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170)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170화(170/373)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얼마나 진정성 있는지. 그것은 별다른 트레잇이 없다 하더라도 알게 되는 순간이 존재한다.
사실 그렇지. 옆에서 귀에 달게 들리는 말만 하면 그것밖에 안 들리는 것이다.
아직 아카데미에 다니는 어린 학생이라면 더더욱. 나이가 많아 봐야 고작 20대 초반.
열 살도 되기 전부터 아카데미에 들어와 방학 때나 가문으로 돌아가고 종종 있는 사교계 티 타임이나 연회로 만나는 이들도 대부분 자신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또래의 귀족들.
아무리 똑똑하고 대단한 트레잇을 지닌 이들이라 해도 소위 말하는 사회 경험 자체는 적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전부 자신이 귀족이라 쓴소리하는 이라곤 고작해야 아카데미의 교사 정도.
그러니 사람을 대하는 것도 고압적이고 오만한 귀족이 많았으며 전부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대하니 역설적으로 정말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말을 할 사람이 없었다.
서로의 득실만을 따져가며 가문을 줄 세워 만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하다못해 가장 가깝게 지내는 이래 봐야 자신의 시종들이니 힘들고 외롭다는 말을 어찌 할 수 있으랴.
그래서 베르뷔트를 추종하는 무리가 많았다.
그녀는 이런 귀족 세계에서 갑자기 뚝 떨어져 나온 것 같은 존재였으므로.
같은 귀족이니 조금 힘든 소리를 해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으며 듣고 다른 곳에 퍼트리지 않을 거란 확신을 주는 언행과 성품.
더불어 언제나 잘될 거라 속삭여주는 그 다정함.
베르뷔트는 발랄하고 사랑스러웠으며 다정하고 달콤했다.
누구나 모두가 좋아하던 아이 베르뷔트.
모두가 좋아하던.
“지금은 좀 다르지.”
“원래도 인기가 있는 만큼 이유 없이 싫어하던 사람도 있었지만.”
“이제는 싫어한다기보단.”
“그냥 관심이… 없다?”
그 다정함이. 그 달콤함이.
얼마나 얕고 얄팍한지 알았으니까.
어쩜, 그럴 수가. 정말요? 괜찮아요. 다 잘될 거야. 우리 둘만의 비밀이에요. 나에게만 말해 봐요. 나도 당신과 같아요. 우린 정말 잘 통하나 봐. 당신에게만 말하는 거야. 난 언제나 당신의 편이니까.
베르뷔트, 베르뷔트. 너만이 우릴 이해해 주고 아껴줄 거라 생각했어. 가끔은 내 가족보다도 네가 더 우리를 위한다고 생각했어.
가끔은 바쁘다며 우리와의 약속은 취소해 놓고 다른 사람과 속삭이고 있어도.
우리가 준 선물은 들고 다니지 않아도, 다른 이가 선물해 준 보석은 끼고 있어도.
그리고 절대로 잊지 말자던 이야기를 꺼내도 아주 잠시 그냥 웃기만 하다가 곧이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도.
넌 다정하고 달콤하고 상냥한 아이니까.
그 모든 게 진심이 아닐 거란 의심 따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베르뷔트만이 속마음을 받아줄 때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었다.
바이올렛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긴 연보라색 머리칼을 느슨하게 땋아 한쪽 어깨로 내리고 몸에서는 라벤더 향기가 나는, 살짝 처진 눈썹과 눈 아래 눈물점이 순해 보이는 여인.
가득 안기면 옷에서 나는 햇볕의 냄새와 특유의 라벤더 향 덕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처음엔 다들 그랬지. 어딜 하찮은 평민 따위에게 마음을 열겠냐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인적이 드문 정원의 한구석. 빈 교실의 한편. 늦은 밤 기숙사의 뒤쪽. 아무도 보여주기 싫어 혼자 울던 그곳에서 바이올렛을 만났다.
내가 자존심이 상하고 자존감이 꺾이고 남보다 성적이 못하고 인기가 못하고 나 자신도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알면서도 채우지 못하는 것 또한 잘 알아 오갈 곳 없는 짜증과 분노.
그것에 매몰되어 있을 때 바이올렛을 만났다.
분풀이로 뺨을 때린 사람도 있었고 무시한 사람도 있었으며 그 가디아의 시종이라니 하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고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한 사람도 있었지.
“꺼져. 천한 것.”
“눈물만 닦아 드리구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제가 만든 쿠키 드셔보시겠어요?”
“그냥 지나가지 그래?”
“어떻게 그래요. 아가씨께서 이런 얼굴을 하고 계신데.”
“그때 말한 걸… 아직도 기억해 주는 거야?”
“제가 잊을 리가 없잖아요. 자, 받으세요. 이거 드리려고 잠시 시간 내서 온 거예요.”
바이올렛이 오기 전까지는 베르뷔트의 말이 전부 진짜라고 생각했었다.
베르뷔트가 기분이 나쁜 날엔 눈치를 보고 한번 말을 하고 싶으면 수도의 가장 유명한 가게에서 파는 쿠키라도 하나 사 가야 하는 것도.
실컷 속상한 이야기를 하고 나면 한두 가지 정도는 다른 사람의 비밀 이야기를 하거나 무언가 재미있거나 유용한 말을 해 베르뷔트가 만족해야만 다음 약속이 더 빨리 잡히는 것도.
사실 어렵게 꺼낸 고민이었지만 누군가 보기에 자질구레한 고민이라면 그건 이제 괜찮지 않아요? 하고 넘어가는 것도.
전부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바이올렛은 달랐으니까. 시종 일을 하면서도 아카데미 곳곳을 돌아다니며 주방을 돕고 정원 일을 돕고 마굿간 청소를 도우면서 그렇게 바빠도 보고 싶다는 말에.
바이올렛이, 네가 필요하단 말에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도 몰래 나와 기숙사 옥상에서 도란도란 쿠키를 나눠 먹기도 하고.
손수 만든 것이라며 머리 색이나 눈에 맞춘 리본이나 손수건을 주기도 했지.
힘들면 기대라며 감히 귀족의 머리를 쓰다듬어도 화조차 나지 않아.
네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며 무언가 정보를 주려 해도 그런 걸 바라고 곁에 있는 게 아니라며 오히려 화를 낸 것이 우리가 본 바이올렛의 유일한 투정이었다.
친구가 필요한 이에겐 친구를. 언니나 누나가 필요한 이에겐 가족이 되어 주었다. 남들은 알아채지 못하게 웃고 있어도 바이올렛만큼은 속으로 누가 울고 있는지 알아줬으니까.
‘어쩔 수 없지. 모두의 바이올렛이니까.’
베르뷔트를 내가 더 독점하기 위해 선물을 하고 잘 보이려 암중에서 기 싸움을 하던 예전과는 달리.
바이올렛은 모두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전부 위해 주는 걸 알아서 오히려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우리끼리 뭉치기도 하였지.
아카데미의 모든 이들이 바이올렛을 사랑하진 않았어도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은 바이올렛을 사랑했을 거야.
그런데.
그런 바이올렛이 죽어버렸다.
* * *
[케인 레이너스―이끄는 자]대표 Traits : [불망(SS)] [완벽(B+)]
히든 Traits : [갈망(S)] [기적(A)]
‘저게 사람인가.’
사실 케인은 사용자의 눈을 사용하면서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저번에 봤던 것 중에 달라지는 게 있다면 이끄는 자에서 다른 것으로 변경되지 않을까 하는 정도?
‘그런데 무슨, 완벽에 승급이 달려.’
케인의 트레잇은 사실상 완성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케인이 가진 저 완벽이란 트레잇이란 그런 거였다.
여기서 더욱 강해져 원작 결말 정도에 나오는, 살아 있는 신을 때려잡는 정도의 스펙업을 한다고 해도 저 완벽 외의 다른 트레잇은 달리지 않을 게 확실한 정도.
완벽이라는 게 애초에 무얼 말하는가.
단순하게 사전적인 말로만 생각하자면 흠이 없는 구슬이라는 뜻으로 결함이 없다 정도로 볼 수 있겠지만 이곳은 트레잇이 존재하는 세계고 트레잇에 완벽이 달린 것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보통 사람에게 어떨 때 완벽하다는 말을 쓸까.
잘생기고, 못하는 게 없으며 성격 또한 좋을 때 아니겠는가.
물론 케인은 성격에 결함이 있고 그 덕에 B밖에 안 되겠지. 냉정한 판단이야 이거.
결국 뭉뚱그려 사람이 가진 모든 긍정적인 재능, 즉 트레잇의 종합이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완벽이란 트레잇은.
그런데 그게 승급을 달았다?
전보다 더 강해진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정신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발전이 있었단 소리.
‘결론은 주인공이 주인공 했다.’
[아델리안 수호 크루거―비트는 자]대표 Traits : [금력(SSS)] [오만(S+)]
히든 Traits : [부유감(B-)] [사용자의 눈(SSS)]
‘상대적 박탈감 장난 아니네, 진짜.’
그나마 내가 조심한다고 한 게 효과가 있었던 듯 부유감이 더 떨어지진 않았다.
황도에서 세리아 등을 만나며 목에 힘 좀 줬더니 오만이 그새 또 승급이 달린 것을 제외하면 변동이 없는 모습.
누구는 탈인간급 트레잇을 달고도 승급을 다는데 누구는 오만 하나에 달랑, 다른 트레잇의 생성은 이제 기대도 안 한다.
나는 사용자의 눈을 끄며 소파에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엘리스와 더불어 괜찮은 트레잇을 가진 이들이 있는지 훑어보고 싶긴 한데.’
이게 쉽게 확인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
내가 가진 트레잇 중 금력이야 초반에 카이만이 무언가에 큰 투자를 하거나 가문의 상단이 큰돈을 벌어 돌아온다거나 할 때마다 변동이 있었고, 오만도 내가 조심하면 조금 내릴 기미를 보이다 여러모로 써먹으면 올랐다가 했었지.
그리고 레이첼이 준 사용자의 눈 같은 경우는 고정된 등급인지 단 한 번도 변화된 모습을 보인 적 없었는데.
‘왜 부유감만?’
부유감만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꾸준하게 하강하고 있다.
금력과 오만은 원래의 아델리안, 즉 내 특전 캐릭터의 특성이라 가변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는 하나.
사용자의 눈과 부유감은 아델리안 본연의 트레잇도 아니요, 강수호를 반영한 트레잇도 아니다.
이건 무조건 레이첼이 부여한 트레잇인데. 왜 사용자의 눈은 아무리 써도 고정인데 부유감은 다른 건가.
‘거기에 사용자의 눈을 쓰는 대가로 내려가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긴 하지만 다른 변수는 없는 걸까.’
부유감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란 소리.
원작에도 이노센트 사가에서도 나온 적 없던 특성이기에 그 뜻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여러모로 독이자 약이거든, 이거.’
지금도 조금 깊게 파고들어 생각하려니 미묘하게 집중력이 흩어진다.
그나마 집중력이 흩어지지 않는 것은 원작을 떠올리려 애쓸 때 정도.
강수호 때의 일상을 떠올리려 한다거나 반대로 이곳에서의 삶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때마다 문득문득 ‘뭐, 상관없나?’라는 느낌으로 발을 빼게 만드는 감각.
마치 결국은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조금은 현실과는 동떨어진데다 결국 나 혼자 홀로 놓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유는 무조건 부유감 때문이고 이건 평소에는 사실 독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이걸 확 다 까버리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고 말이지.
일종의 정신 방벽 같은 효과가 나에겐 있는데 부유감이 사라진 순간 내가 이 세계의 종말에 관여되었다는 그 부담감과 사실상 죽으면 끝난다는 공포를 버틸 수 있을까.
처음 부유감이 높았을 때. 막 이곳에 왔을 때는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는 그 판단과 더불어 완전히 비현실적으로 느낀데다 심적인 거리감이 루나와 케인이 눈앞에 있었음에도 모니터 너머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부유감이 높은 등급으로 계속 지속되었다면 정말 하나의 캐릭터마냥, 루나와 케인, 제로와 리프, 그리고 레이첼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보다는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정말 내가 읽었던 소설과 내가 플레이했던 캐릭터처럼 아직도 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부유감이 내려간 지금은 정이 들어서와는 별개로 훨씬 더 소중한 존재들이지만.
여기서 더 내려간다면 지금도 저 녀석들이 이렇게 소중한데 어떻게 되는 거지?
잠시 의문을 품었던 찰나 밖이 소란스럽다.
“캬하하! 아, 이거 너무 재미있어!”
창을 내다보니 물의 정령과 계약한 해적을 꼬셔 물의 정령을 잡고 수상 스키처럼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는 레이첼이 눈에 들어온다.
진짜 레이첼, 무슨 생각으로 내 트레잇을 이렇게 짜준 거냐, 정말.
멱살 잡고 물어보고 싶다. 가능만 하다면.
‘솔직히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뇌없첼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단 말이지.’
분명 드래곤 로드, 레드 드래곤 레이첼은 단순하고 무식하며 폭력만을 즐기는 그런 성품은 아닐 테니까, 다 이유가 있어서 부유감이란 트레잇을 나에게 붙인 거겠지만.
유희 중인 무투가 레이첼만 생각한다면 어쩐지 모를 불안감이…….
내가 어쩐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다시 창문으로 시선을 돌린 그 순간.
“어?”
“레이첼!”
내 눈에는 허공으로 붕 날아갔다가 바다로 처박히는 레이첼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