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207)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207화(207/373)
어디선가 풍겨오는 과일의 단향.
끼익. 끽.
그리고 배가 천천히 흔들리며 내는 비꺽거리는 소리.
아르만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마치 저 멀리 마법등 하나만 켜 둔 것 같은 밤. 그런 밤에 홀로 눈을 뜨고 있는 것만 같았다.
희미하게 어디선가 비치는 푸른빛. 그것은 어둠 속에 스며 은은하게 빛난다.
“윽.”
아르만은 무심코 몸을 일으키다 머리를 감싸 쥐었다. 둔탁한 두통. 마치 어디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 같이 뒤늦게 밀려오는 둔통에 몸을 숙여 머리를 감싸다 이내 깜짝 놀라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바닥을 더듬었다.
“후…….”
기절했는지 어둠 속에 홀로 크게 누워 있던 자신의 부관을 확인한 뒤 아르만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분명… 해룡이었지.’
거대하디거대한 해룡.
인간이란 본디 그런 거대한 것을 보면 본능적으로 몸이 굳어버리는 것일까.
‘아니지. 아니야.’
그렇게 치면 그때 본 그 로브를 뒤집어쓴 엘프가 더하지.
그 엘프와 해룡의 공통점은 거대하다는 게 아닌 강하다. 그것이겠지.
바닥도 천장도 보이지 않는 강함.
그리고 해룡이 입을 쩍 벌려 배를 통째로 집어 삼켰다.
‘그렇다면 이곳은 해룡의 뱃속이란 말인가.’
아르만이 배의 난간에 기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럴 이로 보이진 않았지만.’
혹여 속은 것일까.
아르만이 아델리안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엘프와 이노센트 또한.
동시에 그렇게 해서 그들이 얻는 게 무엇이냐는 계산까지도.
희미한 푸른빛만이 도는 어둠 속에서 아르만이 주먹을 꽉 쥐었다.
부관을 안아 올려 선실 안쪽 침대에 눕힌 후 아르만은 희미한 푸른빛을 등대 삼아 천천히 배 뒤쪽으로 이동했다.
끼익. 끽.
조류라도 흐르는 듯 천천히 흔들리는 배의 비꺽거림. 그리고 그것에 섞여 들리는 물소리와 무언가 긁히는 소리.
‘물에만 떠 있는 것이 아닌 좌초된 상황.’
배의 후미 어느 부분이 땅과 닿아 있다.
아니.
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해룡의 뱃속이니 위벽의 어느 곳이거나 혹은 먼저 잡아먹힌 것들의 무덤일지도.
후미로 걸어가 난간을 잡고 최대한 몸을 앞으로 빼내 어둠 속을 노려본다.
아주, 아주 조금 짙어진 푸른빛과 더불어 코끝을 스치는 단내.
‘식량도 있다. 그리고 기절한 호슈아가 정신이 들기를 기다리는 게 맞다는 것도 잘 알지만.’
아르만이 자신의 부관, 호슈아를 떠올리다가 머리를 매만졌다.
“어쩐지 저것이 나를 부른다는 느낌이 들어.”
아르만은 수호 마법이 인첸트된 아티팩트를 꺼내 호슈아의 몸 위에 올려둔 뒤 배의 난간을 넘었다.
어둠은 너무나도 어둡고 깊어 아무리 배의 후미가 어딘가와 맞닿아 있다 해도 혹여 바닥이 깊을까.
보이지 않는 그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배를 부여잡고 몸을 담근 것도 잠시.
혹시 위액이라면 옷이 상하고 몸이 녹을까 걱정하던 것도 잠깐.
허리까지 오는 수위에 아르만은 그 희미한 푸른빛과 단내를 이정표 삼아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희미하게 풍기는 단내가 점점 짙어진다.
좀 더 안쪽으로 갈수록 푸른빛 또한 그 밝기를 더해 갔다.
그리고 이내 보이는 것은.
“…거대한…….”
꽃?
사람의 키보다도 큰 푸른 꽃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인 남성의 팔보다 굵은 줄기 하나가 위로 솟구치다 완만하게 굽어 아래를 보듯, 종처럼 생긴 푸른 꽃.
그 둥글게 닫힌 꽃송이 안에서 푸른빛이 새어나온다.
그리고 그 뒤쪽에 놓인 마차만 한 둥근 것.
아르만이 천천히 다가갔다. 아주 옅게, 희미하게.
시들어 가는 고동 소리가 들린다.
‘해룡의 알.’
해룡의 섬이란 건 어딘가에 존재하는 지역이 아니었다.
‘이곳, 해룡의 뱃속.’
이 공간이 섬이라 불리었겠지.
아르만이 자신의 손을 알의 껍데기 위에 올렸다.
* * *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까.’
평생을 그리 생각했다. 카이만 가주는, 그래. 아버지는 언제나 아델리안을 특별하게 여긴다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마치 고해하듯 차분하게 적힌 편지.
그것은 강한 화염 내성을 지닌 레드 와이번의 가죽에 새겨져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에 집어넣어도 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불의 힘으로 미세한 흠집은 재생된다는 귀한 가죽.
‘그것을 태워 글을 쓸 정도라면.’
얼마나 강한 불의 마나로 얼마나 정교하게 써내려 간 편지일지.
화염의 향기가 날 만큼 진한 마나가 담긴 편지.
‘나를 위한다는 그 말.’
들어도 이제는 카이만의 거대한 계획을 이룰 말로 쓰기 위해 구슬린다 생각이 드는 그 말.
하지만 가디아 자신이 아는 카이만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머리가 복잡해.’
편지의 내용대로라면 이번 일은 절대로 아델리안에게 밝혀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카이만이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행동과 아델리안에게 가디아 자신의 가치만큼 빚을 져버린 일로 가디아는 카이만의 은밀한 호출을 아델리안에게 알린 것.
‘어쩌면, 아버지는…….’
마지막의 마지막엔 아델리안을 위해 자식마저 이용할지도 모르니까.
가장 최악을 생각하면 그 어떤 일이 생겨도 조금은 괜찮을까.
가디아는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직한 가정을 떠올리며 워프 게이트를 넘었다.
“가디아 아가씨!”
“가디아 님이다.”
“역시 아름답고 강인하셔…….”
“그런 망나니보다 아가씨가 훨씬.”
자기들 딴에는 조심한다 속삭이나 오러로 강화된 신체를 지닌 가디아의 귀에 들리는 이야기들.
예전이라면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당연하다고.
그런 망나니 동생보다 자신이 훨씬 크루거에 어울리는 존재라고 여기며 세상에서 단 하나.
아델리안을 보는 눈만은 망가진 카이만에 대한 원망과 언제나 가문을 부끄럽게 만드는 행동을 일삼는 아델리안을 떠올리며 속이 상했겠지만.
‘…과연 아델리안이 정말 저런 평가를 받을 아이일까.’
분노와 혐오, 불신과 실망으로 어두웠던 눈과 귀가 트이니 아델리안을 둘러싼 많은 부조리가 이제야 보이니.
가디아는 말에 올라타 크루거의 성으로 고삐를 당겼다.
‘이번 일로.’
“이번 일로 모든 걸 정하겠어.”
가디아 자신과 아델리안. 그리고 카이만의 엉킨 일들. 지금까지 사랑받지 못했다 여기며 자라왔던 모든 날과 더불어 편애라 여겼으나 실상은 좀 더 엉망진창인 아델리안까지.
그 모든 해답을 카이만에게 듣기 위해.
가디아가 크루거의 성으로 향했다.
* * *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갈까.
어째서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타인을, 혹은 살아 있는 것도 아닌 무언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을까.
예를 들자면 알카이도같이.
‘NPC일 때야 아, 그런 설정이구나 했지만.’
나는 차를 홀짝거리며 내 앞에 앉은 알카이도를 바라보았다.
“하고자 하던 일을 마치시면 다시 황도로 떠난다 하셨습니까.”
“그래.”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도련님.”
“그야 거기가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장난스레 던진 내 말에 알카이도가 느리게 웃는다.
“설마 소문대로 1황녀와 잘 되길 바라신다거나.”
“그냥 편하게 물어봐. 이 크루거 가문을 들어 바칠 거냐고.”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거기가 재미있어서 그렇다니까. 하는 말에도 알카이도의 눈이 나를 곧게 응시한다.
알카이도의 충성은 사람이 아닌 이 크루거 가문 그 자체.
혹자는 그게 말이 되냐고. 마음을 쏟는 주체가 사람도 아닌 가문이라는 건 좀 이상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가문의 크기를 좀 더 키우면 쉬이 이해될 것이다.
애국심.
지금 와서야 글로벌 시대 글로벌 시대 하니 애국심 따위 좀 낡고 고리타분하고 때로는 국뽕이니 국까니 하며 가십처럼 다뤄지는 부분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 하나로 외세에 대항하고 목숨을 바치고 고문에도 꺾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던 만큼.
무언가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때론 자기 자신까지 바치게 하는 법이다.
‘그리고 알카이도는 자신을 발견하고 살리고 인정해 준 크루거 가문 자체를 사랑하지.’
알카이도가 날 지지하는 것은 크루거 가문이 더욱 강대해질 가능성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내 욕심과 영달을 위해 크루거 가문의 이권을 챙겨 이제는 트레잇까지 살살 밝히며 더욱 지지도를 모으는 1황녀 세리아와 붙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거겠지.
‘실제로 내가 가주의 자리에 집착하는 걸 보여 준 적 없으니 더할 테고.’
나야 가주 자리는 귀찮기만 하니까. 가디아를 시키고 나는 꿀만 빨겠다는 발칙한 생각으로 가득하다만.
알카이도가 그걸 안다면, 그럴 거면 처음부터 가디아를 밀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여겨질 수도 있는 노릇.
“알카이도.”
나는 부러 거만하게 웃으며 소파에 뒤로 몸을 기대 앉아 다리를 꼬았다.
“제국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말에 알카이도의 곧은 시선이 잠시 흔들린다.
나는 여상스레 그리 말하고는 차를 다시 홀짝였다.
“그렇지?”
그냥 스쳐 듣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대화. 하지만 지금 알카이도의 귀에는 어찌 들릴까.
나는 일부러 아공간에서 마나장막을 생성하는 아티팩트를 꺼내 보란 듯 느린 손동작으로 마정석을 끼워 넣고 작동시켰다.
“그 힘이 봉인된 상태로 유희 중이라고는 하나 드래곤이 내 집에 있지. 그리고 도플갱어들, 이들이 어떤 위험과 가치가 있는지 아마 나보다 똑똑한 알카이도가 더 잘 알지 않을까?”
거기에 조금만 눈썰미가 있거나 혹은 마나를 다루는 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케인의 지고한 경지.
케인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내가 데리고 온 이들 면면이 전부 고절하다.
“거기에 전 대륙을 감시할 수 있는 세이렌까지.”
내가 장난스럽게 낄낄대며 손뼉을 한 번 짝, 쳤다.
“이렇게 대륙은 좁아졌지. 우리가 원한다면 요정의 나라 아리나이드에 존재하는 정령의 숲에 있는 이와도 대화할 수 있고 혹은 엿들을 수도 있어.”
대륙은 좁아졌고, 제국은 너무나 크다.
나는 오랜만에 흑막 연기에 심취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떨 거 같아 알카이도? 크루거의 앞날이.”
내 말에 알카이도가 애써 침착하려는 듯 자신의 턱수염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가히… 그러합니다. 제국은 너무나도 크군요. 도련님.”
그리고 난 거짓말은 안 했다.
알카이도가 착각한 거라고 발뺌할 생각도 없고.
내 목표는 언제나 말했지만 해피 엔딩.
모두가 행복하기를.
‘악신교단을 멸절시키고 나면.’
그 악신인지 마왕인지 하는 놈을 잡고 나면 케인은 어찌될까.
내가 밟고 있는 것은 군주 트리.
군주가 무엇인가.
그 끝에 얻는 명칭은 ‘군림하는 자.’
그러니 케인의 엔딩 끝에 설 위치는 정해져 있다.
뭐 그 녀석이 성격에 비교적 결함은 있긴 한데 그런 건 신하들을 골고루 잘 채우면 되는 법.
‘그리고 그런 케인과 가디아가 잘 되면.’
그럼 난 거짓말한 게 없는 거지.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차를 마셨고 그 순간 알카이도와 내가 있던 방의 문이 열렸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러게 말이야. 누이. 살 좀 찐 거 같다?”
아카데미 밥이 맛있나 보다?
오랜만에 보는 가디아는 혹시 내 곁에 케인이 있을까 싶었는지 서리 베일을 쓰고 있다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내 쪽으로 걸어온다.
허공에서 서리 베일이 녹아들며 그 찬란한 은청색의 머리칼과 시린 푸른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버님이 부르시니 갈 준비를 서두르렴.”
가디아가 붉은 빛을 깜빡 깜빡 대는 가죽 스크롤을 들고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