그것을 견제하기 위한 정략혼의 밑바탕이라든가 하는 그런 것들이다.
생각해 보면 아주 영양가 없는 말은 아니지. 세리아도 한 방 비책으로 깡그리 소문을 날리는 것은 포기했을 것이다.
원래 그런 가십은 부정할수록 더 먹혀들어 갈 수밖에 없거든.
결국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정면 돌파. 그리고 사실상 오늘의 만남은 그걸 위한 것이다.
어차피 추락한 평판, 그리고 그 추락을 새로운 발돋움으로 쓰고 싶은 욕망.
“책임, 지실 거죠?”
세리아 황녀의 그 말에 내가 대놓고 크게 웃었다.
“제가요?”
“네. 공자께서요.”
“왜죠?”
“아시면서. 그런 말을 길거리에 뿌리신 것 자체가… 이것을 위함이 아니셨나요? 간절하셨다 생각하는데.”
간절했다라.
내가?
뭐 그리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두각을 보이는 가디아와 쥐뿔도 없이 무능력한 나.
결국 가디아가 졸업하고 나면 가문은 무조건 그녀가 이을 거라 다들 점치고 있을 테니.
세리아가 말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네가 바란 게 끈 떨어지기 전 나와 질척하게 얽히는 거 아니었냐. 그래서 그 가문에서 버려지는 대신 나에게 의탁하고 싶단 신호가 아니었느냐.
그렇다면 약혼하자. 대신 대가를 치러야지. 이 뜻인 거지 뭐.
나와 세리아가 서로 마주 보다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미소 지었다.
남이 보면 이게 무슨 대화냐 싶을 텐데, 나름 유서 깊은 귀족들의 대화 방식이다.
그 뭐냐, 돌려 말하기. 말 아래 말을 한 겹 더 깔아보세요. 그런 거지, 지금. 사실 더 고상하고 은유적으로 하는 게 보편적인데.
난 지금은 직설적인 게 좋거든.
“황제 폐하가 절 너무 싫어하실 텐데?”
“아델리안 공자는 몰라도 크루거 가문의 제1 적장자는 좋아하실걸요.”
“저희 가문에서는 골드 하나 없이 몸만 보낼걸요?”
“설마요. 크루거 대공께서 그럴 분이시던가요. 그분이 얼마나 아델리안 공자를 사랑하는지 알 만한 이들은 다 알 텐데요.”
“네. 그럴 분인데요.”
낄낄거렸다. 순간 표정 관리 못하고 살짝 눈이 사나워진 세리아 덕분에.
어디 말을 뱅뱅 돌리고 하하호호 하며 고운 말 오고 가는 척 그 아래로 혀로 비수 들고 찌르려고.
우리, 말에 말을 싸서 넘기지 맙시다. 단도직입적으로, 응?
“영민하신 세리아 황녀님. 잘 아시겠지만 제가 예법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더 많아서. 말에 단칠은 그만두죠. 영 피곤하네.”
“…저야 아델리안 공자를 익히 아는 바 있으니 괜찮지만. 다른 영애에게도 이런 식으로 대하시나요? 공자의 명예에 누가 될까 걱정스러워하는 말입니다만.”
어차피 우리 둘뿐인데.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네.
나는 의자를 뒤로 까닥까닥 흔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세리아는 오늘을 시작으로 나를 야금야금 조이거나 회유하거나 혹은 압도하려 하겠지만 난 다르다. 우리 힐러가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
길고 긴 대화와 만남. 그것에서 비롯되는 견제와 눈치 싸움의 피로도를 내가 견디기엔 너무 대가가 소박해서 말이지.
“약혼할까요? 그런데 그게 정말 황녀님에게 이득일까. 응?”
그래서 그냥 먼저 질렀다. 돌고 돌아 한참 후에나 나왔을 단어.
어차피 아델리안의 가치는 고작 그것뿐인 거지. 강력한 크루거 가문의 힘. 그리고 넘치는 골드. 그것을 세리아에게 가져다줄 징검다리.
내 입에서 먼저 약혼이란 말이 이리도 쉽게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입을 벌리고 멍하게 바라보지.
“그게 무슨…….”
“제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왔을까요?”
일부러 똥물 한번 튀겨보라는 의미로 낸, 내 이미지가 아주 더럽다는 것을 이용한 염문설.
그것을 황녀는 대놓고 받아치거나 부인하는 대신 나를 일단 불렀다.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가 아닌 대놓고.
“저를 이용하시려고요. 황녀님?”
제국에서도 알려진 무능력한 망나니와 거기에 더불어 별 볼 일 없는 트레잇을 가졌을 거라 암암리에 소문이 도는 제1 황녀의 조합.
아주 불붙은 듯 퍼져나갈 소문들.
하지만 원래 좋은 이미지에서 더 좋아지는 것보다 나쁜 이미지를 한 방에 역전 시키는 것이 더욱 강렬하다.
프로파간다.
결국 세리아 황녀는 원작에서 봉인 말고 제법 대단한 트레잇을 발현했고 돌아가는 꼬라지로 보아서는 그 뒤에는 악신교단의 지원이 있었을 테니.
거기에 아무리 내가 대공의 후계라곤 하나 가디아가 있으니 황녀와 약혼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가문의 계승권에서 멀어지는 건 당연한 일.
봉인 트레잇으로 어떻게든 내 오만을 꺾거나 악신교단의 힘으로 말 잘 듣는 인형처럼 만든 뒤 대단하신 세리아 황녀께서 제국 최고의 망나니를 구원했다든가 하는 서사도 심을 만하고.
뭐 세탁 방법은 여러 가지니까. 일단 나라는 패 자체가 쓸모가 많으니 잔뜩 써먹은 뒤 죽여버리면 결혼은 안 해도 그만.
뻔하지 뭐.
어차피 제국의 황족이니. 고작 약혼 따위, 수 번을 하고 물려도 흠집 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나는 대놓고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감추지 않은 채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제가 일이 좀 바쁜데 발목이 잡혀서 말입니다.”
한 템포 쉬고.
“그러니 빠르게 정리합시다. 우리 문제.”
여기서 세리아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일 기회를 잡았다.
내가 한번 세리아 황녀 멘탈 흔들어 놓고 갈 테니.
믿는다, 샤하드.
“저거저거. 지금 뭐 하냐.”
“글쎄.”
아델리안과 세리아가 있는 정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
호위로 따라온 레이첼이 남들은 듣지 못할 정도로 중얼거리는 말에 케인이 마나 장막을 치며 대답했다.
“약혼이라 안 했냐?”
“했다.”
레이첼은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결론을 도출했다.
약혼?
사실 인간들의 기본적인 풍습에 대해 잘 모르는 경향이 있으나, 약혼이 그리 쉽게 나올 말인가? 다름 아닌 저 아델리안이?
머리가 옆으로 갸우뚱 넘어가는 것에 긴 포니테일이 흔들린다.
저 세리아 황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날 감금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하고?
“그럴 리가 없는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델리안이 그럴 리가.
비록 드래곤의 아주 좋은 귀에는 저 멀리 시녀들끼리 아델리안이란 망나니는 치마만 두르면 다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다며 속닥거리는 것까지 다 들리고 있었지만!
…혹시?
“아, 진짜면 좋겠다.”
레이첼이 실실 웃으며 하는 말에 케인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무엇이.”
“저 아델리안이 약혼해 봐. 얼마나 웃기겠어. 놀려 먹을 거 장난 아닐 텐데.”
어이, 미래의 유부남? 하며 지나가는 토끼만 봐도 바람피우는 거냐면서 괴롭히면 얼마나 질색할까?
낄낄낄 하고 웃는 레이첼의 모습에 케인은 아델리안이 종종 읊던 단어 하나를 떠올렸다.
뇌없첼.
하지만 지금 레이첼의 생각을 정정해 주는 것보다 나중에 아델리안이 어이없어하는 걸 보는 게 더 즐거울 것이 뻔하므로 입을 다물고 있던 찰나.
“이익! 아델리안!”
“세상에, 벌써 이름으로만 부르는 사이가 된 겁니까, 우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괴성을 지르는 세리아 1황녀와 그 모습을 보며 히죽히죽거리는 아델리안의 모습에 아까까지는 신나 하던 레이첼의 어깨가 스르륵 내려갔다.
“뭐야…….”
쟤도 그냥 우리 과네, 우리 과.
약간 뾰로통한 얼굴로 레이첼이 비딱하게 서서 팔짱을 끼고 투덜거렸다.
“아델리안 좀 놀려 먹으려고 했는데.”
“불가능하진 않지.”
레이첼이 순간 목이 부러질 듯 케인 쪽을 바라보다 이내 함박웃음을 지으며 슬그머니 케인의 어깨에 팔 올려 어깨동무를 했다.
아델리안이 봤다면 아주 좋아했을 장면이나 아쉽게도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어떻게?”
“곧 나오겠군.”
아리송한 케인의 말에 레이첼의 머리가 다시 사선으로 기울어지려는 순간.
“이런 모욕을 제게 주어도 되겠어요?”
“아, 구질구질하게 왜 이러세요, 황녀님. 그럼 이제 파혼합시다.”
반나절 만에 약혼과 파혼을 해버리는 아델리안의 말에 레이첼이 컥컥거리며 웃었다.
“아, 제로 대신 내가 와서 다행이다. 그런데 저렇게 될 줄 넌 어찌 알았어?”
레이첼의 말에 케인이 황금색 눈동자로 뒷목 잡고 넘어가려는 세리아를 뒤로한 채, 옷을 탁 털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아델리안을 응시했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