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236)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236화(236/373)
“이상한 일이군요.”
체이서가 검보라색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서류를 몇 장 팔락거렸다.
집행자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알아낸 몇 가지 것들.
“이걸 본교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을까요. 과연.”
크고 또 작은 것들까지도.
성신교에서 행하고 있던 꽤 많은 것들이 한 무리에 의해 망가지고 있는데.
드러난 것만 보아도 혹은 짐작되는 것들만 보아도.
“하긴, 신께서 무관심하시니까.”
마치 언제건 깨어날 꿈을 꾸는 것처럼.
혹은 언제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신께서는 어지간한 일에는 관심도, 분노도 없이 무료하기만 하시니.
각자 파벌끼리 나뉘어 정보의 교류가 안 되니까.
다만 체이서 자신은 단 하나의 파벌에 속해 있는 자는 아닌지라 이곳저곳으로 토막 난 정보를 모두 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추리였다.
“금발의 사내. 아델리안.”
당신 알게 모르게 꽤 유명하더군요. 의아한 방향으로.
뱀 같은 검은 눈의 눈매를 체이서가 검보라색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느리게 눌렀다.
“무능력한 망나니. 크루거 가문의 수치.”
타고난 재능도 없으면서 단지 크루거 가문의 피를 이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만으로.
오만방자하며 위아래 없고 멍청한 데다 돈을 밝히며 폭력적이고 제 주제도 모르는 인간.
그게 대륙에 알음알음 퍼진 아델리안이라는 자의 정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체이서는 묘비 위에 다리를 꼬아 앉아 조각된 누군가의 머리 위에 팔을 올려 기대선 들고 있던 서류를 팔락거렸다.
“내가 본 것과 너무 다르잖아.”
거기에 그 검은 머리의 사내.
케인이라는 자에 대한 정보는 더없이 부족했다.
쓰인 것이라곤 허약하고 더러운 몰골로 경매장에서 팔렸다는 정도?
“동봉된 아델리안 수호 크루거의 초상화를 보면 분명 당신이 맞는데.”
마치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정보를 가져 온 것처럼.
이렇게나 진실과 다르다면 결국 뜻하는 건 한 가지 아니겠습니까.
“아델리안. 당신 일부러 소문을 냈군요.”
체이서의 입술이 얄팍하게 호선을 그렸다. 조각상의 머리 위에 올린 손으로 자신의 스태프에 달린 검은 크리스탈을 깎아 만든 뱀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크나큰 모멸감과 짙은 수치 속에 당신은 뭘 숨기고 있길래.”
모든 이들에게 비웃음받을 길을 선택했을까.
살아 있는 신께서 카이자가 케인이란 사내를 만나면 예정된 길이 바뀔 것처럼 말씀하셨죠.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 케인이란 사람보다.
“아델리안 당신이 더.”
신께서 바라는 것을 비트는 것 같아.
처음에 그분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하지 못했을 때.
반항하고 반항하여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겼던 어린 시절.
체이서가 조금은 공허해진 눈으로 수많은 묘비들을 바라보았다.
‘체이서. 넌 늘 이러더라.’
‘체이서. 결국 너도 허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겠지만.’
뜻 모를 말을 한 뒤 언제나 그분께서는 제게 악몽을 겪게 해 주셨죠.
무한한 나태와 허무.
“그런데 이상하지.”
카이자가 정해진 길을 벗어날 수 있던 하나의 방법이 있었다면.
신께서도 수백 번 중의 한 번 당신을 놓아주는 운명이 있었다는 것처럼 말했을 때.
조금 궁금하더라고요.
나도 그런 길이 있을까 하고.
케인이란 사내를 만나면 궁금증이 풀릴까 싶었지.
그래서 체이서는 묘비를 밟고 일어서 그림자로 변해 공간을 좁혀 움직였다.
밤에서 밤으로.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일반적인 마나를 다루는 마법이 아닌 그림자와 피. 감정을 다루는 외도마법을 써서일까. 적어도 살의를 품지 않고 조심스레 다가가서일까.
‘이야. 그때보다 너무 강해진 것 아닌지.’
이제는 보기에도 오싹하리만큼 강해진 그 검은 머리에 황금색 눈을 한 사내.
케인에게도 들키지 않고 아델리안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멍청한 그 흑마법사가 패밀리어도 하나 강탈당했군요.”
깍깍 하고 구슬프게 울며 가끔 청금색 머리의 사내. 혹은 소녀. 또는 은보라색 머리를 한 여인에게 머리를 쥐어 박히는 까마귀도 구경하고.
“재미있는 분들인걸. 당신들.”
겉보기에는 여리고 소심하기만 하지만 얼마나 날쌔며 강인한지 이미 겪어 본 토끼족 소녀에, 일렁이는 마나가 정제되지 않아 풀려날 때마다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붉은 머리의 무투가.
거기에 고대 던전에서 마주쳤던 아주 정교한 최상급 골렘과 더불어 그 정체가 가늠되지 않는, 끝없는 심연 같아 보이는 괴물이 하나.
어떻게 저런 이들을 모아서 다니지?
그리고 그런 이들을 결국 다루는 것이 재능도 힘도 없는 아델리안이란 사내라니.
느긋하게 며칠이고 바라본 결과 아델리안은 정말 무능력자가 맞았다.
예전에 요정의 나라 아리나이드에서 바닷빛 진주를 탈취하기 위해 만났을 때 본 마법들은 아티팩트로 생성된 것이었지.
결국 아델리안 본인에게는 그 어떤 재능도 가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저런 이들이 당신을 따르는 걸까.’
그림자 속에서 체이서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래서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지.
‘당신이 망가지면 어찌될까.’
살기를 품는다면 그 케인이란 사내는 물론이고 아델리안 곁에 있는 모두에게 체이서 자신이 들킬 테니.
살의는 담지 않은 채로 아주 은밀하게.
적당한 호기심과 더불어 작은 욕망을 담아.
아델리안에게만 스칠 아주 가느다란 틈새로 보낸 감정들.
분노. 공포. 슬픔. 색욕과 더불어 우울까지.
감정마법을 하나씩 하나씩.
체이서는 아델리안에게 묻히고 덮고 가로지르며 씌워 보기 시작했지만.
“…어이가 없군요.”
체이서가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마치 강대한 정신 방벽의 아티팩트라도 있는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심하지.’
그런 게 있다 한들 체이서 자신의 경지라면 조금의 동요는 있어야 하니까.
그렇지만 그 모든 정신마법에 면역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델리안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말이 되는 일일까?’
혹시 꼬리가 잡힐까 시도하진 않았지만 케인이란 사내에게 정신마법을 쓴다면 바로 효과가 나오진 않더라도 그가 체이서 자신의 마법을 억누르기 위해 잠시 멈칫하는 모습이라도 나올 게 뻔했다.
누구나 감정은 있으니까.
아예 이성이란 게 없이 설정된 동작만을 반복하는 인형 같은 존재가 아닌 이상.
생각을 할 수 있고 감정이란 게 존재하는 대상이라면.
체이서 자신의 정신마법을 절대 이렇게 완벽하게 무시할 수는 없는 일.
“이상하네. 당신. 너무 이상해.”
그것은 본능적인 역겨움. 두려움. 공포.
자신의 힘 하나가 절대적으로 듣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구겨지는 자존심.
체이서가 뱀처럼 웃었다.
“해봅시다. 우리.”
누가 이기나.
천천히 시간을 공들여.
체이서는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아낸 것은 단 하나.
‘아델리안은 부정적이며 공격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정신마법에 완전한 면역을 지녔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감정은?
행복. 기쁨. 즐거움. 감동. 환희.
이런 감정은 비록 쓸 일이 거의 없기에 그 숙련도가 공격적인 감정보다는 낮지만.
체이서는 외도마법을 사용하는 이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
뒷골목에서 잡아채 온 부랑자를 상대로 쓴 뒤에 아델리안에게도 써 본 결과. 그 또한 결과는 이상했다.
“어느 이상 높아지지 않는단 말이군요. 긍정적인 감정조차.”
너무나 기쁘다 못해 실신하고 환희에 차다 못해 이 행복함이 사라지는 미래를 없애기 위해 웃으며 목을 맨 부랑자를 보며 체이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렵네. 당신을 이겨 먹는 것.”
체이서가 스태프를 들고 다른 손의 손바닥에 검은 크리스탈 조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빠졌다.
“그렇다면 만약.”
내 모든 힘을 다해.
당신에게 내가 살아 있는 신, 그분에게서 받았던 허무와 무료함을 링크한다면.
그것은 공격적이거나 아주 부정적인 감정도 아니요. 극도로 높아지는 긍정적 감정도 아닌.
무미건조하며 일방적이고 일관적인 자기잠식의 감정.
위와 아래로 뻗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의 내부로 향하는 감정이라면.
그걸 당신이 저항하기 전에 내 모든 무너짐을 옮긴다면.
“저는 무너졌는데.”
그것도 당신, 버틸 수 있어?
체이서가 느리게 읊조리고는 이내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 * *
꽤 기분이 좋다.
그래서 오늘은 온전하게 휴식하기로 마음먹고 소파에 앉아 레이첼과 과자를 먹으며 책이나 읽을까 싶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사람이 게으름 좀 피우고 이렇게 과자 먹으면서 요즘 수도에 유행하는 책도 읽고 해 줘야 되는 법이다.
‘아, 그런데 제목이 좀.’
난 리프가 추천한 ‘열두 황자들이 평범한 시녀인 나를 좋아해’를 손에 쥐고 있다가 슬쩍 레이첼의 앞에 놓아주며 몬스터 백과사전이나 꺼냈다.
아, 재미있네. 흔한 몬스터 외엔 삽화가 없는 게 좀 아쉽지만.
내가 히죽거리며 책장을 넘기자 레이첼이 슬쩍 나를 바라본다.
“요즘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그러게? 한 번씩 기분이 좀 좋단 말이지.”
일이 잘 풀려서 그런가?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나쁠 게 뭐 있어.”
지금 골머리 앓는 게 뭐 있냔 말이지.
케인은 제법 마나 융화가 잘 되고 있지. 이노센트 교도 은근슬쩍 잘 퍼지고 있지.
파이얀도 성녀 연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슬슬 실전에 내보내도 될 거 같지.
언데드 훔치는 것도 어제부로 1999마리를 찍었다.
지하 수로가 넓다 한들 미리 수만 마리를 몰래 만들 생각은 아니었을 테고.
수천 정도를 미리 만든 뒤 지상에 내보내 테이트리아 수도에 사는 시민들을 죽이고 물어 죽음의 감염으로 연쇄 언데드팡 하려 했을 테니 1999마리 정도면 뼈아플 터.
슬슬 이 정도면 흑마법사가 눈치채고도 남은 거 같아서 당분간 쉬기로 했을 정도다.
덕분에 지금 마탑에서 돈도 쓸어 담았지.
‘물량을 너무 공급했으니 당분간 야금야금 내다 팔아야겠네.’
거기에 세리아 황녀와 티타임도 잡혔다.
그 말인즉슨 만나러 들어가서 눈 감은 성녀상의 저주가 언제 터질지도 좀 알아볼 기회가 잡힌 거지.
‘마나에 민감한 케인과 제로. 레이첼 중. 돌발행동의 위험이 있는 레이첼은 빼고 둘을 데리고 가면 되겠어.’
대신 레이첼은 게이트 비용까지 지원해서 새벽에서 요구하는 몬스터 부산물을 구해 오라고 하면 신나 할 테고.
소울도 야금야금 제법 모으기 시작했다.
루나. 리프. 레이첼 파티가 암시장 새벽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그러니 시간이 좀 걸린다 뿐이지, 그 신경 쓰이는 고대 요정어로 된 서적도 조만간 해금 가능하겠다.’
이리 일들이 착착 잘 풀리는데 기분 나쁠 일이 뭐 있냔 말이지.
내가 히죽거리는데 창가에 비스듬히 앉아 밖을 보던 케인이 문득 몸을 바로 섰다.
“잠시 다녀올 곳이 생겼다.”
“이 밤에 어딜.”
“그자가 부르는군.”
나는 케인이 뜬금없이 한 말에 잠시 생각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때처럼 또 한동안 사라지려고?”
이상한 노인 검사와 리벤지를 할 거면 몸이 다 낫고 하든가.
그때 마나 과부하로 손상된 마나회로를 내가 얼마 전에야 겨우 도와 어느 정도 안정화시킨 데다 과도하게 흡수한 물의 마나와 불의 마나를 합치는 것도 아마 덜 끝났을 텐데.
“아니, 그냥.”
“다녀오지.”
무시해라는 말을 채 다 하기도 전에 케인이 창문을 열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밖으로 몸이 사라진다.
“쟤 어디 가는데?”
그 모습을 보던 레이첼이 과자를 우물거리며 하는 말에 내가 이마를 짚었다.
“아, 진짜.”
좋은 일만 있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