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282)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282화(282/373)
언제나 빛이 화창하게 들어오는 곳이었다.
눈을 돌리면 크게 열린 창으로 지저귀는 새들과 저 아래의 정원이 보이는 곳.
촛불 하나 켜지 않아도 온종일 해가 떠 있는 시간엔 내부가 환하게 비춰서 장식품들이 발하는 빛 덕에 금가루를 뿌려 놓은 곳 같았다.
대제국 테이트리아의 제1황녀.
세리아의 거처는 그랬었다.
얼마 전까지는.
“누가 커튼을 걷으라고 했지?”
“아… 세리아 황녀, 아니 황태녀님. 그게…….”
세리아가 없는 동안 청소를 하며 환기를 위해 열었던 창과 걷었던 커튼이었다.
요즘 유독 빛을 싫어하듯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꼭꼭 치는 터라 늘 조심했으나 하필 그중 하나를 오늘 제대로 여미지 않아 방 안으로 들어와 있는 빛무리에 메이드가 절절맸다.
그리고 그렇게 울기 직전의 얼굴로 땀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세리아가 차갑게 바라보며 끝까지 올려 채운 드레스의 목깃 위를 손끝으로 매만져 긁었다.
“얼른 닫고 나가.”
“네… 네!”
서릿발 같은 세리아의 목소리에 메이드가 얼른 커튼을 내리고 도망치듯 나가자 세리아가 촛불을 켠 뒤 백금으로 장식된 거울을 바라보았다.
‘세리아 황녀님이 요즘 너무 이상해지셨어… 무서워.’
‘왜 그리 예민하신지. 방도 이젠 어두워서 음침하다니까.’
‘가끔 비린내? 같은 것도 나는 거 같고.’
원래라면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들.
하지만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소근거리는 사용인들의 목소리가 세리아의 귀를 찌르듯 들렸다.
그에 세리아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하아… 하아.”
일부러 입으로 숨을 쉬며 자신의 숨소리로 다른 소리를 뭉갰다.
문득 거울을 치켜보는 눈동자가 어쩐지 조금 타원형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에 신경질적으로 주위의 물건을 잡고 거울로 던졌다.
“이게, 뭐야. 이게.”
이럴 리가 없어. 뭔가 잘못되었어.
세리아가 방 안을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녔다.
모든 감각이 예리해졌다. 시력도 예전보다 좋아져 먼 곳이 더 또렷하게 보인다.
청력은 또 어떤가. 아까 전처럼 벽 뒤에 숨은 소리까지 들리지 않았던가.
후각 또한 예민해져서 이제는 눈을 감고도 사용인의 체취만으로도 누가 왔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예전이라면 그냥 부드러운 천이라고 느꼈을 것들의 올 방향도 손끝으로 더듬을 수 있다.
미각마저도 극도로 예민해져 이제는 잘게 다진 것들이나 하다못해 소스에 소량 들어간 허브마저도 알알이 맛이 느껴졌다.
거기에 더 심각한 건.
‘케이크가… 점점 먹기 힘들어져.’
원래라면 풍미라고 느꼈을 밀가루와 아몬드 가루의 고소함. 계란과 우유의 진한 맛이 조금 비리게 느껴졌다.
반대로 스테이크는 조금씩 덜 익혀 먹기 시작했고.
보다 더 날것에 가까운 것이 맛있어지는 감각에 세리아가 손끝을 떨었다.
‘그자들이 날 속였어.’
자신들이 믿는 신은 살아 있다며, 무엇보다도 위대하다며.
그 이름을 성신교라 말하던 자들.
분명 눈 감은 성녀상의 저주는 그들이 방비해 주기로 했었다.
그것을 대가로 이번 축제 때 제대로 된 종교임을 자신이 공언해 주기로 한 게 아니었던가.
“유모! 유모!”
세리아가 발작적으로 외치자 멀리서 발소리가 타닥타닥 들리더니 누군가 문을 확 열고 들어왔다.
“네, 황태녀님. 아니, 거울이… 안 다치셨어요?”
바르르 몸을 떠는 세리아를 끌어안고 손바닥으로 뺨을 어루만지는 유모를 세리아가 손으로 탁 치며 밀어냈다.
“내가 알아보라는 건 어찌 되었어. 그 작자들 말이야!”
나에게 거짓을 말한 그들. 분명 아무 탈 없을 거라고 약조해 놓고 그 거짓말쟁이들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자수정색 눈을 희번덕하게 뜨며 하는 말에 세리아의 유모가 얼얼한 손을 매만지면서도 달래기 시작했다.
“제가, 제가 다 알아보고 있었답니다. 방금도 알아본 걸 정리하던 중이었는걸요.”
유모는 세리아의 손을 잡고 소파로 당겨 앉힌 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풀어 살살 손가락으로 빗겨 주며 속삭였다.
“그들이 말하길 눈 감은 성녀상의 힘이 너무 강하다고 해요.”
하긴 트레잇을 만들 정도의 기적을 일으키는 물건인데요.
유모의 말에 겨우 숨을 고르던 세리아가 자신의 목을 옷 위로 긁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거잖아.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동을 제어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원래 포근하게, 마치 명화에서 갓 뛰쳐나온 천사 같았던 세리아 대신.
지금은 신경이 날카로워 예민함의 극치를 보이는 모습에 유모가 가슴이 아픈 듯 바라보다가 다시 웃으며 속삭였다.
“그나마 그들이 그렇게나 믿고 있는, 살아 있는 신의 힘으로 반동을 누르고 있어서 이 정도라고 하는군요.”
눈 감은 성녀상에 빈 소원의 난이도에 따라 반동 또한 달라지는 법.
한마디로 세리아가 분수에 넘치는 소원을 빌었기 때문이라는 성신교의 말을 유모는 삼켰다.
타고난 재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나에 대한 재능을 가지려면.
몸이 마나에 예민한 종족으로 변화해야 할 만큼 세리아가 재능이 없어서 이리 된 것이란 말을 차마 어찌 하겠는가.
“그럼 뭐야. 계속 이렇게 지속된단 소리야? 유모도 알잖아.”
황족의 조건은 순혈 인간.
그런데 타고난 태생이 순혈이면 무엇 하나. 지금 변해 가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괴물인데.
찌익.
세리아가 강박적으로 목을 긁자 손톱에 레이스가 걸려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에 유모가 세리아의 손을 잡고 그 자수정색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황태녀님. 뭐가 그리 두려우세요. 폐하께서는 이미 국정에 손을 놓으신 지 오래. 사실상 황태녀님 아니면 이 나라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을 텐데요.”
“하지만…….”
“성신교. 그들의 말로는 제대로 된 종교로 공인된 후 신앙이 늘어나면 반동을 제어하는 힘도 커질 거라고 했답니다.”
유모의 말에 세리아가 고개를 스윽 옆으로 기울였다.
“…그래?”
“네. 그러니 황태녀께서 제대로 제국의 국민들에게 이 나라의 다음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 주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성신교를 만신전에 속한 다른 종교처럼 이단이 아닌 제대로 된 종교로 공언한 뒤 그들의 세력이 늘어나면.
“신은, 믿음을 먹고 존재하는 만큼 신도가 많을수록 강대하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어중간한 종교는 만신전에 어떻게든 속하려고 했다.
만신전 자체에 보내는 믿음을 나눠 마시기 위해.
신은 분명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함이나 그를 믿는 신도가 없이는 오래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성신교의 그 살아 있는 신이 강해질수록 황태녀님에게 온 반동 또한 사그라질 테니 염려 마세요.”
“…그래, 그렇겠지. 맞아. 유모.”
불안정해 보이던 세리아가 숨을 고르며 끄덕이는 모습에 머리카락을 다시 묶어 준 유모가 속삭였다.
“좋아요. 이제 전 축제 때 입으실 드레스를 몇 벌 가지고 올게요.”
유모가 드레스를 가지러 나간 사이 세리아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부서진 거울로 향했다.
마치 거미줄처럼 여러 갈래로 깨져 겨우 아슬하게 붙어 있던 거울 앞에 서니 세리아가 수십 명으로 보였다.
그중 가장 큰 조각으로 세리아가 몸을 기울여 목을 드러냈다.
찢어진 레이스 사이로는 살갗 위로 올라온 비늘이 어렴풋하게 촛불의 빛으로 번들거렸다.
어두운 암녹색 비늘에 콕콕 찍힌 황색 반점.
그에 세리아가 얼굴을 구기며 몸을 돌렸다.
* * *
“정말 가실 겁니까?”
“가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하이 엘프의 장로. 바하디의 물음에 가뮈르가 느리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본디… 세계수의 의자를 떠나지 않으셨잖습니까.”
바하디는 가뮈르가 앉아 있던 나무 의자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씩 자리를 뜨는 순간은 있었으나 말 그대로 잠시였다.
원래 오래 사는 하이엘프 중에서도 유독 장수한 가뮈르였다.
그는 멀쩡해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생명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저 의자가 아닌 곳에서는 언제 쇠약해질지 모르는 상태.
“그런데 인간들의 제국으로 가신다니요.”
바하디가 미간을 모았다. 원래도 타 종족에 배척적인 게 엘프족.
그중에서도 하이엘프는 더했다.
그나마 요정의 나라 아리나이드에 존재하는 정령의 숲까지 오는 이들은 대부분 학구열이나 탐구심 때문에 왔다.
그러니 그런 그들은 존중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다른 종족을 잠재적 노예 취급이나 하는 인간족 자체를 좋아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바하디도 마찬가지.
하물며 순혈의 인간 외에는 제대로 된 귀족 취급도 안 하는 테이트리아의 수도로 가겠다니.
엘프의 대장로인 가뮈르도 그들에겐 한낱 아인족에 불과하다는 취급이나 받을 게 뻔했다.
“아는 것이 없고 어리석은 이들이 가득 찬 곳입니다. 그런 곳에 어찌하여 가시려는 겁니까.”
바하디의 말에 가뮈르가 느리게 웃었다.
“아델리안 공자가 놀러 오라는군요.”
“예?”
그가 종종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노센트라고.
“같이 모여 밥도 한번 먹고 인사도 나누면 재미있지 않겠냐 하고 세이렌으로 말을 하는데.”
인식 저하 배지를 서로 나눠 가지면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있지 않겠냐더군요.
하고 가뮈르가 말했다.
“그 무슨…….”
그에 바하디가 더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가뮈르가 설득되지 않을 것을 느꼈는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몇백 년 만에 타국으로 가는데 그게 테이트리아이고. 거기에 수도라니…….”
다른 엘프들이 알면 죽을 각오로 말릴 거라며 고개를 젓자 가뮈르가 입을 열었다.
“잠시 바하디. 그대의 샘에서 쉰다고 하면 될 것입니다.”
그에 바하디가 이마를 매만지다가 준비하겠다며 방을 나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부드럽게 바라보던 가뮈르는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대리석 조각 같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나무 의자를 매만졌다.
“아주 오랜 시간 이곳에 앉아 기다렸죠.”
진실 너머.
그 비틀린 편린들을 하나씩 하나씩 모아 퍼즐처럼 맞추면서.
너무나 엉망으로 흩어진 것들을 누더기처럼 끼워 맞춰 낸 거짓과 진실들.
“내가 본 것들을 언젠가는 부정하기 위해.”
세계수의 의자에 앉아 억지로 숨을 늘려 가며 기다려 온 시간.
“그런데 정말 빈틈으로 들어온 이를 만났으니 더 이상 억지로 숨을 쉴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기다리던 이를 만났으니, 이 의자를 오래 벗어날수록 수명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서.
고작 몇 년만 남겠지만.
‘그 정도면 충분할 테니.’
그러니 그곳에 가는 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어차피 우리를 가축처럼 부리던 이는 나를 보아도 신경 쓰지 않을 텐데.
“운이 좋았던 겁니다.”
이번에 가뮈르 자신이 비틀린 진실에 눈을 뜬 것은.
다음의 가뮈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끝이 나겠죠.
천운이었습니다.
수많은 저 중 지금의 내가 이 순간 이곳에 있는 것이.
“이번의 바하디는 조금 더 즐겁게 살면 좋을 텐데요.”
몇 가지의 파편 중 대부분은 비공정에서 몰려나온 골렘으로 멸망하지 않았던가.
지금 이 숲에 있는 모든 생명이 아델리안 덕분에 여분의 삶을 누리는 중이니.
고작 인간의 제국으로 가는 것이 뭐 어렵겠는가.
“그나저나…….”
정말 친목만을 위해 부르는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지.
가뮈르는 세계수의 잎을 우려 만든 차를 한 모금 입에 넣어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