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259)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259화(259/373)
실금이 가 있던 하얀 뼈들이 보기 좋게 매끈하다. 흉곽을 채우고 있던 늑골들도 부러지고 깨진 것들이 없이 형형했다.
오염된 마나샘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 리치. 흑마법사는 자신의 이마에 박힌 보석을 매만지고는 턱뼈를 열어 느리게 숨을 흘렸다.
―까아악.
그 모습을 패밀리어 1호가 바라보며 울음소리를 냈고 흑마법사의 몸 주위에서 일렁이던 흑마나가 검은 로브가 되어 그 하얀 뼈 위에 드리워졌다.
“너도 느꼈겠지.”
가낙스에게 걸었던 힘이 사그라든 것을.
“어디에선가 가낙스가 죽었다.”
그의 영혼도, 마지막 숨결도, 하다못해 가낙스의 육신 일부분도 이곳으로 오지 않았지만.
걸어 둔 저주와 흑마법의 소실이 그 어떤 반동도 없이 그냥 사라졌다는 것은 단 하나만을 의미했다.
바로 가낙스의 죽음.
“나를 막는 것은 사라졌느니.”
가낙스만큼 강한 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인간들의 나라 테이트리아의 수도.
그곳을 목숨을 걸고 수호하는 이는 단 하나뿐이었으므로.
“대륙의 모든 나라 중 가장 강한 제국부터 무너뜨리고 언데드의 세상을 만들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구나.”
비록 그 케인이란 쥐새끼는 잡지 못하였지만 제국을 뒤지면 어디엔가는 또 괜찮은 몸이 있을 터.
흑마법사의 몸에 두른 검은 로브의 끝자락이 녹는 것처럼 허공에서 반투명하게 흔들렸다.
흑마나로 이루어진 그것은 흑마법사의 가라앉은 기분을 대변하듯 조금 사납게 일렁거리며 펄럭였다.
“하지만 아쉽구나, 아쉬워.”
하이 리치가 되기 위해 70년이 넘도록 준비했었다.
노예를 모아 오염된 마나석과 정령석을 모으고 그들을 실험체로 삼아 연구하다 수명이 다 되면 고문하여 마지막까지 흑마나를 빼낸 뒤 영혼까지 착취하던 나날들.
그렇게 영속하기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행하였거늘.
고작 어린아이가 휘두른 칼 하나로 그르치게 될 줄이야.
덥게 뛰나 결국은 썩어 버릴 심장을 대신할 강력한 보석과 더불어.
“살아 있는 신, 그분처럼 갈아탈 몸까지 준비했거늘…….”
하지만 자신이 갈아탈 몸으로 데리고 있던 그 검은 머리를 한 쥐새끼가 자신의 계획을 이리도 망칠 줄이야.
그래서 보석에 모아둔 그 거대한 마나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죽기 전에 급하게 본신의 마나로만 리치가 되어 하급으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흑마법사가 다시 자신의 이마에 박힌 보석을 매만졌다.
오염된 마나샘에서 몸을 치유하며 비록 뒤늦게나마 이마에 박아 넣었다고는 하나.
처음부터 이 보석을 심장으로 삼아 리치화된 것보다는 좋지 않은 효율이었다.
“케인, 그 아이를 얼른 잡아 내 몸으로 써야 했거늘.”
그래서 패밀리어 8호를 붙여 계속 행적을 쫓았던 거였지만.
흑마법사, 아니 이제 하이 리치가 된 이가 턱뼈를 움직여 딱 소리를 내었다.
“이제는 상관없어졌구나.”
가낙스가 죽었으니 이대로 수도로 들어가 때를 노리며 힘을 제대로 모은 뒤 언데드로 군단을 만든다면 배척받는 흑마법사의 나라를 만들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 와중에 케인이라는 쥐새끼보다 더 괜찮은 육신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하급 리치로 시작된 이 몸이 아닌, 좀 더 견고하게 꾸릴 수 있을 터.
이마의 보석을 박아 넣는다면 말이지.
“준비하자꾸나.”
―까아아악.
리치의 말에 패밀리어 0호가 울부짖은 뒤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 * *
은백발에 은색의 눈.
살짝 푸른 기가 맴도는 것 같은 눈처럼 하얀 피부.
아이스 엘프 르쉬올라가 하얀 모피로 만든 클로크를 입고 정원을 걷다 문득 고개를 틀어 북부의 지배자.
게드만을 바라보았다.
그 시리도록 아름다우며 칼날같이 잔혹한 모습에 게드만은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가 마치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유리구슬이라도 되는 듯 르쉬올라를 끌어안았다.
“또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시는군요.”
차갑고 잔인하기만 했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그 안에 아주 옅은 온기도 있음을 깨달아서.
푸른빛이 도는 새벽 같은 검은 머리와 보라색 눈동자로 인해 짙은 짐승처럼 보이는 사내가 부드럽게 르쉬올라를 바라보다 굳은살로 거친 손바닥이 아닌.
그나마 부드러운 손등으로 르쉬올라의 뺨을 어루만졌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아 그러오.”
그 손길에 르쉬올라가 느리게 눈을 슴벅였다.
“전 이곳에 있어요.”
“그래 당신은… 이곳에 있지. 그걸 알지만 가끔은 두려워진다오.”
‘혹시 그대도 언젠가 나를 곁에서 밀어낼까 봐.’
옅은 빛이 그 은색 속눈썹에 찬란히 부서지는 광경을 게드만은 바라보다가 눈동자를 내렸다.
하얀 클로크의 목깃을 잡고 있는 녹색의 거대한 보석 브로치.
어린아이 주먹만 한 그 보석을 바라보던 게드만이 르쉬올라의 어깨에 조심스레 이마를 묻었다.
누군가는 그리 말할지도 모르지.
눈앞의 르쉬올라가 진실한 존재가 아닌, 그녀의 기억과 감정을 모방한 도플갱어임을 알면서도.
즉, 원래의 르쉬올라를 잡아먹은 괴물임을 알면서도 어찌하여 사랑할 수 있냐고.
‘하지만…….’
게드만은 르쉬올라의 몸을 살짝 감싸 안고는 자신의 양손만을 힘주어 꽉 쥐었다.
이것만이 자신이 숨 쉴 수 있는 방법이라면 별수 없는 게 아니겠느냔 생각과 함께.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그날은 지금보다 날이 조금 풀린 계절이었던가.
르쉬올라는 유독 자신의 동족을 사랑하였다. 그게 아이스 엘프라는 종족의 특성임은 알고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너무나 유별날 만큼.
게드만과 혼인하여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분명 게드만도 있었어야 했으나 언제나 아이스 엘프만이 먼저였던 존재.
척박한 북부에서 한정된 물자를 언제나 아이스 엘프의 지역으로 몰아주는 덕에 게드만의 영지에서는 르쉬올라가 그리 고운 시선을 받지 못했다.
대공의 반려인 대공비. 즉 북부의 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경과 사랑은커녕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게드만을 학대에 가까울 만큼 몬스터 사냥에 밀어 넣는 존재.
그녀가 원하는 만큼의 부속물과 마정석은 물론이고 한정된 자원을 아이스 엘프 쪽으로 보내는 덕에 북부의 주민들이 필요한 물자의 나머지를 메꾸기 위해서라도 몬스터를 잡아야 했기에.
게드만은 한번 영지에 들어오면 길어야 1주일 정도 머물며 서류의 최종 확인을 끝낸 뒤 다시 서너 달 이상 원정을 나가기를 반복했었다.
고작 이삼일, 눈폭풍이 불어쳐 나갈 수 없는 날이 와야 일주일.
그 짧은 시간 머무는 것도 르쉬올라는 냉담했었다.
‘당신, 난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긍지 높은 아이스 엘프인 내가 당신과 결혼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에요.’
나는 나의 동족, 나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당신과 결혼했어.
당신이 첫눈에 나에게 반하였다 했지. 서로가 오랜 시간 피를 흘리던 이 땅 위에서.
우리가 결혼함으로 아이스 엘프와 인간의 전쟁은 끝났고 서로가 서로를 죽여 흐르는 피도 줄었지.
하지만 피가 줄어든 만큼 입이 늘고 써야 하는 물품조차 늘어나는 법.
‘그런데 당신의 영토는 너무나도 척박해.’
저 비옥한 남부의 대평원을 가진 이를 반려로 삼았다면 이리 척박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우리 아이스 엘프 쪽에서 왕족인 나와의 결혼을 허락해 준 의미를 알겠죠?
‘헌신, 그리고 번영을.’
나도 당신을 계속 사랑하고 싶으니까.
그러다 언젠가 저 깊은 극지대에서 만난 마물.
그 시린 곳에서도 끓는 독샘에서 기어 나온 거대 악어를 뒤엉키게 만든 것 같은 몬스터를 잡아서 얻은 포이즌 젬.
너무나 강한 독성에 오러 마스터인 게드만이 아니면 손에 쥐고 있지도 못할 정도로 강력한 마물의 핵을 얻었던가.
그것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으나 딱 그만큼 위험한 보석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한 공간에 같이 있기만 해도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을 정도의 독기.
그것을 제어하며 동시에 중화하기 위해 게드만은 자신의 성 가장 높은 곳에 봉인해 놓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르쉬올라.’
다음 원정을 다녀온 게드만이 본 것은 독기를 중화하기 위해 봉인한 방을 열고 들어가 죽어 있는 르쉬올라였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강한 독기를 지녔는지 알면서도.
르쉬올라는 그것의 존재를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했고 아이스 엘프의 왕은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그 포이즌 젬을 탐냈던가.
결국 봉인된 문을 열고 들어가 죽은 르쉬올라의 품에는 독기를 막아 준다는 아티팩트 몇 개가 까맣게 타들어간 채 안겨 있었다.
너무 강한 독기에 시린 이 북부를 돌아다니며 온갖 것을 다 파먹는 벌레마저 들어오지 못한 건지 오롯한 르쉬올라를 끌어안고 게드만은…….
“무엇을 그리도 생각하세요.”
“…당신이 없으면 나 또한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
게드만의 말에 르쉬올라가 낮게 웃으며 그의 이마에 붉은 입술을 내리눌렀다.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나는군요.”
“…독기에 휩싸여 울고 있던 날 발견한 순간 말이오.”
“아뇨, 당신이 젊은 시절 전장에서 만났을 때?”
그때 난 당신이 이리 어린아이 같은 줄 몰랐어.
하며 르쉬올라가 게드만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 사락거리며 손가락이 머리칼을 헤집는 움직임에 게드만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대공.’
허드렛일이나 하던 사용인이 가장 높은 탑 위에 올라왔음에도 죽은 눈으로 르쉬올라를 안고만 있던 게드만이었다.
‘대공. 아, 저거 정신 빠졌네. 아차, 말버릇이 너무 옮았어.’
그런 게드만을 보며 중얼거리던 사용인이 다가와 중독되어 죽은 덕에 녹색으로 변한 르쉬올라의 손을 잡으며 무어라 했던가.
‘게드만 대공. 우리 거래 하나 합시다.’
어차피 르쉬올라가 죽었으니 무엇이 더 필요할까. 대공저에 있는 모든 물품을 들고 나간다 하더라도 게드만에겐 의미가 없었을 터.
죽은 눈으로 멍하게 르쉬올라만 안고 있던 게드만이 자신의 검을 빼어 들고 목을 겨눴을 때 그 사용인이 검을 손아귀로 쥐고 속삭였다.
‘르쉬올라의 기억과 감정, 전부 가졌으며 그 외모까지 같다면.’
르쉬올라가 아닐까요, 대공?
누군가의 기억과 감정, 겉모습까지.
마치 복사하여 옆으로 옮긴 것과 같다면.
그게 타인이라 할 수 있겠냐며 사용인이 물었다.
그리고 그에 게르만이 무어라 대답했던가.
‘나를 경멸하여도 좋다.’
그러니 제발 다시 한번 르쉬올라를 보고 싶다고 그리 애원했었던가.
그 애원에 사용인의 몸이 흐물흐물하게 녹는 것처럼 보이더니 르쉬올라를 삼키며 게드만의 품에 안겼고 한참 후에 르쉬올라의 얼굴로 그리 말했지.
‘어머, 나도 당신을 사랑했었군요.’
다들 내가, 르쉬올라는 대공을 사랑하지 않고 이용만 한다고 수군거렸는데.
사실은 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
하고 눈을 맞춘 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하겠지.
다만 아이스 엘프라는 종족의 특성상 개인의 욕망보다는 그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본능으로 게르만에 대한 사랑보다 아이스 엘프라는 동족을 좀 더 많이 사랑했기에 그리 굴었노라고.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르쉬올라이되 진정한 아이스 엘프가 아니라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게드만은 독기가 전부 중화되어 반짝거리는 녹색의 보석을 바라보다 그 위에 입 맞췄다.
“르쉬올라, 우리 수도로 갑시다.”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 성대하게 열리는 축제. 50년 주기로 더욱 크게 열리는데 올해가 바로 그때이니.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어. 당신에게.”
늘 아이스 엘프들 곁을 떠날 수 없다 말했으므로.
“하지만 한 번 정도는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소.”
비교적 이곳보다 따스한 제국의 수도와 화려한 축제, 아름다운 꽃의 향연을.
게드만의 말에 르쉬올라가 게드만의 뺨을 어루만지며 느리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