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283)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283화(283/373)
오러, 혹은 마나. 아니면 신성력이나 정령력이라도.
어느 것이건 일정 경지에 오르는 순간 누구나 자신의 한계를 가늠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한 걸음 한 걸음 뛰어넘으면 그것이 격이 되는 법.
하지만 만약에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면 어찌 될까.
경지에 닿은 검사가 검을, 마법사가 마법을 기억에서 지운다면.
올라갔던 그 격 또한 내려갈까.
케인은 그것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생각했다.
격이라는 것은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아티팩트와도 같은 이치였다.
사용법을 잊었다 할지라도 최소한의 기능은 풀려 있는 법.
그러니 케인 자신이 검을 단 한 번도 쥐지 않았던 순간이 쥐었던 순간의 몇 배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잊었던 것을 되찾듯 강해졌던 거겠지.
‘많아.’
케인은 감았던 눈을 느리게 떴다. 들불처럼 번지는 기억은 엉망으로 뇌리를 잠식해 간다.
하지만 익숙하게 그 빛바랜 기억 자체를 공간처럼 분리한 뒤 숨을 흘렸다.
영혼의 일부분을 격리 및 분리. 그리고 시간의 미세한 흐름까지.
가낙스에게서 이어받은 트레잇으로 잠도 자지 않은 채 방 안에 틀어박혀 연구한 결과 케인은 결국 자신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분을, 혹은 원하는 내용만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 들은 동화나 자기 직전 흥얼거리던 자장가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기억과 같이 대중이 없었다.
혹은 지난밤 꾼 꿈이 어렴풋하게 잔상만 남은 것처럼.
앞뒤로 맥락도 없이 떠오르는 단편적인 것들.
하지만 그 떠오르는 순간순간을 케인은 전부 기억한 뒤 뇌리에서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다양하군…….’
순서가 엉망인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것이 떠올랐다.
인간과 닮았으되 인간이 아닌 이들로 가득 찬 대지.
혹은 디딘 땅조차 붉게 녹아 흘러내리는 화염지옥과도 같은 풍경.
수많은 마물과 마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침략한 형상.
혹은 모든 지역이 물에 잠겨 땅 대신 배를 거주지 삼아 뭉친 모습까지도.
흘러나오는 기억 대부분은 비슷하나 한 번씩 너무나 뒤틀린 것들이 튀어나왔다.
가끔은 그 어둡고 축축한 땅 아래에서 흑마법사를 찌르지 못하고 죽음으로 끝나는 순간도 있었다.
혹은 마을이 불타 없어지던 날 아주 찰나의 선택으로 나가지 않고 집 안에 있다가 같이 불태워진 적도 몇 번 떠올랐다.
모든 것이 선택의 연속이다. 한 걸음 늦게 걷거나 반대로 걷거나.
오른손으로 물잔을 쥐면 반격하지 못해 바로 잡혀 팔렸고.
왼쪽으로 물잔을 쥐면 오른손을 휘둘러 반격한 뒤 도망치는 운명의 갈림길들.
어떨 때는 제법 나이가 들어 버린 기억 속에서도 혼자였고.
어느 곳은 지금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시절에 지금의 일행과는 다른 이들과 만나는 순간도 있었다.
장검이 아닌 단검을 쥐는 일이 많았다.
모험가가 아닌 암살자가 되어 기계처럼 위에서 시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다 도망치기도 했었다.
온 대륙에서 케인 자신 외의 생명체는 전부 사라지고 무표정한 군집체인 제로와만 남았던 순간 자살한 기억도 떠올랐다.
지금도 아델리안의 배 위에 엎드려 있을 레비가 아니라 물빛으로 일렁이는 머리칼과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썹이 내려간 눈매.
눈물점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여인이 레비니아라 불리며 전 대륙을 바다로 만들고 해일을 일으켜 모두를 죽이는 모습도.
결국 악신교단이 대륙을 손에 넣고 다른 종족에게 낙인을 찍는 모습까지.
비슷하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망가지고 멸하는 끝을 케인은 수없이 부서진 비늘처럼 잘게 떠올렸다.
그 많은 기억들을, 엉킨 과거를 하나씩 떠올릴 때마다 케인은 자신의 격이 희미하지만 좀 더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쌓아 뒀던 격이 모종의 이유로 봉인되었으나 그것을 조금씩 풀어내는 것과 비슷했다.
확신하건대 케인 자신은. 이미 누구보다도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한 적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수천, 수만.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수없이 다시 살아가며 쌓은 것들을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 되찾는다면.
‘루프를 멈추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당장은 확실하지 않으나 조금 더 시간이 흐른다면 모를 일.
케인은 분리된 영혼, 절개된 상념의 한쪽에서 끊임없이 과거를 되삼키며 그 흔적을 훑다가 탁하게 숨을 뱉었다.
“하지만 넌 없군.”
지금도 두서없이 떠오르는 영혼의 기억들.
그중에 그 어느 것에도 아델리안은 없었다.
* * *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나는 세이렌을 쥐지 않은 손으로 양피지에 적은 이름 중 하나에 줄을 그었다.
‘수인족인 훌라 외에는 어느 정도 다 부르는 게 낫겠지?’
마음 같아선 훌라나 댜미드도 이곳으로 부르고 싶긴 한데.
여긴 테이트리아의 수도니까.
누군가의 소유물이라는 표식의 목걸이나 케이프를 한 수인들에게도 심심찮게 시비를 거는 멍청이들이 있는 곳이다.
이런 곳에 훌라나 댜비드를 초대하는 건 미안한 일이지.
‘그나마 가뮈르와 바하디는 하이엘프이니.’
이곳 수도가 비록 인간이 아니면 다 배척하는 성향이 매우 강하다고는 하지만 하이엘프 정도 되는 종족에게는 그래도 눈치를 보는 이들도 많았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수인족은 노예로 많이 보았으나 엘프나 드워프 같은 경우엔 노예보다도 누군가의 초대로 오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나는 내 손의 열기 덕인지 따끈따끈해진 세이렌 프로토 타입을 아공간에 밀어 넣은 뒤 책상에 엎드렸다.
“돌아가면 베스트이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어느 정도 밑밥은 뿌려 놨다지만… 황제가 악신교단의 본단에 있는 다른 몸으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니 무조건 황제가 교단의 몸쪽으로 돌아가겠거니 하고 믿고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 돌아가지 않는다면 내가 행할 일에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본래라면 샤하드는 아직도 단명 트레잇을 달고 있었을 테고 거기에 다른 트레잇도 봉인되어 있을 테니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샤하드는 내가 세리아의 대항마로 지원을 해 둔 상태였다.
그러니 이번 축제 때 세리아가 대대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게 샤하드가 견제를 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황제가 그런 걸 보면 의아해할 게 뻔하지.
원래라면 빌빌거리고 있어야 하는 녀석이 건강해져서 아마 예상하건대 단 한 번도 없던 사건을 만든다?
나라면 무조건 관심 가질 일이다.
‘그렇다고 샤하드에게 이번에 가만히 지켜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번에 세리아의 계획을 망치는 건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번에 세리아가 두각을 나타내면 권력 균형의 추가 한쪽으로 너무 쏠려 버리니까.
즉, 황제가 악신교단의 본단으로 가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가 들킬 것을 각오해서라도 일을 저질러야 하는데.
‘그럴 바엔 그냥 싹 모아서 한번 치는 것도 방법이지.’
지금 황제는 케인부터 해서 우리 파티에 다른 이들이 합류하면 해볼 만한 상태일 테니까.
악신교단의 본단에 있는 몸이 아닌 황제의 몸으론 능력에 제한이 걸릴 테니 죽이는 것 자체는 더 쉬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다만 루프를 어찌 멈추느냐가 문제였는데 그건 가낙스나 다른 이들이 오면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으니까.
“일단… 사람이 유비무환이라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는 해야 하니 전면전까지는 아니라도 습격 정도는 준비하되.
일이 잘 풀려서 황제가 자리를 비우면 가낙스 등은 그냥 식사 대접 크게 하며 친목을 다지는 자리로 바꾸면 되는 일.
그렇게 되면 제로가 마무리를 잘해 줄 것이다.
<보스.>
엎드려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일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혹은 최악의 상황이 되거나.
소위 말하는 망상을 하던 와중 파이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좀 더 잘 듣기 위해 세이렌을 다시 아공간에서 꺼내 손에 쥐고 입에 열었다.
“무슨 일이지?”
<감시하던 신전 쪽에서 움직인다는 정보가 들어왔어.>
내가 특별히 감시하라고 한 신전은…….
“아아, 에리엘?”
<맞아. 보스.>
정보를 꾸준히 흘린 덕인지 결국 그쪽에서 물었나.
암시장 새벽에서 주로 흘렸으니 다른 신전의 끄나풀이 섞여 있다 해도 주로 그쪽 신관들에게 정보가 들어갔을 터.
하지만 워낙 바사하의 신도 수는 적은 데다 대놓고 활동하는 신관은 더 적으니까.
‘거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에리엘을 그냥 놀리는 건 자원 낭비니까.’
내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도박판으로만 날 밀어넣는 에리엘이긴 한데.
내가 아는 모습은 사실 지금 보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
원작도 그렇고 게임에서도 그렇고.
세 명의 미치광이로 유명했으니까.
메인 파티의 루나. 중립의 에리엘. 악신교단의 카이자.
다른 말로는 혈탐의 루나. 고통의 에리엘. 광기의 카이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루나는 게임에서 멘탈 케어 없이 무조건 전투로 내돌리다가 그렇게 되는 거긴 하지만.
‘에리엘은 그냥 타고난 성향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바사하 종특이라고 해야 하나.
일단 단순히 생각해서 안 그래도 일손이 딸리는데 바로 옆에 있는 네임드를 안 쓸 이유는 없지.
“너무 가까이 미행을 붙이지는 마.”
<명색이 성녀다 이거지? 알아요, 보스.>
“그것도 그렇고… 위험하니까.”
내 말에 세이렌 건너편의 파이얀이 의아한 목소리를 흘렸다.
<보고에 따르면 어려 보이는 소녀라던데, 위험할까? 트레잇이 남다른가, 보스?>
트레잇이란 말에 나는 예전에 메모해 둔 에리엘의 트레잇을 확인했다.
[에리엘 야리카_양면의 신 바사하의 성녀]대표 Traits : [기적S] [고통내성S] [고통전이S]
히든 Traits : [양면S] [언령D]
“남다르긴 한데.”
사실상 저 트레잇 중에 직접적으로 전투 무력에 관련된 트레잇은 없긴 하다만.
그래도 에리엘은 강력하다.
대놓고 붙은 저 기적이라는 트레잇도 사기이긴 하지만 전투에 있어서 크게 발휘되는 건 다른 종류이긴 했다.
<하긴 붙여 둔 정보원이 말하길 어느 사내와 같이 길을 나섰다 해. 그리고 내가 확인했는데.>
그 사내는 우리가 일부러 풀어 준 악신교단의 일원이고.
하는 말에 나는 가볍게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단둘이 나간 걸 보면 그 교단원을 길잡이 삼아서 정보를 확인하러 가는 게 아닐까?>
에리엘이 정보만을 확인하러? 나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무기가 뭔지 확인되었고?”
만약 맨손으로 가는 거라면 간단하게 보고 올 계획일지도 모른다.
<천에 쌓여 있긴 하지만 배틀액스 같다던데?>
그렇다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나 정보 수집만을 목적으로 가는 건 아닐 게 분명하다.
에리엘은 다른 평신도도 아닌 성녀. 그런데 자신의 주 무기까지 챙겨서 나갔다?
허투루 쓸 인물이 아니니 한번 나갈 때 확실한 행보를 보일 터.
‘잘하면 정말 가뮈르와 바하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식사만 대접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본단에 가면 좋겠다. 본단 휘저어 주면 좋겠네. 아니면 하다못해 지부를 완파하는 것도 괜찮지.
내가 아는 에리엘이라면 그게 가능한 능력을 지녔으니까.
“그럼 계속 정보 확인해 주고. 특별한 일이 생기면 다시 연락 부탁해.”
<알았어. 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