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26)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26화(26/373)
볕 좋은 날.
밖에서는 마크를 필두로 성을 한 바퀴 도는 기사들의 구보가 이어졌다.
안은 아델리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얼굴이 화사해진 시종들이 대대적으로 꽃과 직물로 성을 꾸미고 있었다.
그 덕에 부는 바람마다 향기를 싣고 날아와 성의 가장 깊은 곳.
우아하게 꾸며진 집무실까지도 그 들뜸이 가득 찬 것만 같았는데.
“할론 기사… 아니, 할론… 어… 비서관님? 여기 식사 두고 갑니다.”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샌드위치를 가져온 시종 하나가 집무실 한가운데 검은 구름을 뿜어내는 것 같은 할론을 보곤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따라 나가면 안 될까?”
“그걸 왜 저에게 물으시는지. 일을 다 하셨으면 나가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매정한 시종의 말에 할론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쉬엄쉬엄…은 무리라도 식사는 하며 하세요. 할론 비서관님.”
매정하게 꽃향기가 불어오던 문까지 닫고 나가는 시종을 보다 할론은 슬픈 얼굴로 다시 책상 가득 올려진 서류를 바라보았다.
“정말 사람이면 이럴 수는 없다…….”
어찌 사람이 사람에 대한 믿음을 이리도 저버릴 수가 있는지.
퀭하게 다크서클이 오른 눈으로 할론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서류에 사인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다.
물론 그나마 한번 걸러져 오는 서류다 보니 어지간한 건 훑어보고 사인만 하면 된다지만.
괜히 대충 보고 사인했다가 일이 꼬여 자신의 계약이 늘어나는 날엔…….
평생 검과는 안녕. 펜과의 삶이 지속하는 악몽 같은 시간이 기다릴 것이다.
“미치겠네, 진짜…….”
피실피실 웃음이 나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파업은 하지 못하고 서류를 확인하는 자신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론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인님… 아니지, 도련님… 믿었는데.”
아니, 사람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이 많은 서류에 할론 자신만 홀로 박아 놓고 갈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럴 거면 그냥 자신도 데려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찌 이리도 무자비한 주군이신지.”
할론은 열심히 눈으로 서류를 훑으면서도 한쪽 머리론 과거를 더듬기 시작했다.
자신이 처음이 성에 온 날.
종자부터 시작해 예비 기사로 훈련받다가 결국엔 서임을 받던 날.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시절 중에 할론 자신이 아델리안에게 어떤 죄를 지었을까.
‘혹시 동료들과 소소하게 뒷담화한 걸 들으신 건가.’
그렇지만 그건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충혈된 할론의 눈가가 촉촉해지며 작게 이슬이 맺혀간다.
“내 재능이 증오스럽다.”
이걸 검을 들고 읊조렸다면 희대의 재능충으로 시작되는 대하소설이라도 하나 나왔을 테지만 아쉽게도 할론의 재능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살겠다고 모래 씹는 느낌으로 턱만 움직여 샌드위치를 베어 무는데 할론은 문득 셔츠 주머니에 넣어둔 편지를 하나 기억해 냈다.
“그래… 더 이상 바닥이 어디 있겠어.”
처음 시종이 건네주는 편지를 받고 할론은 차마 그 자리에서 뜯어 볼 수가 없었다.
아델리안이 저를 비웃으며 영원히 서류노예로 임명한다는 임명장일까 봐.
사실 편지를 받기 전날 그런 꿈을 꾸었기에 할론은 자신이 예지몽을 꾼 건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지금 기분으론 어차피 영원히 노예로 살 거 같은데 임명장을 눈으로 보는 게 어떤 문제인가 하는 지경까지 왔다.
“열자.”
편지를 열어서 보자.
할론에게
내가 갑자기 여행을 가서 많이 놀랐을 것이나 염려는 놓도록.
네 후배를 잡아 꼭 보낼 테니 그동안 건투를 빈다.
―아델리안
“후… 후후…….”
할론의 입에서 실성한 것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용히 깃 펜을 들어 할론은 편지에 적힌 후배라는 글자 위에 가위표를 칠하곤 그 아래 천천히 노예라 적어 넣었다.
“빌어먹을 고용주 놈아… 주고 간다며. 주고 간다며.”
이 무슨 야생의 서류노예를 잡아 온단 포부냐.
그전에 정말 보내는 주는 것인가.
“더는 못 참아.”
하루의 일탈.
그걸 막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할론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서류?
하루 정돈 제치라지.
어쩔 거야, 지금 아델리안 도련님이 오실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쇠질을… 아니, 토할 만큼 뛸까… 후, 체인 메일도 다 입고 한번 완전 군장하고, 어?”
비실비실. 뇌 대신 육체를 학대할 생각을 하니 그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온다.
할론은 신이 나는 마음을 억누르지 않고 그대로 힘차게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우드득!
“…어?”
방금 이 소리는 뭐야.
할론은 문이 열리는 소리 대신 울린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에 동작을 멈추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덜렁―
이게 왜 내 손에 들려있지?
할론은 깔끔하게 부러져 자신의 손안에서 덜렁거리는 문고리를 바라보았다.
“하?”
그리고 다른 손으로 슬쩍 문을 밀어보는데.
“…….”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할론의 허망한 눈이 부러진 손잡이와 미동도 없는 고풍스러운 문에 닿아 떨어진다.
“부술까……?”
다른 기사들에 비해 날렵한 몸이라 하나 이 정도 문이야 마나를 쓰면 부수는 것은 일도 아니건만.
저 뒤에는 땀 흘릴 연무장이 기다리고 검이 기다릴 텐데.
그러나 원래 카이만이 쓰던 집무실이었으니 말은 그리해도 차마 할론이 문을 부술 수는 없었다.
어째서 나가질 못하니.
이렇게 날이 좋은데. 드디어 반항심을 품었는데.
할론의 고개가 기기긱 하는 느낌으로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볕이 잘 드는, 서류가 가득한 책상.
“어쩔 수 없나.”
밖에서 누군가 열어 줄 때까지, 아마도 저녁을 가져올 시종이 그를 구해주기 전까지 할론은 힘없이 시무룩하게 다시 자리에 앉아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아델리안 도련님은 악마다…….”
툭, 투둑.
지금까지 참아왔던 눈물이 툭툭, 할론의 눈에서 떨어졌다.
* * *
끼아악!
삿된 울음을 내뱉으며 날아가는 까마귀를 뒤로하고 우리는 마을 입구에 도착해 호흡을 골랐다.
어쩐지 그곳을 말을 타고 지나기는 예의가 아니란 생각에 말에서 내려 마을 입구에 죽어있는 나무에 고삐를 묶는데 케인이 나지막하게 소리를 흘렸다.
“동생이 살아있다. 그리 말했을 때. 혹시나 하고 생각했었다.”
담담한 듯,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피부 위로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케인은 고저 없이 목소리를 흘리며 마을 안으로 한걸음, 걸음을 내디디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운 좋게 살아남아 이곳에 있진 않을까.”
나를 기다리진 않을까.
다시 한걸음, 나보다 먼저 걸어가며 케인이 뱉은, 바람에 흩어지듯 사그라진 그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사실, 처음엔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응했지만 어쩌면 나를 농락하려는 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분명 케인을 흔들려는 마음으로 지른 수였지만…….
“그렇진… 않아.”
나는 대답하면서도 혀끝에 쓴맛이 도는 것만 같았다.
거짓은 아니었다. 거짓만큼은 아니었다. 다만…….
“살아는 있어.”
“그래. 살아는, 있는 거로군.”
내 말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읽었을지, 그리고 왜 내가 전부 편하게 말하지 않는지 케인의 머릿속이 잡힐 것 같으면서도 흐리멍덩한 기분이 들었다.
셋이서 말없이 마을의 입구부터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래두… 좀 깨끗하네요…….”
조금 낮아진 분위기에 루나가 애써 괜찮다는 어조로 입을 열며 주위를 둘러 본다.
거의 무너진 집과 동물도 없는 적막한 곳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어찌 보면 고요한 숲 속이었다.
다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다 치우지 못한 식기나 잡화들이 한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직접 만든 듯 거친 외형의, 이미 삭아버린 나무 컵과 망가진 인형.
한때는 누군가가 거주하고 손수 식기를 만들며 행복을 꿈꿨을 곳이라는 게 여실하게 느껴져서 나는 숨을 흘렸다.
그리고 마을의 가장 안쪽으로 진입했을 때.
“이건…….”
작은 봉분과 더불어 돌을 깎아 만든 묘비가 드러났다.
합동묘.
인적 드문 작은 마을에 일어난 사교의 인신 공양.
마을은 피로 비가 내린 듯 비린내가 나고 불에 그슬린 집과 참혹하게 전시된 사람들.
종종 교류를 위해 들렸을 다른 화전민들도 작은 보부상들도 그 몰골에 놀라 달아만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수년 동안 비바람을 맞고 산짐승이 들쑤시고 결국, 엉망이 되어버렸겠지.
그런 모습을 차마 이제야 고향으로 돌아온 케인에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난 누가 있었는지, 그들의 특징이 무엇인지는 모르니까.”
그래서 알카이도에게 말했다. 이곳을 그냥 깔끔하게라도 만들어달라고.
집까지 전부 정리하면 남은 것이 하나도 없어 케인의 모든 기억까지 망가질까 봐.
그 끔찍한 흔적만 정리하고 장례만 치루어 달라고.
“시간이 지나서… 소실 된 뼈도 많고 마을 밖까지 나간 뼈들도 있어서. 한 명 한 명 맞추지는 못했다.”
약간의 위험은 안더라도,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는. 너에게 보일 예의니까.
케인은 말없이 비석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곤 미동 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눈물을 흘릴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저 가라앉은 눈으로 케인은 무덤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점점 넘어가는 해가 드리우는 비석의 그림자가 케인의 무릎을 어루만지듯 천천히 지나갈 때까지.
오렌지빛으로 물들던 하늘에 점차 보랏빛이 섞일 때까지.
나와 루나는 케인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등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 *
아델리안의 서재에서 읽은 어느 책엔 그런 말이 있었다.
망각이란 신이 내린 축복이라 하였지.
그런데 어째서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가.
케인은 지금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날 느낀 공기의 감촉. 바람의 무거움. 코보다 먼저 머릿속으로 찌르듯 들어오는 것 같았던 매캐한 탄 냄새와 피비린내.
눈을 감지 않아도 떠올리려 마음만 먹으면 발끝에 닿던 날카로운 돌부리의 감촉까지.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오빠 놀자아.”
“케인. 애플파이를 구워놨단다.”
“내일은 덫 놓는 법을 알려주마, 케인.”
마치 곁에서 속삭이는 것 같이 생생한 기억 속의 목소리.
매캐한 피 냄새와 달콤한 사과의 냄새가 섞여 코끝에 맴도는 것만 같다.
눈 닿는 곳곳이 전부 행복했던 과거와 겹쳐 피범벅으로 불타오르던 그 날과 스침에 케인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떠내곤 옅게 숨을 흘렸다.
자신이 미처 거두지 못한 가족을, 마을 사람들을. 아델리안이 저 대신 전부 모아 장례를 치러낸 무덤 앞에서.
케인은 저 위에서 내려다볼 그 어떤 신보다도 아델리안이 더욱 자비롭다. 그리 생각했다.
“나는.”
케인은 서서히 일어나 굳건히 대지를 디딘 그대로 몸을 돌려 아델리안을 바라보았다.
오만한 듯 고압적인, 귀족 그 자체의 얼굴.
하지만 가볍기 그지없는 말투와 행동.
그렇기에 아델리안은 제대로 가진 것은 없음에도 허세만 있는, 온통 허점투성이에 볼만한 외모와는 달리 생각 없는 멍청이라고 누군가는 여기고 있겠지만 실상은 다르다는 걸 케인은 알고 있었다.
“네가 무능력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델리안과 있으면서, 성안에서도 밖에서도 들리던 그의 소문.
더럽고 추잡하며 욕심만 가진 무능력한 쓰레기.
크루거 가문에 태어난 오점.
하지만 지금 케인, 제 눈에 보이는 아델리안은.
“네 미래를 받으려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어?”
장난스럽게 마치 그저 던지는 말이라는 것처럼 소리 내어 웃으며 하는 그 말에 케인도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다.”
해가 거의 넘어갈 무렵, 달은 이제 막 하늘로 오르는 시간.
신의 눈이라 불리는 두 개의 별이 떠오른 그 순간에 케인은 맹세했다.
“누구보다 강한 자가 되겠노라고.”
스치는 바람이 케인을 휘감아 아델리안에게로 불어갔다.
작은 풀 이파리가 아델리안의 뺨을 스쳐 흘러간다.
“그리하여 너와 동등한.”
케인의 황금색 눈동자가 아델리안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다.
“아니. 그 이상의 사업적 파트너가 되어 주지.”
단조로우면서도 담담하게, 그러나 그 말의 파급력은 강력하게.
아델리안은 그 강렬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단 한 가지 말을 읊조리며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것을 못 박힌 듯 바라보았다.
[케인 레이너스―나아가는 자]대표 Traits : [불망(SS)] [천재(S)] [외형(A+)] [신체(S+)]
히든 Traits : [강인함(A+)] [만능(C+)]
“나아가는 자.”
군주의 길로 나아가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