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164)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164화(164/373)
언제부터였던가.
선대의 선대부터.
기억이 아닌 기록으로 이어진 염원.
가장 강대한 제국의 단 셋만 존재한다는 대공가라는 것은 겉만 번지르르한 허울일 뿐.
강대한 해상 전력뿐 아니라 본신의 힘마저도 바다 위에서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무력을 지닌 남부 제독.
백작급, 후작급 몬스터가 즐비한 데다 종종 공작급 몬스터까지 수십 년에 한 번 내려온다는 설산과 서리 절벽을 지키는 북부 대공은 황실의 가디언인 가낙스를 제외하면 인간 중 최고라고 불리지 않는가.
셋 있는 대공가 중 둘은 바다의 수호신이요, 북부의 방패라고 불리우나 크루거 가문 만큼은 이득을 남기기 위해 남의 고혈을 빠는 거머리요, 황금만을 밝히는 존재로 불릴 뿐.
결국 그것에 참지 못하고 대륙을 상대로 힘을 과시해 봐야 한때뿐일 것이다.
아마 남부 제독과 북부 대공, 그 둘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륙을 병들게 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리게 할 수 있는 것이 금력을 쥔 크루거 가문의 힘.
하나 경제를 망치고 수많은 이들을 나락으로 몰지언정 강력한 초인 한 명만 들이닥치면 결국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수의 약자에게는 강하나 절대적 강자를 막을 수 있는 동등한 존재가 크루거 가문에는 없었으므로.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는 본인이 가진 강대한 힘만이 모든 것이지.’
세 대공가가 서로 눈치를 보는 것도 황실에는 가낙스가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황제의 그림자, 황제의 방패.
그가 만약 수호가 아닌 정복을 염원으로 삼았다면 제국은 제국이 아닌 대륙 그 자체로 불리었을 터.
그래서였다. 선대의 선대부터 준비했던 계획. 골드를 모으고 크레딧을 운용하여 전반적인 물류 흐름과 경제를 장악한 뒤, 그 거미줄처럼 넓게 퍼진 상로를 바탕으로 얻어낸 금력과 정보로 찾으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황실의 눈과 귀를 피하기 위해 극도의 신중함으로 많은 돈과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부어 대를 넘어 찾아내는 그 집착으로.
소문에 떠도는 눈 감은 성녀상같이 강제로 부여되는 인과의 대가 없이도 트레잇을 넘어설 힘을 줄 무언가를.
‘그리고 결국 알아냈지. 강력한 속성과 마나의 집약체. 그것이 있는 곳과 흡수할 방법을.’
아마 황실에 정보가 흘러 들어가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면 고작 몇 년 만에 알았을 거였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알아낸 것이 어디인가. 우여곡절 끝에 손에 넣은 불의 정수.
그것은 맥동하는 아름다움이었다.
평범한 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눈이 타들어 가는 불꽃의 현신.
타오르는 별빛, 온갖 붉음이 엉킨 보석.
그리고 살아 있는 무언가가 웅크린 것으로도 보이는 그것.
강대한 마나와 화염의 응집체. 말 그대로 불꽃의 정수이자.
‘살아 있는 심장.’
미궁 도시 라비린의 대미궁과도 같이 수많은 함정과 몬스터, 역겨운 것이 가득한 던전 가장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그것을 건져 올려 손에 넣은 순간 카이만은 생각했다.
드디어 대륙을 쥐고 흔드는 손에 자신의 손을 얹을 수 있는 기회라고.
‘그렇지만 생각보다 너무 강하군.’
다만 조금의 착오가 있었다면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가늠한 것보다도 불의 정수가 가진 힘이 너무나 강대하다는 것.
그야말로 독이 든 성배를 마신 것과 진배없었다.
이것을 소화해 낸다면 무궁한 영광이 비출 것이나 실패한다면 이 세상에 카이만이란 존재를 단 한 줌도 남기지 않고 불사르겠지.
그것에서 시작된 겁화는 제어할 이가 없다면 이곳에 둘러싸인 마법 결계마저 불사르고 대륙으로 기어나갈 것이다.
그것에서 비롯되는 재앙이나 누군가의 고통보다도 카이만은 선대의 선대부터 이어진 염원을 자신이 망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 가문의 일도 아끼는 딸아이마저도 밖에 두고 이곳에서 불의 정수를 길들이고 있었건만.
“하.”
숨을 한 번 탁하게 뱉을 때마다 붉은 마나가 허공을 불태웠다.
“그건 어떻게 되었지.”
“그림자들이 밤낮으로 추격 중입니다.”
손을 대면 눈가루라도 묻을 것 같은 백금발과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보기에는 서늘하기 그지없는 사내.
카이만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주위로 붉은 화염의 마나가 빛무리처럼 떠다녔다.
저 모래 알갱이같이 작은 것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속성력이 압축된 마나임을 처음 보는 사람은 과연 가늠할 수 있겠는가.
저 작디작은 한 알이 사람의 몸에 닿는 순간 물로는 끌 수 없는 마나의 불이 붙을 터.
그 정도로 강력한 불의 속성을 지닌 정수를 삼킨 카이만의 몸은 지금 언제 터질지 모르는 마나 폭탄 그 자체였다.
아예 중화하여 온전하게 흡수하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카이만은 인지한 순간 반대되는 속성을 흡수해 자신의 몸 안에서 팽팽하게 줄다리기라도 하며 안정시키려고 했었던 것.
그렇지만 폭풍우의 구슬을 성신교가 탈취한 순간 카이만은 하루하루 들끓는 불의 마나를 억누르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에 그 분노가 하늘을 찌르듯 했다.
“아직 그들이 원하는 곳까지 빼돌리진 못했나 보군.”
“예. 그들도 뭔가 목적이 있어 저희에게서 탈취하였을 테니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자 밤낮없이 추격해 누구와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카이만이 손끝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두들겼다. 그의 들끓는 마나를 버틸 수 있게 화 속성으로 인첸트된 금속의 의자가 벌겋게 달아올라 손끝으로 두들길 때마다 불똥이 튀어 올랐다.
“당장 내 손에 쥐지 못하면 남도 그래야 하는 법.”
“그들은 지금 수가 줄어 8명이고 저희는 시간마다 교대하며 추적 중이니 언젠간 잡힐 것입니다.”
수하의 말에 카이만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뒤쫓고 뒤쫓아라. 그들이 지쳐 피를 토하고 쓰러질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넘기지 못하고 폭풍우의 구슬을 부둥켜안고 죽으면 그 손에서 끄집어낼 수 있도록.
카이만의 명령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 * *
“아, 왜 이리 늦게 와.”
“네가 먼저 튀어 나간 거잖아.”
자갈 해변에 발을 디디니 레이첼이 투덜대며 다가온다. 어디서 구했는지 어린아이 주먹만 한 돌사과를 한입 베어 물면서.
“에 퉤. 쓰다, 써.”
몇 번 씹더니 레이첼의 입으로도 도저히 먹을 게 아닌지 고개를 돌려 퉤 뱉고는 내 쪽으로 손을 내민다.
나는 그 당당한 손을 보다가 말없이 아공간을 열어 레이첼에게는 사과를 쥐여주는 김에 케인과 루나, 리프에게도 하나씩 돌리고는 나도 한입 와삭 베어 물며 섬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섬에 오르니 조금 느껴지는 것두 같아요.”
―의식하지 않았다면 모를 정도의 흐름입니다.
뭐, 나야 느껴지는 건 없긴 하지만. 내 파티는 달라야지.
내가 느리게 웃으며 조각배를 타고 건너온 안내인을 흘긋 보자 케인이 입을 열었다.
“저쪽인가.”
“예, 예. 맞습니다. 저쪽으로 가면 숨겨진 길이 있고 더 가면 절벽이 나옵니다.”
“안내는 더 필요 없을 것 같군.”
“누가 먼저 찾는지 내기할래?”
케인이 알겠다는 듯 말한 뒤 성큼 걷는다. 레이첼도 통통 튀는 걸음으로 냉큼 쫓았다.
하긴 뭐 좋은 곳이라고.
내가 기다리며 쉬라는 듯 손짓한 뒤 루나와 리프와 함께 케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길이 좀 험하네.”
“절벽 쪽으루 가는 길이라 그런가 봐요.”
―손잡아 드리겠습니다. 관리자님.
나는 내 쪽으로 내밀어지는 리프의 손을 슬쩍 밀었다.
물론 리프가 골렘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람보다 강하고 쉽게 지치지도 않으며 관리자로 지정된 나를 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아직 두 다리 튼튼하거든.’
진짜 이번에 우리 힐러 픽업만 하면 이동 관련 아티팩트를 얻어야지, 정말.
몇 번을 생각했지만 늘 미묘하게 먼저 필요하다 싶은 사람이나 장소나 일이 생겨서 말이지.
하지만 점차 파티원들이 강해지니 내가 걸음이라도 나란히 하려면 더는 미룰 수가 없다.
내가 다짐의 다짐을 하며 숨 가쁘게 절벽으로 올라가는 샛길을 걷는데 어느 순간 시야가 환해졌다.
좁은 길과 앞을 가로막는 나무들이 순간 사라지며 나오는 탁 트인 공간.
가장 높은 절벽 위에 오르니 넘실대는 바다와 빛을 뿌리는 물비늘. 이제 완전히 떠 찬란한 태양 아래 눈부셨다.
“이 좋은 풍경, 지금 기억해 둬.”
10분 안에 박살 날 테니까.
내가 실실 웃으며 하는 농담에 다들 진지하게 바다를 한번 본 뒤 안내인이 만들어 놓고 간 것 같은 말뚝과 더불어 그것과 이어진 밧줄을 흘긋 바라본다.
원래는 저 밧줄을 잡고 절벽을 내려가며 중간에 위치한 틈새 동굴로 들어가려는 거였겠지만.
“케인.”
나는 당당하게 케인에몽을 불렀고 케인은 고개를 한 번 내저은 뒤 나를 짐짝처럼 들었다.
“도련님, 제가 더 안전하게 모실 수 있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난 아님.”
미안하다. 내가 몸은 갓 성인이나 마음은 젊은 꼰대라서 차마 나보다 작은 애들에게 곱게 안겨 내려가는 건 좀 그렇잖냐.
물론 레이첼은 예외. 레이첼은 그냥 날 내팽개칠 것 같은 그런 나쁜 믿음이 있어서 그렇다.
잠깐 현실을 바로 보지 않고 딴생각을 하고 나니 어느새 발에 단단한 바닥이 닿는다. 좁은 동굴의 틈새 입구.
그 바로 앞에 서있는 데도 저 안쪽부터 습한 바람과 함께 밀려 나오는 악취가 내 코까지 닿았다.
“흐음. 손수건이라도 하나씩 줄까?”
“아 심한데? 피비린내는 익숙하지만 썩은 피비린내는 별로 안 익숙하다고.”
―길은 앞으로 곧게 이어져 있으나 빛은 입구에서 들어오는 게 끝으로 보입니다.
“손수건보단 다른 방법이 좋겠어요, 도련님.”
루나가 케인을 흘긋 보자 케인이 한발 먼저 걸으며 몸 주위로 마나 장막을 친 모양.
갑자기 확 사라진 악취에 내가 코와 입을 가렸던 손을 내리는데 옆에서 루나가 ‘이걸 바로 하네…’ 하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제법 마나의 운용을 세밀하게 해야 하나 본데.
역시 만능 케인.
온 대륙에 1가구 1케인을 보급… 하면 곤란하지.
‘저 성격에 개판 나지.’
잠시 섬뜩한 생각을 하던 것도 잠시. 나는 아공간을 열어 오랜만에 코덱스를 꺼냈다.
“빛이여.”
케인보다 조금 앞에 띄우니 제법 밝다. 늘어지는 케인의 그림자가 동굴의 벽을 가로지르듯 늘어난다.
“벌레.”
“벌써부터 이렇게 날아다녀?”
루나가 내 옷을 몇 번 쳐주고 리프가 손을 내젓는다.
레이첼이 주먹을 빠르게 움직이더니 무언가 바닥에 톡톡 떨어졌다.
나는 아이기스를 꺼내 설정을 조금 건드려 주위에 아주 약한 전기의 마나를 살짝 방사하는 형식으로 세팅한 뒤 허공에 띄웠고 중간중간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안에 뭐가 있는지 뻔히 아는 나로서는 저 날벌레가 닿는 게 좀 역겨웠으므로.
주위를 훑어보니 처음에는 자연적으로 절벽이 갈라지며 생긴 틈새 동굴이었으나 후에 공간을 넓힌 듯 무언가로 긁거나 쪼갠 흔적과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부분이 여기저기 혼재해 있었다.
그 덕인지 처음 입구보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통로가 넓어지더니 나중엔.
“…너무해요.”
―대체 어떤 악의를 가져야 하는 겁니까.
“미친놈들이네.”
그리고 옆에서 이를 꽉 문 듯 아주 낮게 이가 으득 하고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적당한 크기의 창고 정도는 되어 보이는 공동의 벽에는 피로 그린 악신교단의 심벌이 있었고, 그 아래는 이제는 썩어들어 가기 시작한 무언가들이 널려 있었다.
잘리거나 혹은 아슬하게 달려 있는 머리가 아니었다면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 모습.
몸을 가르고 부수고 짓이기고 찢고 태우고 물에 불리고.
대충 보아도 이 정도니 또 무언가를 더 했을까.
아무도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했냐며 의문을 갖지도 않았다.
이곳은 그런 세계니까.
저런 행위가 단순한 충동이나 뇌 내 망상을 충족시켜주는 행위가 아닌, 확실하게 무언가로. 그게 어떤 식으로든 대가로 돌아오는 곳이기에.
그리고 전 대륙에서 저런 것들을 지금도 하고 있을 악신교단은 얼마나 많은 대가를 그들의 신에게 바쳤을까.
“기억해. 이곳의 마나를.”
우리건 혹은 교단이건. 앞으로 어느 한쪽이 전부 사라질 순간까지 만날 이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