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173)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173화(173/373)
비가 내린 뒤의 습한 날.
달이 손톱 끝처럼 좁아진 밤.
천년은 화려하게 빛이 날 것이라 일컫는 제국의 수도에서마저도 가장 어두운 곳.
젖은 숲 사이에 위치한 작은 공터에는 눅눅한 나무를 쪼개 만든 통나무 의자와 작은 모닥불 하나만 물이 잔뜩 든 주전자를 짊어진 채 짙은 어둠을 사르고 있었다.
외곽의 외곽. 그 어스름을 파먹는 자리에 누군가 걸어왔다.
“늦진 않았겠지.”
“딱 맞춰왔군.”
“아니. 옛날 생각 하자고 부른 거야, 뭐야? 이런 변두리.”
검은 로브 덕에 얼굴도 종족도 드러나지 않았으나 여섯 명의 남녀가 작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통나무에 둘러앉았다.
코끝으로 매캐한 탄내와 더불어 비온 뒤 습한 숲 냄새와 쪼개진 나무 특유의 우드향이 향긋하게 허공에 맴돌고 있었다.
“이 중에서 서로 아는 이도 있고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도 있겠으나, 오늘 모인 이유는 다들 알고 있겠지.”
“이거 처음부터 꽤 기분 나쁘게 시작하는군.”
“어느 누가 짐작하겠어. 여기 모인 여섯이 원래 제국의 밤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걸.”
“말은 바로 해야지. 지배하고 있던 게 아니라 지배하려 했다지.”
저마다 한마디씩 던진 뒤 피식피식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귀족들과 손을 잡고, 혹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제국의 뒷골목을 지배하던 이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진 나라라 하더라도 모든 곳에 빛을 내리지는 못하는 법.
오히려 강한 빛은 더 큰 그림자를 만드는 것처럼 테이트리아라는 거대한 나라는 그만큼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도 짙었다.
노예 매매는 이제 말할 것도 없거니와 향락을 위한 마약과 더 큰 자극을 위한 불법 투기장. 위험한 몬스터는 몇몇 귀족들에게는 우아한 취미로 여겨져 처음엔 박제로 시작했던 몬스터 시장이 이제는 중형 몬스터 사육까지 커지지 않았나.
그 더러운 짓거리를 누가 대놓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은밀하게 할 손이 필요했고 그것들은 전부 이들이 도맡아 하며 하루하루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개중 어느 이는 어지간한 자작의 사병보다도 조직원이 많고 오러 유저도 많았을 정도.
하지만 그것도 얼마 전까지의 일.
“아직도 누군지 모르는 거지?”
“가장 큰 세력의 수뇌부가 하루아침에 전부 목이 잘린 후 처음엔 다들 서로 의심했겠지만 이제는 다들 알겠지.”
새로운 집단이 생겼다는 것을.
가장 큰 세력의 중심인물들이 하루아침에 쓸려나가 갑자기 수도의 뒷골목은 무법천지로 변했다.
자기들이 그 찌꺼기를 주워 먹고 가장 큰 조직이 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죽이고 암살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그때만을 노리고 숨죽이고 있던 세력 하나가 급속도로 모든 세력의 팔다리를 움켜잡아 뜯어먹으며 커졌으니.
“라피스라고 했나? 그 세력.”
“라줄리라는 사내놈이 보스라는 것 외에 제대로 알려진 게 없다.”
청금색의 머리칼과 눈동자. 몸에는 은은한 우드향이 풍긴다고 하던가.
고작해야 20대의 외견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가늠하는 소문조차 돌지 않는 사내.
귀족의 자금을 지원받는 조직보다도 부유한 금력과 더불어 개개인의 강함을 최우선으로 꼽는 조직보다도 확실한 강자가 있는 신흥 조직.
라피스가 어느 순간 테이트리아의 뒷골목을 거의 다 삼켜 버렸다. 더불어 원래 그들이 가진 마약 농장이나 노예상과의 거래 루트까지 어떻게 알았는지 전부 힘으로 차지하더니.
“그 녀석들, 도대체 대가로 뭘 받기로 한 건지 회유가 안 먹히더군.”
“세뇌나 협박도 아닌 거 같았어. 그 눈을 보면 알지.”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에 누군가 장작을 하나 더 던져 넣더니 허공에 불티가 잔뜩 번졌다.
“비가 내린 후라 날이 차군. 한 잔씩들 해.”
모닥불에 장작을 넣은 이가 그 위에서 끓고 있던 주전자를 나무 걸이에서 뺀 뒤 안에 허브를 몇 줌 넣어 나무컵에 한 잔씩 돌리기 시작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밤이 지날수록 싸늘해진 감각에 전부 더운 차를 한 모금씩 삼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우리 꼴을 봐. 수십, 수백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며 테이트리아 전역에 손을 뻗고자 했던 것이 반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몰락 직전이라고.”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었다. 아무리 라피스가 짐작되지 않는 금력과 무력으로 파고들었다지만 이중에서는 백 년도 넘게 테이트리아의 뒷골목을 지배하던 무리들.
그 저력이 단숨에 뽑혀 나갈 리는 없는 일.
하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 모든 기반이 라피스에게 먹힐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그러니 모인 것 아니겠나. 이대로 근본도 모르는 조직의 밑에 고개를 숙이게 되느니.”
모두 남은 힘을 합쳐 라피스를 치는 것이 맞지.
어차피 라피스에게 세력이 흡수되어도 보스였던 자신들은 죽은 목숨인데 무엇 하러 그 몸집을 부풀리는 것에 힘을 보탤까.
서로 공멸하는 것이 꼴 보기 좋을 것이다.
“가장 손쉬운 것은 라줄리의 거처를 찾아 치는 것이지만.”
“그 자식, 우리들이 겁나는지 어디엔가 숨어 세이렌으로만 지시를 내린다는 소문이 있더군.”
“어차피 그 녀석도 자신의 손발이 잘려 나가면 나올 수밖에 없지. 난 내가 원래 지니고 있다 빼앗긴 마약초 농장부터 불태우며 시작하겠다.”
“내가 가지고 있던 노예 창고를 그대로 쓰고 있을 거야. 독을 풀어 단번에 죽이면 손실이 꽤 클걸.”
“그리고 우리는 확인된 라피스의 지부를 싹 쓸어버리마. 잔챙이들뿐인 곳들을 확인했다.”
“이쪽은 빈민가를 불태우려고. 귀족의 거처가 아닌 곳이라면 세 시간은 불을 끄기 위해 정령사들이 파견되지 않을 테니 그곳에 있을 비밀 거점들은 다 날릴 수 있겠지.”
저마다 한마디씩 하던 그때, 어떤 사내가 다시 장작 하나를 모닥불에 던져넣어 불티를 날리며 느리게 일어섰다.
“다 좋은데 말이지. 당신들 몇 가지 잘못 아는 게 있어.”
그의 말에 검은 로브를 쓴 네 명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무슨 소리지?”
“뭘 잘못 알고 있단 거야?”
“그러는 너는 뭘 할 거길래 그리 건방진가.”
“누군지 바로 짐작 가지 않는 걸 보면 우리 중에서도 규모가 작은 조직이었을 텐데. 이봐 난 말이지.”
제각각 한마디씩 하던 순간 일어난 사내가 천천히 손을 들어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모닥불로 인해 오렌지색 빛이 맴돌기는 하나 확실한 청금색 머리칼과 청금색 눈.
얼핏 여자로 보일 만큼 아름다운 얼굴의 사내. 더불어 후드를 벗을 때 분 바람과 함께 번지는 옅은 우드향.
비가 온 뒤 숲이라. 생목을 자른 장작이 널린 곳이라 이제야 알아챈 그 고혹적인 향.
순간 그를 알아본 이들이 바로 공격하려 몸을 달싹인 그때. 몸에 마비가 온 듯 움직임이 끊기며 느리게 꾸물대기 시작했다.
“아… 아까 그 차?”
“내가 알던 조합의 독이 아니었는데!”
그 모습에 자리에 일어서 있던 그가 손가락 하나를 들며 느리게 웃었다.
“첫 번째. 라줄리는 사내가 아니야.”
그 사내가. 아니, 라줄리라는 여인이 웃으며 손가락을 하나 더 펼쳤다.
“두 번째. 라피스의 보스는 내가 아니야.”
그리고 하나 더 펼쳐 총 세 개의 손가락을 흔들며 라줄리는 입꼬리를 크게 올렸다.
“세 번째. 너희가 무서워서 숨어 있던 것도 아니지.”
잠입 근무라고 알아? 잠입 근무?
라줄리, 아니 파이얀이 짧은 청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검은 로브들을 차갑게 내려보았다.
“고맙게도 이렇게 모였으니. 전부 죽어줘.”
파이얀이 웃으며 하는 말에 말없이 앉아 있던 마지막 로브의 인영이 일어나려 몸을 굽히지도 않은 채 그대로 퉁기듯 그들에게로 거리를 좁혀 검을 휘둘렀다.
“미친!”
“혼자 죽을 줄 알았나!”
그리고 동시에 가장 강한, 무력을 기반으로 조직을 꾸렸던 사내가 마비를 어떻게든 풀었는지 소름 돋을 만큼 빠른 반사 신경으로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목이 잘리는 순간 로브를 입은 인영의 가슴팍에 꽂아 넣었고 그 모습에 다른 이들이 안도하던 찰나.
가슴에 단검을 꽂은 그대로 움직여 아직 마비가 풀리지 않은 다른 이들의 목을 오러가 덧씌워진 검으로 전부 잘라 넘겼다.
“하여간 보스는 대단해.”
그 모습에 파이얀이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가 로브를 천천히 벗겨내며 그 인영의 가슴팍에 꽂힌 단검을 빼내기 시작했다.
옷만 잘렸을 뿐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소녀.
무표정한 얼굴의 그 소녀를 바라보다 파이얀이 입을 열었다.
“최상급 골렘의 하사라니. 그렇지, 리지?”
‘관리자께서는 언제나 대단하시지.’
배운지 얼마 안 된 수어로 답하는 골렘. 리지가 파이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실 해적들이 좀 험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뭔가 무법의 향기가 느껴지고 말이야.
별수 없다. 보고 자란 것들이 나를 채우는 법인데 아무리 해적이 멋있게 나와도 결론적으로는 도적 아니냐고.
그래서 약간 걱정도 했지. 솔직히 우리 파티원들 중에서 인상이 험악한 이들이 없는 데다 나이도 평균내면 최소 몇천 살이겠지만 겉보기엔 많아 봐야 20대 중반이지.
다들 경지에 오른지라 어지간한 마나 유저들은 일반인으로밖에 스캔 못할 테지.
난 진짜 일반인이지.
‘짜증 나네.’
그래서 솔직히 한 번이나 두 번 정도는 마찰이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웬걸.
“아이고, 공자님들. 부족한 건 없으십니까.”
“저희는 많이 먹었습니다. 그렇죠? 케인 선배님, 아델리안 님?”
“아가씨들. 오늘의 술은 드래곤 브레스입니다!”
“오, 나 그거 잘하는데!”
나는 레이첼의 말에 예? 잘 마신단 말씀이시죠? 하고 어리둥절해하는 해적을 보며 낄낄거리고는 더 필요한 게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생각보다 해양 몬스터가 자주 나오네.”
“그렇다곤 하나 전부 수준 이하더군.”
인어의 영역으로 다가갈수록 점차 느는 해양 몬스터의 습격을 케인과 루나, 제로와 리프, 레이첼 등이 전부 막아내니 다들 눈이 반짝반짝해져서는 접대해 주지 못해 안달이다.
하긴 아무리 해적이라도 인어족이 아닌 이상 수중 전투는 힘들 수밖에 없는 데다 중형 이상의 몬스터는 마나 대포도 써야 하는데 그것에 들어가는 마정석 값만 해도 등골이 휠 지경이었겠지.
그런데 우리 파티 덕에 안전하게 가질 않나. 자잘한 것 신경 쓰기 싫어서 몬스터의 사체 처리는 해적들에게 넘긴 덕에 부수입도 짭짤할 테니.
‘나야 기본적으로 돈도 많은데, 몬스터 한두 마리 넘겨주고 호감 사면 이득이지.’
누군가를 부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굳이 직장이나 일터가 아닌, 하다못해 게임에서 길드라도 들어가 본 사람은 알지.
이득 없이 시키는 일은 처음엔 몰라도 갈수록 반발심밖에 안 나오는 법.
나에게 당장 필요하지 않은 이득까지 아득바득 내가 안으려 드는 것보다 적당히 나눠야 사기도 오르고 뒷말도 적게 나오는 거지.
솔직히 아무리 해적이라도 거금을 받고 인어족 영역에 들어가는 것은 엘리스의 명령이 있다 해도 제법 리스크가 있는 일.
거금을 받는다고는 해도 당장 손에 덥석덥석 쥐여준 건 아니니.
“이번에 받은 씨서펜트 새끼의 이빨을 갈아서 단도를 만들려고!”
“뽑아서 다른 배에 던질 갈고리도 만들면 어때?”
“아, 일단 팔고 남은 것들을 나눌 생각이니까 그렇게 알고.”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큰 고기를 잡아 불에 구워 먹는 풍경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확실히 대단하네.”
어지간한 저택과 맞먹는 배가 고급 승용차처럼 부드럽게 나아간다.
배가 클수록 흔들림이 적어져 편하다고는 하나 조금만 눈을 돌려 바라보면 부는 파도가 심상치 않고 어두운 물속에 숨은 암초도 적지 않다.
그것을 이 큰 배로 마치 유영하듯 흘러간다,
“제로 덕이네.”
“사실 정확하게는 알카이도 님 덕분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뭐 그 양반이 그럴 줄 짐작은 했다.
카이만이나 혹은 가디아나 내가 아닌, 크루거 가문 그 자체에 대한 충심을 가진 사람이니 도플갱어들을 어떤 식으로 건 더 이득을 보는 방향으로 쓰고 싶었겠지.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세력 하나를 잡아먹으라고 할 줄은 몰랐다만.’
딱히 나에게 불이익도 아닌 데다 사실 도플갱어의 정체는 나 외에 카이만이나 가디아가 아는 것도 아니니 이것은 순전히 내 쪽으로 힘을 밀어주는 것과 동시에 가문의 힘을 늘린 것.
어차피 그 충성의 방향만 다를 뿐 내 뒤통수를 치고 가문을 삼킬 양반은 아니니 일단은 모른 체하자고 생각하던 순간에 배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도착했어.”
곱슬거리는 자주색 머리와 보라색 눈동자. 엘리스가 다가와 바다 쪽을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보이는 수십 개의 소용돌이.
“소용돌이 지역이야.”
그리고 저 너머의 작은 섬에 우리 힐러, 레비니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