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278)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278화(278/373)
시간, 공간, 그리고 영혼.
하나 더 더하자면 기억까지.
전부 실체도, 관념도, 개념도 확실하게 자리 잡히지 않은 것들.
실체가 확실히 존재하는 것은 다루기 쉽다.
아무런 재능도 없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눈앞에 존재하는 검을 쥐고 휘두르는 것을 못 하는 이 없으니까.
눈에 확실히 보이며 존재하는 것을 두드리고 문지르며 형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모래가 있다면 모래를 쌓고 물이 있다면 물을 퍼낼 수 있다.
불이 있다면 나무에 옮겨 붙일 수 있고 하다못해 눈에 확실히 보이지 않는 바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입바람은 불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시간을 누구나 매만질 수 있을까. 공간을 누구나 조절할 수 있을까.
기억은 자신의 것이니 쉽게 될 거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특별한 날이 아닌 수많은 일상 중 원하는 날 원하는 시간의 기억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을까.
게다가 영혼은?
보통은 하나만 어떻게 건드릴 수 있어도 일반적인 재능이 아닌 트레잇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케인은 그 모든 것들을 한데 모아 빚어내려는 시도를 하는 중이었다.
‘살아 있는 신은 죽임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니다.’
케인이 명상하며 느리게 숨을 쉬었다.
살아 있는 신을 죽이거나 악신교단을 대륙에서 지우는 것은 고작 기본적인 목표였다.
아델리안과의 대화를 되짚어 생각한다면 결국 살아 있는 신을 자신이 능가해 물리적으로 죽일 수 있다 한들.
결국 이 세계의 순환의 고리를 부수지 않는 한 모든 것들이 의미 없어지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마을이 불타 사라진 그날부터 시작된 고통과 분노, 증오와 경멸부터 결국 의지를 꺾으며 되새긴 다짐과 맹세마저도.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겠지.
다시 케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이 거짓된 세상에서 각자의 불행을 되새김질할 것이다.
지나가는 이 누구나 잡고 물어보면 한 명 한 명 모두 인생에 크나큰 괴로움이 존재하는 법.
다시 태어난다면 이 고통만큼은 다시 받고 싶지 않다고.
이 괴로움만큼은 싫다고.
왜 사람의 마음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으면서 고통은 느껴지는지.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왜 나는 존재하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울고 후회하고 되뇌던 그 고독한 시간들을.
비록 기억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인형처럼 몇 번이며 반복해서 겪을 필요는 없는 법.
그러기 위해선 이 반복을 무조건 끊어야 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나일 테니.’
그리고 이 수많은 사람들과 이 세상을 꾸며서라도 바라는 것이 케인, 자신의 고통이라면 그 이유를 본디 자신도 알고 있을 터.
다만 기억을 하지 못할 뿐.
자신과 살아 있는 신은 어떠한 관계인지. 그리고 왜 살아 있는 신은 신으로서 존재하고 케인 자신은 인간인지.
자신의 불행이야 몰라도 마을의 비극과 여동생의 일은 정말로 일어날 수밖에 없던 일인지.
혹은.
‘그 또한 만들어진 무대라면.’
케인이 느리게 다시 숨을 골랐다.
* * *
“많이 다치진 않았어?”
<네.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도련님.>
<우리가 선물 들고 가니까 기대해?>
<―빠른 시간 내로 복귀하겠습니다. 관리자님.>
나는 루나와 레이첼, 리프의 사이렌에 깜짝 놀란 심장을 가라앉혔다.
‘실종자를 찾는 의뢰에서 악신교단과 마주칠 줄이야.’
지금까지 악신교단이 인신공양한 장소는 몇 번 가 봤지만 실시간으로 하던 와중에 마주친 건 처음이다.
그만큼 그들은 은밀하게 움직이니까.
더불어 게임에서 마주쳤을 때를 생각하면 분명 개중 한두 명은 레벨이 높은.
즉 오러유저에서 마스터에 가까운 이가 있었을 텐데 전부 근딜, 탱 조합으로 큰일 없어서 다행이다.
대화의 뉘앙스를 보니 아주 안 다친 건 아닌 거 같지만 최상급 포션을 개인마다 듬뿍 들려 준 덕인지 큰 부상은 없는 듯했다.
‘그리고 선물이라.’
뭐지.
뭐, 비밀지령서나 이런 걸 찾은 건가.
파이얀과 체이서. 소르페도 지방 쪽 소도시나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밑밥을 깔았으니 슬슬 불러들일 때가 되었다.
이노센트의 성녀가 기도와 더불어 기원하며 순례길을 걷듯 수도로 올라간다는 소문을 좀 퍼트려 주면 시선이 자연스레 쏠릴 터.
너무 멀리서부터 직접 올라오게 하는 건 좀 무리한 부분이니 그런 곳은 적당히 입소문만 흘리고.
실제로는 워프 게이트를 타고 이동하지만 그건 완전히 돈을 허공에 뿌리는 행위니까.
순례길로 정해 둔 루트에 맞춰 모습을 한 번씩 드러내게 한 뒤 점진적으로 이동시키면 될 것이다.
나중에 파이얀이 샤하드를 지지하면 분명 파이얀과 이노센트교의 뒤를 파는 세력이 나올 게 뻔하니까.
쓸데없는 꼬투리는 잡히지 않도록 루트와 시간 설정을 잘해 두는 게 낫겠지.
잠시 종이에 적으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린다.
“들어와.”
“아델리안 님.”
제로가 들어오길래 무심코 고개를 돌렸더니 복장이 이상하다.
“아, 이건 선물받아서.”
그래, 제로도 잘생겼지. 이 저택에 자잘한 일을 도와주는 사용인들 중 몇몇이 호감을 품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개중 누군가 아주 과하게 콩깍지가 씌었는지 저 큰 덩치에 저런 앞치마는 좀.
내 눈길에 제로가 슬쩍 벗어서 손에 말아쥐고는 입을 열었다.
“케인 선배님이 바쁘다고 식사 안 하신다는데요.”
“굶으라 그래.”
요즘 명상을 하고 무언가 궁리하는지 혼자 바빠 보이는 케인이라 그냥 손사래 치니 제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아델리안 님과 저만 먹으면 될 거 같은데. 드시고 싶은 건 없으십니까.”
나는 한동안 풀 파티의 음식을 준비하면서 손이 커졌는지 2인분만 만들려니 애매하다는 얼굴을 한 제로를 보다가 종이들을 아공간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외식이나 할까?”
바깥 분위기도 좀 볼 겸.
내 말에 제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오랜만에 외출을 나오니 곧 축제라 그런가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스치며 들리는 억양도 낯선 것이 대륙 곳곳에서 몰리는 모양.
개중 돈이 넉넉한 이들은 수도에 미리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지 옷차림이나 억양이 조금씩 다르지만 부유해 보이는 이들이 거리에 늘었다.
그에 맞춰 슬금슬금 노점상도 늘었는데.
원래는 미관 문제로 특정 구역이 아니면 치안대에서 경고하는데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봐주는지 평소 보이던 분수대 근처가 아닌 별장과 저택이 모인 곳에도 드문드문 차려진 게 눈에 띄었다.
“색다른 음식이 좀 늘어난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타 지역 사람들이 늘었으니 수요도 다양해져서가 아닐까?”
원래도 노점이 많았던 분수대 근처 광장으로 가니 야시장을 방불케 하듯 북적거린다.
“평소 안 먹어 본 걸 먹어 볼까.”
“예.”
제로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니 특이 식재료나 자신이 먹어 본 적 없는 것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특이한 허브향이 나는 곳으로 가니 오돌토돌한 야채와 고기를 깍둑 썰어 구운 것을 나뭇잎 접시에 올린 게 보였다.
“이것저것 먹어 보려면 일단 하나만 사는 게 낫겠지?”
맛있으면 더 사고.
그런 마음으로 브론즈 몇 개 건넨 뒤 받은 그것은 오돌토돌한 야채는 쓰고 미끄덩한 식감에 고기는 철분 맛이 강했다.
이게 잘못 만들었다기보단… 그냥 그런 맛의 음식 같은데.
나는 야채 하나 고기 하나 주워 먹고 제로에게 넘겼다.
그렇게 내가 한 입씩만 먹고 제로에게 통째로 넘긴 음식이 3종류가 넘어갔을 무렵.
누군가 내 등에 톡 부딪히려는 걸 제로가 한 손으로 잡아 막음에 ‘아.’ 하는 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아… 죄송해요. 어……?”
“오랜만이네?”
고개를 돌려보니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지만 누가 봐도 에리엘이었다.
양면의 신 바사하의 성녀. 이노센트의 대표적인 세 명의 미치광이.
메인 파티의 루나. 중립의 에리엘. 악신교단의 카이자 중 하나.
도박장에서 접근해 암시장 새벽으로 안내해 준 고마운 존재.
그에 난 일부러 부딪쳤음을 느꼈음에도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고 내 아는 체에 에리엘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에. 네. 오랜만에 뵈어요. 요즘… 바쁘셨나 봐요?”
도박장에도 암시장에도 자주 나가지 않았으니 조금 애가 탔나 봐?
“조금? 아버지가… 흐음. 하여간 조만간 한번 가볼까 하긴 해.”
이럴 땐 만능 부모님 핑계지.
슬쩍 카이만을 팔아넘겼다. 죄책감은 없었다.
나는 조만간 도박이라도 한번 가서 스트레스를 풀어야겠다는 듯 손가락 지문끼리 서로 비비며 으쓱했고 그에 에리엘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황성 안에서 황제로 앉아 있을 살아 있는 신을 어찌 쫓아내나 고민했는데…….
할 만한 게 생각났네.
“그럼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자, 이거 먹어. 다음에 보자고.”
일단은 태연하게 아까 한입 먹고 너무 달아서 제로에게 준 간식을 슬쩍 다시 빼앗아 에리엘에게 건네준 뒤 손 흔들어 보냈다.
악신교단의 본단이나 가장 큰 자금줄 같은 건 체이서를 부르면 알 수 있을 테고.
루나와 리프, 레이첼이 선물로 가져온다는 것도 분명 악신교단과 관계되어 있는 일일 테니까.
‘이이제이… 가능할까?’
에리엘을 나에게 붙인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기본적으로 탐욕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한 도박장이나 새벽으로 나를 꼬셨을 리 없기 때문에.
골드는 헌금 정도의 액수를 바라고 다른 것이 목적이었다면 도박장이나 암시장이 아닌.
신전이나 거래처 쪽으로 유인했을 터.
하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대 나에게 뽑아 먹으려고 하는 건 오롯하게 골드뿐이니 도박장과 암시장으로 나를 유인한 것이다.
‘그러니 악신교단의 본단을 다른 것으로 위장해 정보를 흘리면…….’
최소한 들쑤셔 보지는 않을까?
살아 있는 신이 이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는 걸 보면 다른 신들은 도대체 뭐 하는 중인지 의문스럽긴 하다.
그렇다고 아예 존재를 안 한다고 하기엔 분명 신성력을 끌어다 쓰는 신관이 존재하는 중이고.
그렇지만 무슨 신이 자신을 추앙하는 이들의 반복된 죽음과 고통을 무시하냔 말이지.
이게 궁금해서 운명의 신 르웰르의 성녀이자 어렴풋하게나마 무언가를 아는, 파이얀의 성녀 선배인 마리안느에게 물어보았지만.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하던가.’
뭐, 천기누설 이런 종류인 건지.
그런 걸 보면 분명 살아 있는 신 외에 다른 신들이 절대 소멸한 상태는 아니다.
다만.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몇 가지 되긴 하는데…….’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따지고 보면 살아 있는 신을 제외한 다른 신들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니 에리엘을 비롯한 다른 신관을 내가 속이고 이용한다고 해도 그들은 나에게 무어라 할 수 없을 터.
내가 직접 누군가를 고용해서 악신교단의 본단을 치는 건 역으로 추적당할 위험이 굉장히 크지만.
거기를 잘 포장해서 돈 많은 이단 정도로 어떻게 에리엘 상관에게 정보를 넘기면 대신 들쑤셔 주지 않을까?
‘더불어 혹시 첩보 겸 원정이라도 보낸다면 그쪽으로 뭔가를 들려 보낼 수도 있고.’
악신교단의 본단에서 화재라도 나면 황제가 한 번은 돌아가지 않겠냔 말이지.
나는 생각을 마친 후 입을 열었다.
“그나마 괜찮았던 거 사서 갈까?”
“예, 아델리안 님.”
오늘의 수확은 카레다. 완전히 같은 건 아닌데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스튜에 쌀 비슷한 걸 같이 넣어 끓였더라.
‘부유감 있어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김치, 하다못해 단무지라도 달라고 울부짖었을지도.
나는 다른 건 다 제로에게 들려 주고는 카레만 손에 소중하게 쥔 채 저택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