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270)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270화(270/373)
진한 커피색 피부에 주근깨. 그리고 하얀 머리칼을 가진 흑염소 수인 히핀이 청백색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자신의 스승이자 골디안 마탑의 마탑주인 소르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이 스승님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가 기울어지는 히핀의 모습에 소르페가 자신의 머리칼을 흩어 매만졌다.
“그러니까 당분간 네가 부탑주로 여길 지켜야 할 거 같아.”
소르페의 말에 히핀의 고개가 좀 더 모로 기울었다.
“원래 제가 거의 부탑주 노릇을 했잖아요?”
말만 견습이지 안 그래도 인원이 많지 않은 골디안 마탑인 데다 대부분 탑에 안 들어오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지 오래라.
마탑은 주로 히핀 자신과 소르페만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소르페는 괴짜 같은 구석이 있어서 히핀 자신이 금전 관리며 연구 보조며 의뢰를 추리는 것까지.
“보통의 부탑주가 하는 일 제가 다 했는데 이제 와서?”
“뭐야, 나에게 박정해. 히핀.”
소르페가 억울한 듯 말하자 히핀이 흐응 하고 숨소리를 흘렸다.
“하여간 나 당분간 수도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을 거야. 지금도 말없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거 같아 이 말 하러 잠시 온 거야.”
완전히 악덕 고용주에게 걸렸다며 손사래를 치는 소르페를 보다가 히핀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거는요?”
히핀이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자 소르페가 장난스레 놀라는 척 말했다.
“하, 참. 히핀. 날 어찌 보고?”
아델… 아니, 고용주가 돈이 많아 하며 주섬주섬 마정석을 꺼내 테이블에 올리는 모습에 히핀이 해맑게 웃었다.
“탑은 걱정 마세요, 스승님.”
이렇게 웃는 거 오랜만에 본다? 소르페가 속삭이다가 느리게 웃고는 손을 뻗어 히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의 ‘소르페’로서 가장 아끼는 나의 아이. 나의 컬렉션.
그 재능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금방 가 버릴 정도니.
“무슨 일 있으면 이곳에 전언을 맡겨.”
“라피스? 이곳에서 그런 소소한 일도 받아주나요?”
고작 전언을 전하는 데 비용을 얼마나 달라고 할지…….
히핀의 말에 소르페가 그건 걱정 말라 이르며 급한 도구만 몇 개 더 챙기는데 히핀이 그런 소르페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일 하세요?”
“신전 구경 하면서 신관을 유심히 바라보기.”
소르페의 말에 히핀이 잠시 생각했다. 그걸로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거야.
“왜죠? 그걸로 무엇을 할 수 있는데요?”
“아마도… 세상을 구하는 일?”
“네?”
어디서 어린이용 길거리 연극이라도 보셨어요? 하는 말에 소르페가 굽혔던 허리를 펴며 대답했다.
“나도 믿기 힘든데, 빨간 녀석이랑 대화하다 보니 그게 맞는 거 같긴 해.”
하여간 다녀올게.
소르페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마탑을 나섰다.
* * *
엘윈 폰 테이트리아가 오기로 한 날.
제법 늦은 시간을 선택한지라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드는 대신 책을 읽는데 제로가 슬쩍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제가 그냥 먼저 만나서 처리하겠습니다.”
꽤 비장해 보이는 제로인데. 굳이… 그래야 하나?
나는 소파에 앉아 읽던 책을 닫으며 꼬아낸 다리를 까닥거렸다.
“왜?”
“예?”
해적여왕 엘리스의 일로 알카이도가 독단적으로 나 몰래 도플갱어들을 다른 곳에 잠입시킨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내려진 명은 보통 아랫사람으로 잠입해 하나씩 잡아먹어 가며 최종적으로 목표물을 노리는 식이라 당장 제로가 그 지역에 가기 전엔 누군지 특정하기 힘들기도 했고.
어차피 그렇게 된 거 우리 쪽에서 억지로 연락하면 되레 꼬리가 잡힐까 봐 그냥 두자고 마음먹은 일이었다.
‘뭐, 이래저래 잘 풀리면 나야 좋은 거고.’
안 풀려도 도플갱어들이 편하게 세상을 볼 수 있을 테니.
더불어 알카이도가 무고한 선인은 최대한 걸러냈다고 한 말 덕에 적어도 착한 사람이 당할 일은 줄었다니 안 그래도 부유감 덕에 얼마 없는 양심이 지켜지기도 했고.
그래서 오히려 목표물 중 하나인 엘윈 폰 테이트리아가 함락되었단 소식이나 다름없으니.
‘오히려 좋아.’
나는 내 말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잡아올 거 같은 눈치로 안절부절못하는 제로에게 손짓했다.
“그냥 만나보지, 뭐.”
“하지만… 아델리안 님. 뭔가 저쪽에서 오해가 있는 듯하여 그걸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해라고 해 봐야 내가 제로를 노동착취 및 학대를 한다 정도 아니겠어?
‘뭐 주기적으로 돈은 안 주고 있긴 한데…….’
각자에게 나눠준 아공간 아티팩트에 골드와 같은 현금과 더불어 마정석도 넣어뒀으니 상관없지 않나.
나는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그냥 만나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은데.”
내가 실실 웃으며 말하니 제로가 자신의 이마를 매만진다.
“지금 그쪽에서 아델리안 님을 오해하는 중 같은데 굳이 자처하셔 무례함을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걸 보면 제로가 괴로워할 것이다. 요즘 소르페를 이어 케인을 몰았으니 이번엔 제로 차례인 거지.
나는 완벽한 근거를 바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때. 결국 이러나저러나 널 걱정해서 하는 일이고 오해일 텐데.”
거기에 그냥 제로를 걱정하는 중인지 혹은 자유를 만끽 중이라 도를 넘어선 건지.
그리고 변한 제로에게 어찌 반응할지도 궁금하고.
엘리스 때는 이미 제로가 대화를 끝내고 합류한 터라 상관없었지만.
도플갱어도 자의식이 있을 텐데 제로가 종주인 것만으로도 복속이 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엘윈 폰 테이트리아 정도의 위치라면 도플갱어인 것만 들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남부럽지 않게.
아니, 손꼽히게 화려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이번에 찾아오는 게 혹 제로나 나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한 입막음을 시도하려는 목적일 수도 있지 않은가.
‘제로에게 직접 물어봐도 되겠지만.’
제로 성격에 적당히 좋은 부분만 말해 줄 거 같으니.
엘윈 폰 테이트리아가 좋은 기준이 될 것이다.
그 정도 위치의 인생을 차지했을 때, 그 지위와 권력만을 놓고 제로를 저울질한다면 도플갱어의 충심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제로의 악몽을 떠올려 보자면 사실상 벗어날 수 없는 것 같긴 하지만…….’
문제는 제로의 꿈에서 본 제로는 도플갱어의 종주.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듯이 보였다.
자의식도 없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그냥 인간 형상의 자연재해.
전율이 일 정도로 무서웠으나 고독하고 고요한.
‘하지만 지금은.’
뭔가 앓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는 제로를 흘긋 바라보았다.
사실 그런 포스는 없는 상태니까.
혹여 엘윈 폰 테이트리아가 제로를 무시하거나 하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으로.
아니면 반대로 엘윈 폰 테이트리아의 인생을 차지하여 모자란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로에게 충성을 바친다면.
‘그럼 서로 일이 수월해지겠지.’
나는 턱을 괸 채로 무언가 단념한 듯 낮게 한숨을 쉬며 몸을 꼿꼿하게 세운 뒤 어디론가 시선을 던지는 제로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엘윈 폰 테이트리아가 올 시간이 다 된 거 같은데. 아직인가?”
“아뇨.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타인의 이목도 있어서인지 늦은 밤이다.
비록 창문을 닫아 두었다고는 하나 마차의 소리도 말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정도면 아주 은밀한 방문.
문이 살짝 열리더니 루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늘어진 귀가 살랑 흔들린다.
“도련님. 도착했어요. 어찌 하실 생각이세요?”
본디 엘윈 폰 테이트리아는 황족, 그리고 나는 비록 대공의 직계라고는 하나 정식 작위를 받은 건 아닌 상태.
그러니 아랫사람의 예를 갖춰 직접 가 인사를 한 뒤 대화를 나눌 만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원래 예의며 정석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내가 지금 이 소파를 일어나 엘윈 폰 테이트리아에게 인사를 하러 간다고 말을 하면 바로 제로가 뛰쳐나갈 것 같은 기운이라 나는 으쓱이며 웃었다.
“이곳으로 데려와.”
“네.”
“그리고 제로는 옆방에 좀 가 있어.”
내가 손으로 저쪽으로 가라는 듯 흔들며 하는 말에 제로가 당연한 듯 내 뒤로 오다가 ‘네?’ 하고 반문했다.
“왜입니까.”
“그냥 엘윈이 어찌 나오는지 좀 보려고.”
그러니 도착하기 전에 얼른 몸을 감추라는 내 말에 제로가 드물게 미간을 좁힌 얼굴로 날 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그 큰 몸을 조금 구기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옆방으로 들어갔다.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관리자님.
“저두요.”
리프가 자연스레 내 뒤로 오고 루나는 티타임을 보조할 겸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레이첼이 안내한 듯 밖에서 제법 큰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린다.
“그럼 좋은 대화 하라고. 나머지 호위들은 나랑 있지?”
붉은 포니테일이 열린 문틈 새로 흔들렸고 그 뒤를 누군가 따라오더니 열린 문 새로 들어선다.
갈금색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 줄이 달린 안경을 쓰고 품이 넉넉한 옷을 입었다.
얼핏 보면 학자로 보일 정도로 유약해 보이는 외모에 옅은 미소가 서린 얼굴.
“주인님. 제가.”
엘윈을 따라온 듯한 사내가 뒤를 따라 내 방으로 들어서려는데 엘윈이 한 손을 들어 제재했다.
“단둘이 대화하고 싶은데.”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레이첼이 열어낸 문틈 새로 선 엘윈의 말에 나는 느리게 웃었다.
“보시다시피, 전 무능력한 사람이라.”
단둘은 좀?
하고 싱글싱글 웃었더니 엘윈이 차갑게 웃는다.
“물러가. 나 혼자 들어가지.”
“하지만, 주인님.”
“어서.”
엘윈의 말에 엘윈의 뒤에 서 있던 사내가 나를 흘긋 노려보다가 레이첼과 함께 뒤로 물러난다.
굳게 닫히는 문.
나는 아슬하게 제로가 있을 옆방의 일부까지 덮을 크기로 마나장막을 생성한 뒤 입을 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고 해야 하나?”
“당신은 진짜 나를 아니 구태여 그럴 것까지는 없지.”
엘윈이 루나가 따라주는 차를 바라보다가 살짝 밀며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도 늦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까.”
종주를 돌려줘.
엘윈이 나를 곧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분은 이런 곳에 있을 분이 아니야. 미궁이 아닌 밖에서까지 그분이 자유롭지 않은 모습을 보고 싶진 않군.”
황족이 가진 거대한 힘.
그리고 비록 크루거 가문에게는 비견되지 않겠으나 그 가문의 모든 것을 쓸 수 있지는 않을 테니 너 개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풍족한 삶을 누리도록 모든 것을 지원해 주지.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이제는 제법 착착 붙는 흑막 미소로 입을 열었다.
“엘윈 폰 테이트리아는 분명 이익을 보는 일에 밝은 편이라 들었는데.”
계산이 빠르진 않나 봐?
누가 봐도 제로를 내가 쥐고 흔들며 원하는 것을 계속 갈취해도 할 말 없다는 듯 저자세로 나오네.
하며 히죽거렸더니 엘윈이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네게 보이는 호의는 여기까지다. 감히 종주를 대상으로 저울질할 생각이 없기에 처음부터 모든 것을 밝히고 말한 거지만.”
감히 종주를 방패막이로 삼으며 이용하려 든다면 자신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 말하는 엘윈에게 내가 눈을 휘어 웃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제로를 인질 삼아 계속 골드를 요구하면 어쩔 건데. 네가.”
덤빌 거야, 뭐야?
하듯 도발하니 엘윈이 느리게 입을 연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망나니에 크루거 가문의 수치. 그 어떤 가치도 없는 무능력자 아델리안. 거기에 어떤 수식어가 더 붙을지 궁금한가? 후회하도록 해 주마.”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옆방에서 문이 탕, 열렸다.
“아델리안 님에게… 넌 잠시 이쪽으로 들어와.”
갑자기 옆방 문이 열림에 엘윈이 고개를 돌렸다가 어. 하고 표정이 바뀐다.
“종… 종주?”
제로가 미간을 좁혀 그 녹색 보석안을 사납게 치켜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