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252)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252화(252/373)
드래곤에게 있어서 유희란 한나절의 꿈. 허상.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것.
아무리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더라도 유희가 끝나면 덧없고.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하더라도 유희가 끝나면 의미 없는 것들.
누군가와 나눈 달콤한 말도 혹은 증오에 찬 울분도.
그때의 꿈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마치 한 편의 연극 속에 뛰어들어 가 한바탕 즐기고 나오는 것처럼.
그러니 지금처럼 이렇게 드래곤 둘이 만날 일은 거의 없는 것이다.
유희를 할 때 자아는 드래곤이 아닌 유희하는 인물의 자아에 가까우므로.
“누구세요. 저 아시는 분이신지.”
“어, 알지. 너 소르페잖아. 이게 얼마 만이야. 한 4~500년?”
유희의 자아만 생각했을 때 분명 초면인 사이인데 대놓고 그걸 깨부수고 드래곤의 자아로 말을 거는 레이첼을 보며 소르페가 머리를 짚었다.
저, 저, 저 레이첼 같으니라고.
낮은 한숨.
하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그냥 모르쇠 하고 지나가면 또 부르고 또 부를 거 같아 그냥 포기한 소르페가 카페의 의자에 앉아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왜 보자고 한 거야?”
“아니, 우리 몇백 년 만에 보는데 뭐 그리 급해. 밥도 좀 먹고, 술도 좀 마시고, 어? 회포 좀 풀어가면서 대화하면 안 되냐?”
소르페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을 거는 레이첼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나 바빠.”
소르페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로브에 달린 문양을 톡톡 쳤다.
공식적으로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라는 문장.
즉 지금은 드래곤 소르페가 아닌, 인간 마법사로 유희 중인 소르페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임과 동시에 서로 신경 끄고 갈 길 가자는 제안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베이컨 에그 머핀 샌드위치에 레몬케이크랑 블루베리 타르트, 그리고 버터크림 체리 컵케이크에 자몽에이드. 일단 1차로 이것만 먼저 시킬 건데, 넌?”
하지만 레이첼은 그게 뭐, 하는 얼굴로 태연하게 주문을 하자 소르페가 이마를 짚었다.
“너 진짜.”
“아. 이래서 골드는 고리타분하다니까. 내가 뭐 잡아먹어? 우리 대화나 좀 하자는 건데.”
레이첼이 심드렁히 하는 말에 소르페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너 그거 종족 컬러 차별이야. 그리고 골드들의 대표적 이미지는 고리타분이 아니라 지혜거든? 난 베리티 하나면 됐어.”
다다닷하고 빠르게 말하는 소르페의 모습에 레이첼이 주문하면서 네에, 네에 하듯 말꼬리를 늘렸다.
“알지, 알지. 골드는 지혜인 거 알지.”
레드는 파괴, 골드는 지혜, 그린은 조화, 화이트는 순수, 블루는 고요, 블랙은 교활.
레이첼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하는 말에 소르페가 한숨을 쉬었다.
“그거 블랙 쪽에서 들으면 싫어하는 거 알지.”
“지들은 뭐 기품이네 뭐네 하는데 그건 지들 이야기이고 우린 다 그걸로 낙인 박았잖아?”
하며 레이첼이 낄낄거렸다.
“하여간 좀팽이들이야. 우리 레드들을 봐, 파괴자에 무식하단 소리를 들어도 그러려니 하잖아.”
지금 너 하는 꼴이 단순 무식하니까. 라고 차마 소르페는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나온 베리티를 후 불더니 한 모금 삼켰다.
뜨거운 찻물이 목과 가슴을 덥히며 내려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스로 시킬걸.”
“왜, 속에서 불나? 불 뿜는 건 내 특긴데.”
레이첼이 크아아 하며 무언가 내뿜는 흉내를 내자 소르페가 그제야 피식 웃었다.
“어디 가서 로드라고 하지 마. 우리 욕먹어. 위신 떨어져.”
“왜, 몽총이로 유희한다고 우기면 되지.”
레이첼이 누군가를 따라 하듯 몽총이. 하고 혀짧은 소리를 내다 소르페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걔 흉내는 그만.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한 이유는 뭐야? 반가워서는 아닐 테고.”
“반가워서인데?”
레이첼이 나온 베이컨 에그 머핀 샌드위치를 자르지도 않고 양손으로 들고 와앙 깨무는 걸 보며 소르페가 미간을 좁혔다.
“헛소리 계속할 거면 나 가고.”
“성격은 내가 급해야지 왜 네가 급해.”
나이 먹어서 그래? 하며 레이첼이 입가에 묻은 소스를 혀로 핥으면서 말하자 소르페가 레이첼의 케이크 중 하나에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네가 사람 급하게 만드, 아야.”
“내 거 먹지 말고 네가 더 시켜.”
나 이거 먹고 또 먹을 거란 말이야 하며 소르페의 손등을 탁 때린 레이첼이 케이크 접시들을 전부 자기 쪽으로 당기기 시작했다.
“…진짜. 너 어디 가서 우리 로드라고 하지 마. 꼭, 꼭!”
소르페가 발개진 손등을 만지며 쿠키 종류를 추가 주문 한 다음 으르릉거리며 하는 말에 레이첼이 씩 웃었다.
“이미 했는데?”
“너 미쳤니?”
아니, 유희하러 나와서 도대체 뭘 하며 싸돌아다녔냐는 질문을 눈빛으로 쏘아대는 소르페의 모습에, 레이첼이 슬쩍 눈동자를 굴리다 말을 돌렸다.
“하여튼 나 할 말도 있고 물어볼 것도 있어서 보자고 했어.”
“하아… 뭔데.”
“너 우리 집 괴물 봤지.”
레이첼이 뭔가 미묘하게 뿌듯해하며 하는 질문에 소르페가 자신이 시킨 버터쿠키를 한입 베어 물며 시선을 던졌다.
“…그 검은 머리에 황금색 눈을 하고 아름다운 데다 잘생긴 외모를 가졌는데 트레잇까지 완벽 그 자체인 사내?”
“맞아.”
레이첼의 말에 소르페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귀에 넣기엔 너무나 저급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심드렁하게 굴던 소르페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 인간 네 거야? 나 주면 안 돼? 알잖아, 나 진짜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 정말이야. 그러니까 나 주라. 응?”
드래곤은 본디 탐욕스러운 존재. 지혜로우며 강하고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종족이라 불리우긴 하지만 그 근본에는 탐욕스러움이 가득 차 있다.
보통은 반짝이는 보석이나 보물들 그리고 혹은 아름다운 미인들.
거기에 더불어 소르페는 자신의 트레잇, 주시자의 눈 덕에 타인의 트레잇을 엿볼 수 있었기에 희귀한 트레잇에도 매우 끌려 했다.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다운 것은 타고나거나 피땀을 흘려 가꾼 재능이기 때문에.
보석은 무한하며 관리만 잘하면 영원불멸하지만 트레잇은 어떤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연민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타고난 트레잇에 따라 종족적인 수명을 뛰어넘어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그게 드래곤을 따라올 수 있을 리가.
그런 와중에 본 그 사내.
외모는 어지간한 드래곤이 폴리모프한 모습보다 완벽한 데다 강하며, 트레잇 또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불망]과 [완벽]이라는 트레잇.
수많은 트레잇을 수집해 온 소르페에게도 단 한 번도 손에 들어온 적 없던.
아니, 애초에 본 게 처음인 트레잇이다.
그중 불망은 어떤 건지 감도 오지 않을 정도의 특이한 트레잇인데 다른 하나가 완벽.
그건 사실상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트레잇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강력한 트레잇이었다.
어쩌면 신조차도 완벽하지 않을 것이기에.
소르페가 금색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양손을 모아 조르듯 하는 말에 레이첼이 버터크림 체리 컵케이크를 한입에 욱여넣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 가져.”
“진짜?”
소르페가 순간의 기쁨에 몸서리를 치는데 우물우물 볼이 불룩하도록 케익을 씹던 레이첼이 말을 덧붙였다.
“가질 수 있으면?”
“…어?”
레이첼이 입가에 묻은 버터크림을 엄지로 훑어 혀로 핥으며 으쓱였다.
“힘으로 끌고 갈 수 있으면 끌고 가 봐.”
난 안 말려.
우리 소르페 화이팅.
하며 레이첼이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에 뭔가 이건 이상하다는 감이 온 소르페가 베리티를 한 모금 삼켰다.
“강해? 하지만 고작 인간이잖아.”
완벽이란 트레잇을 가진 이상 약하진 않겠지만.
나이가 들었으나 그 경지가 높아 외향이 어린 게 아닌, 그 육신은 정말 젊은 인간임은 확실했기에.
소르페가 고개를 기울였다.
“물론 강하다는 건 인정해. 지금 이 모습으로는 상대가 안 될 만큼 강하다는 것 정도야 느꼈으니까.”
하지만 그건 이 육신을 입고 있을 때의 일.
소르페가 손으로 자신의 가슴 위를 눌렀다.
“본체로 현신한다면 가능할 거 같은데? 아무리 강하더라도 아직 어리니 강해지는 한계가 정해져 있잖아.”
강하다 하더라도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지.
가낙스, 그 아이처럼 시간과 공간에 대한 트레잇을 가졌다 하더라도 드래곤의 시간을 따라올 수는 없는 법.
그리고 드래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며 세월만 보내도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는 생명체.
그런데 소르페는 마법이란 학문에 심취했으니 본능적으로 마법에 통달한다는 드래곤 중에서도 유독 강한 편에 속했다.
“내가 비록 너보단 약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인간 하나를 못 이길까 봐? 보아하니 격을 쌓아 종족의 한계를 넘긴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채 100년도 살지 못한 인간 사내가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는가.
강함이 시간과 무조건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아무리 재능이 특출난다고 해도 이제 고작 20년 살았을, 그것도 가장 종족적 특성이 희미한 인간이란 종족의 사내가 본체로 현신한 드래곤을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소르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뻔히 보이는 레이첼이 피실피실 웃었다.
“난 응원할게. 힘으로 데려가 봐.”
“좋아. 난 또 네가 붙어 있길래 이번 유희에서 점찍은 인간인가 했는데. 너랑 다투지 않아서 한결 마음 놓이네.”
소르페의 말에 레이첼이 웨엑 하는 얼굴을 하며 자몽 에이드를 한 번 쭉 빨았다.
단번에 잔의 반이 비워진 상태로 레이첼이 이번엔 조금 진지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이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말해 봐. 나에게 이렇게나 큰 양보도 해 줬는데 성의를 보여야지, 내가.”
현명하고 지혜로운 골드의 조언이 필요한 레드여.
하며 소르페가 레이첼 쪽으로 손가락을 사라락 위아래로 흔드는 모습에 레이첼이 콧방귀를 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싹 다 죽은 적 있냐. 혹시?”
“꿈꿨니? 유희 말고 진짜 꿈.”
“아니, 진짜 내 말 좀 잘 들어봐.”
레이첼이 뭔가 답답한 듯 가슴을 한 번 텅 치며 입을 열었다.
“너 우리 마지막으로 만난 400년 전은 기억나?”
“나지.”
“그럼 더 이전은? 1천 년, 2천 년. 아예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드래곤은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한 생명체.
그렇기에 본체가 아닌 폴리모프를 하여 유희라는 명목으로 간접 기억을 쌓는 것을 더 선호하는 종족이었다.
본체로 쌓이는 기억들 중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 많으면, 드래곤조차 버틸 수 없는 기억이 쌓이는 순간 광룡이라 불리는 모든 종족의 적이 되어 버리므로.
그러니 드래곤으로서의 기억은 아주 중요한 것이 아니면 쉬이 들추지 않게 살짝 수면 아래로 두는 것이 원칙.
사람으로 치자면 어제 점심 때 무얼 먹었는지 기억하냐고 물으면 기억나지만 평소에는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게 꼭 필요해?”
하나하나 들추기 귀찮은데 하는 얼굴로 소르페가 말하자 레이첼이 얼른 하라는 듯 손짓했다.
“기억이야 당연히 하지. 알을 깨고 나오기 전 그 갑갑함부터 첫 식사는 오크. 이건 뭐 드래곤 육아법상 너무 틀에 박힌 거 같아. 맛은 있었지만.”
하며 소르페가 말하다가 문득 멈췄다.
“…음?”
아주 가느다란 이질감.
그것은 너무나 교묘하게 기억에 들러붙어 있어 이렇게 일부러 알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돌이켜 보기 전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었다.
“이상한 건 없어. 없는데.”
이상하네.
분명 모든 기억은 정상적이지만.
아주 희미하게 계속해서 느껴지는 이질감.
마치 옷 안에 들어간 머리카락처럼 아주 별것 아닌데 거슬리는 기분이었다.
“소르페. 잘 생각해 봐. 잘 느껴 봐. 본능적으로 우릴 두렵게 하는 존재가 있을 거 같아?”
“없지. 그런 존재가 있을 리가.”
“그렇지? 그런데 잘 생각해 봐. 누군가 너를 죽이고 네 심장을 갈라 드래곤 하트를 꺼낸 적 없는지.”
잘 생각해 봐.
희미한 그림자.
그것이 제대로 무엇인지 자각하기도 전에 스친 단편적인 감각.
그것은 깨달음과도 같았다.
그에 소르페는 어쩐지 낯설게 보이는 레이첼을 바라보며 문득 솟은 공포심을 의아하게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