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269)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269화(269/373)
새하얀 눈 뭉치로 빚어냈을까.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처럼 완벽하게 그려진 손길이 허공을 살짝 잡아채듯 하자 냉기를 뭉쳐 생성한 화살이 활시위에 맺혔다.
그것은 단 한 번의 호흡.
단 한 번의 깜빡임 안에 수 발이 궤적을 그리며 날았다.
사과만 한 크기의 표적물이 몇 번이나 꿰뚫리고 얼어붙었다가 이내 마지막 화살에 산산조각 나는 것까지 확인한 가디아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확실히… 차이가 나.’
썩은 것과 발효의 차이는 먹고 탈이 나냐 나지 않느냐의 차이뿐이라고 했던가.
분명 신선한 재료를 당일에 써서 만드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래 묵은 맛이 나는 아델리안의 녹즙.
왜 탈이 안 나는 거지, 하고 의문이 드는 그 맛이 주는 힘이란 놀라웠다.
근본적으로 몸을 다시 짜 맞춘 기분. 원래 가진 재료를 최대한 이상적으로 조합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효율적으로 변한 움직임과 마나의 흐름이 느껴진다.
‘이상한 녀석.’
온통 부서지고 얼어붙은 잔해 위에 서 있던 가디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듯 쓸어 넘겼다.
요즘의 생활이 낯설다면 낯설었다. 카이만, 즉 아버지가 건넨 사과와 더불어 일어난 모든 것들이.
그동안 카이만이 행해 왔던 대부분의 것들이 가디아 자신을 위한 일이었음을, 그리고 저를 사실은 누구보다 아꼈다고.
그런 말과 더불어 이어진 사과. 한 가문의 가주로서, 아버지로서 행해진 그것이 가디아에게는 아직도 비현실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덕인지 적어도 사내에 대한 혐오감은 크게 줄어들어 가는 중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디아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한번 마른침을 삼켰다.
이유를 불문하고 본디 남성을 보면 기본적으로 갖게 되는 편견과 더불어 일어나던 분노 대신, 다른 것을 느끼게 한 사람.
아델리안의 곁에 있는 그자.
‘케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가디아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한번은 스치듯 그 이야기를 하였을 때 카이만이 무어라 했더라.
‘본능…이라고 했던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단순하게 강한 자이기에 공포심이 드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기에 어쩌면 그 말이 맞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본능이라면.’
왜 가디아 자신만 느끼는 걸까.
그것을 카이만은 아는 눈치였으나 그의 성정상 자신이 일부러 자세하게 묻기 전엔 말해 주지 않으리라.
“아가씨. 식사시간이세요.”
생각에 잠겨 있던 와중 사용인이 와서 하는 말에 가디아가 시선을 내리깔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한 번 정도는 카이만과 식사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으니 언젠가 그 이유를 쉽게 묻는 날도 오겠지.
가디아가 활을 거두며 몸을 돌렸다.
* * *
“주군. 이렇게까지 지원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너무 비효율적입니다만.”
그 정체불명의 이노센트교를 내세우는 것까진 상관없다.
하지만 테이트리아 제국뿐만 아니라 전 대륙의 빈민을 대상으로 구휼과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사실상 밑이 깨진 물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고 드는 것이나 마찬가지.
비록 그 구휼 활동이란 것이 정말 최소한의 생명 활동을 돕는 정도라고는 하나 그것 또한 문제였다.
“차라리 범위를 좁혀서 거하게 퍼주는 것이 낫습니다. 천민이나 수인족은 우매하여 기껏 도와도 은혜도 모르는 소리나 지껄일 것을 아시잖습니까.”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라느니, 이런 빵 한 덩이 주며 생색낸다느니. 겨우 이 정도 줄 거면 안 하니만 못 하다느니.
모든 이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삶이 팍팍할수록 남 탓을 하며 버티는 사람이 있는 법.
그 마르고 억센 빵 한 덩이가 없어 죽거나 자신을 노예로 파는 이들이 대륙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 알면서도.
당장 자신의 입에 들어가는 것을 더 좋게 누리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보니.
“특히 아인족이 많은 지역까지 확대한다는 것에 불만이 거셀 겁니다.”
본디 아인족이란 신들이 이 세상을 만들 때 오롯한 인간의 영혼이 부족한 나머지 그 모자란 부분에 짐승의 영혼을 섞어 만들었다 하지 않은가.
불완전하며 엉성한 실패작들.
그러니 인간이 가장 번성하고 강한 제국을 만들지 않았나.
이것이 테이트리아 전역에 퍼져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다 보니 누군가는 그 덜떨어진 아인족에게 줄 빵을 아까워할 것이다.
본디 원래 자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인족에게 베풀 식량이 있으면 자신들에게 더 달라고 하면서 분명 지원을 해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앙심을 품을 겁니다.”
말 그대로 돈은 천문학적으로 나가는데 얻는 이득이라곤 전무하다시피 한 활동.
그나마 크루거 가문의 이름을 대대적으로 쓰지 않으면 그 날선 말들이 크루거로 날아오진 않겠지만.
‘크루거의 이름을 긍정적으로 널리 알리려는 목적이 아닌 한 그 큰돈을 써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가.’
카이만의 수하가 고개를 숙여 가며 하는 말에 카이만이 긴 손가락으로 깃펜을 쥐고 있다 잉크병에 꽂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번엔 갑작스럽게 시작하여 밀부터 소금뿐 아니라 식량 자체를 구입해서 나눠주었지. 하나.”
하지만 아예 공작령을 비롯하여 인근의 경작지를 계약하고 빵 또한 완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상단에서 생산 및 관리 납품을 한다면.
“제대로 시작하면 비용 자체는 조금 더 줄어들 터. 그것을 감안하여 상정하였을 때.”
이 정도 규모로 구휼 등을 버틸 수 있는 기한은.
“약 300년.”
애초에 대륙 전역을 아우르는 상단을 가진 덕에 물류 및 운송 비용이 적게 드는 것과 동시에 현지에서 직접 생산케 하여 배포하면 최소한의 투자로 운용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끝날 테니 상관없지 않겠나.”
크루거 가문의 대소사를 전부 아는 데다 유일하게 모든 정보를 파악하는 카이만이 내린 결론에 반대의 말을 올리던 사내가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결국 이 문제가 남습니다.”
충분히 여력이 있다 한들, 결국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지 않은가.
“저희가 왜 해야 합니까.”
천민들만 해도 정 안 되면 농노로 자원하면 먹고사는 것이 힘겹긴 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루하루 구걸이나 해 가며 노동 없이 횡재수만 바라는 것들이 아닌가.
게다가 거기에 같은 인간이 아닌 짐승의 영혼이 섞인 아인족까지 돈을 쏟아부어 내면서 살려야 하는 건가.
정말 바닥의 바닥까지 떨어져 본 적 없는 귀족 혈통의 사람이 하는 생각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는 것을 보며 카이만이 낮게 웃었다.
“그들은 단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 그 쓸모를 다하는 셈이다.”
카이만의 말에 이해하지 못하겠단 얼굴을 하던 사내가 다만 충성심으로 따르겠다며 고개를 숙이고 나간 뒤.
카이만은 잉크병에 꽂아 둔 깃펜을 다시 들어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폐하를 뵙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샤하드.
황제가 속삭이듯 하는 말에 샤하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자신의 앞에 있는 이는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느꼈기 때문에.
‘왜 그전엔 몰랐지.’
황제는 변덕이 심했다. 어느 날은 한 달에 몇 번도 부르던 반면 어느 날은 몇 달, 혹은 1년이 지나도 못 보던 일이 다반사.
아버지라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황제 그 자체. 권위와 권력의 인간화처럼 느껴졌을 뿐
거기에 유독 허약하고 나약한 체질. 적당히 달리는 것조차 버거운 몸이라 언제나 황제의 앞에서 주눅 들어 있었지만.
‘지금은 달라.’
이 두려움과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저 위압감.
예전엔 그냥 황제였기에 고개를 숙였지만 지금은 그가 얼마나 강한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기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못 보던 사이에 꽤 변했구나. 샤하드.”
이런 적이 있었던가?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
그 별것 아닌 말에도 벌벌 떠는 샤하드를 바라보다가 황제가 조금 몸을 움직인 듯 바스락하는 천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이유가 없거늘.”
어째서 자신을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황제가 읊조리더니 이내 굽어 살피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샤하드. 너, 신성을 가졌구나.”
그래, 평범한 이들이라면 고작 이 정도 경지로 나를 엿볼 수 없을 텐데.
샤하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이 숨을 쉬지 않고 멈춘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재미있군.”
마치 처음 있는 일 같은 게, 이래서 기억을 다 되찾기 싫단 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중얼거림 뒤로 황제가 한번 손을 움직이니 어느 순간 알현실 밖으로 나와 있는 자신의 모습에 그제야 샤하드가 숨을 몰아쉬었다.
‘뭐지… 방금 저…….’
불경한 단어를 제대로 떠올리기 전에 샤하드가 얼른 몸을 돌려 비척거리며 걸었다.
애써 무언가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황제를 비롯한 그 모든 것을 뇌리에 떠올리기 싫어 저잣거리에서 들은 음유시인의 노래를 되뇌며 걸었다.
두려웠으므로.
마치 자신이 속으로 떠올리며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전능함을 방금 느꼈기에.
당장이라도 황제가 손을 움직여 자신을 알현실 안으로 들일까 그것이 두려워. 샤하드는 나중엔 전력으로 뛰어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헉, 허억.”
성 밖으로 나오자마자 소리를 터트리듯 숨을 고르며 손등으로 이마를 쓸었다.
입은 옷이 젖을 만큼 식은땀이 흘러 있었다.
아마 그 누구도 지금 황제를 본다 한들 자신 같지 않을 것이라는 걸 본능으로 알았다.
예전, 아무것도 없던 시절의 자신처럼 그냥 막연한 감정만을 느끼겠지.
‘…도대체 뭐지.’
순혈의 인간 외엔 황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황제는 분명 인간인데 어째서…….
‘괴물…….’
희미하게 싹튼 신성이란 트레잇. 그 덕에 한 겹의 치장, 그 너머를 느낄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신성이 쌓인 괴물. 도대체 얼마나 쌓였는지, 그 본질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존재.
황성에서 제법 떨어진 곳까지 와서야 생각의 댐을 터트렸다.
혹시 자신의 생각을 읽을까 봐 두려울 수가 있다니, 그리고 그런 존재가 황제라니.
‘…어떻게 해야 하지.’
샤하드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세리아가 문제가 아니었다. 저런 상태의 황제를 두고 감히 누가 다음 황위를 노리겠는가.
‘…이노센트와 접선을 해야겠어.’
샤하드가 그렇게 생각한 그때. 황제는 조금 무료해졌단 얼굴로 몸을 늘어뜨렸다.
“분명 언제나 단명하던 아이였는데 말이지.”
지금 가진 기억을 대충 되짚어 봐도 샤하드란 존재는 수천 번 세리아에게 트레잇을 봉인당한 뒤 꽃피우지 못하고 죽지 않았던가.
색색거리는 숨소리. 눈은 살아 있으나 몸은 계속해서 매시간 죽어 가던 모습들.
하지만 이번 샤하드는 다르지. 어느 때보다도 완벽한 상태.
몇 번이고 세계를 돌려 진행한다 하더라도 늘 같지는 않다.
애초에 황제이자 살아 있는 신인 자신부터 변수가 아니었던가.
어떨 때는 살아 있는 신으로만 있거나 혹은 황제로 단 한 번 강림하거나.
변덕을 부려 갑자기 한밤중에 대륙 반대쪽의 과일이 먹고 싶다고 하거나.
그런 사소한 변수부터 시작해 세계는 아주 조금씩 변했으니까.
이번엔 그냥 샤하드가 건강해진 세계인 거지. 왜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테고 그럼 지금은 저리 보여도 그때는 다시 바스라지는 모습일 테니.
필요에 의해 만든 아이들인 데다 어차피 수천, 수만 번의 생을 반복하는 이들이니 자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부품이나 다름없는 이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했다.
사실상 이미 삶이 끝난 인형을 살아 있는 신의 권능으로 움직이는 것이니.
‘그러고 보니…….’
이번은 유독 그 권능의 소모가 오래 유지된다.
보통 성신교에서 대규모로 전쟁이나 전염병을 일으켜 많은 생명을 죽이면 그만큼 그들을 유지하는 권능을 회수할 수 있었는데.
‘이번은 조금 변수가 많은걸.’
하지만 그뿐이다.
언제나 변수는 변수일 뿐, 결말은 살아 있는 신 자신이 정해둔 것 외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살아 있는 신.
황제는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다음 아이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