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284)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284화(284/373)
운명의 신 르웰르의 성녀 마리안느.
그녀는 파이얀에게 가르침을 내린 후 아델리안에게 쓸모를 증명한 덕에 얻어 낸 방에서 한참이나 기도하던 와중 느리게 눈을 떴다.
‘비틀린 진실의 계시.’
마리안느는 자신의 트레잇 중 하나를 떠올렸다. 방금 벼락같이 뇌리에 파고든 장면이 바로 그것이므로.
“처음… 있는 일이야.”
무언가 오늘 크게 바뀐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델리안을 만난 후 정해진 미래가 점점 비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종종 보였지. 거대한 것들이. 수인족과의 전쟁도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었고 기근과 기아.
사람끼리의 다툼 또한 보이지 않던 순간도 많았으나 보이던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방금.
모든 미래가 엉키기 시작했다.
그전엔 이미 정해진 것들을 아무렇게나 뽑아서 신이 내려준 것 같은 감각이었다면 이제는.
“…모르겠어. 아무것도.”
비틀린 진실의 계시는 말 그대로 지금까지 몇 번이고 되돌던 이 세계의 진실을 비틀린 시간대로 보여 주던 것.
하지만 그것이 멈췄단 소리는 오늘 이후로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반복되던 것이 일부 사라진단 의미였다.
“르웰르이시여…….”
마리안느는 제대로 응답해 준 적 없는 자신의 신을 부르며 기도하듯 손을 모아 눈을 감았다.
* * *
깊은 동굴 속, 어둠으로 칠해진 곳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보였습니다.”
부드럽고 앳된 목소리.
그 목소리에 으뜸 부족의 족장 중 하나가 마른침을 삼키며 어둠 속에서 눈을 껌뻑였다.
“무엇이 말이요.”
“종결자.”
타박타박하는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걸어 나오는 소리.
하지만 이상하게도 발자국 소리가 여러 개로 울려 번졌다.
동굴의 안쪽에서 입구로 걸어 나오는 소리에 으뜸부족의 족장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숙였다.
“종결자라면… 훌라와 붙은 그 인간 말이외까.”
난 그자를 믿지 않소. 그자는 인간이오. 그리고 훌라는 그 인간에게 붙은 배신자. 부역자나 다름없지.
그렇게 말하는 부족장에게 동굴 안쪽의 누군가가 웃는 소리를 흘렸다.
“그러지 마세요. 그는 확실하게 우리를 도울 사내이니까.”
“하지만. 그는 인간이오.”
인간놈들이 얼마나 더러운 족속들인지 예언자. 그대는 모르오.
“아이를 납치하고 가축을 죽이고 성인은 불사지르지.”
우리를 같은 인격체가 아닌 말 못 하는 짐승 취급을 하며 어떻게든 이용하려 드는 이들이오.
“챠비드로 들어오는 물길을 더럽히고 사막이 넓어지는 것도 그들의 소행이란 말이 있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듯 웅크리면서도 그렇게 으르릉거리며 말하는 족장의 목소리에 예언자가 가늘게 웃었다.
“하지만 결국 그가 모두를 안식으로 이끌어 줄 거예요. 종결자니까.”
주춤주춤.
고개를 숙여 뒤로 물러나는 것도 잠시.
어느덧 동굴 밖으로 나온 으뜸부족의 족장은 호랑이 수인의 모습으로 날카로운 손톱을 숨기고 꼬리를 늘어뜨린 채 으르릉거렸다.
“하지만.”
“쉿.”
그리고 뒤늦게 따라 나온 예언자의 창백하리만큼 하얀 손이 노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족장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저를 믿으세요.”
천천히 예언자가 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하얀 뿔과 하얀 머리칼. 그리고 붉은 눈동자.
상반신은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모를 어린아이의 모습이었고 하반신은 하얀 사슴이었다.
그는 네 발에 달린 하얀 발굽으로 바닥을 톡톡 쳐 돌을 고르더니 네 다리의 무릎을 굽혀 사슴 몸의 배를 깔고 앉으며 수더분하게 웃었다.
“저를 믿으세요, 그리고.”
헤쉬를 데려오세요.
예언자의 말에 호랑이족 사내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게 누구입니까.”
“가족 무리 중 토끼족의 사내와 표범족 여인이 이룬 가족이 있어요.”
제피, 케피. 샬롬.
“그런 이름의 아이와 더불어.”
헤쉬라는 아이가 보여요.
“그런데 얼굴엔 표범무늬가, 귀는 토끼귀를 가졌죠.”
“하이브리드.”
수인족들 사이에서도 제법 드문 혈통이다. 호랑이족 사내가 자신의 뺨을 긁으며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왜.”
“당신의 제자가 될 아이니까요.”
천천히 해가 진다. 오래 빛을 보면 안 되는 예언자는 일부러 이 시간을 맞춰 나왔다는 듯 석양 쪽을 응시했다.
“운이 좋다면 우린 아무 일 없이 지나가겠죠.”
하지만 만에 하나 종결자가 서두르거나 성급하다면.
“뒤늦게라도 도울 손은 필요하니까.”
가장 높은 확률의 미래를 보고 예언하는 것이지 그 예언이 무조건적이지는 않으므로.
예언자가 아직은 어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오늘 한 가지 큰일이 저 먼 곳에서 생겨날 거예요.”
그걸 여기선 저 혼자만 보다니 아쉽게 되었어요.
무슨 말인지 궁금한 듯 슬쩍 다가오는 호랑이족 족장을 바라보며 예언자가 느리게 웃었다.
* * *
“어떻게 그런 곳이… 있을 수 있죠?”
에리엘은 창백해진 얼굴로 살짝 떨며 말했다.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긴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만큼만 믿고 살아가니까.”
이 세상에는 심연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고.
자랑처럼 말을 내뱉는 사내를 보며 에리엘은 몸서리를 쳤다.
‘괴물… 악마.’
저런 이들이 바로 악마요, 악귀겠지.
“…믿을 수 없어요.”
에리엘의 말에 이제는 탈교했다는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신교는 그런 곳이야. 아가씨도 만신전의 신관이니 알겠지만…….”
이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지.
과거 기록에 의하면 신과 직접 대화하는 이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은 내려받는 신성력 외엔 없지 않냔 말이야.”
하지만 우리의 신은 그런 죽어 나자빠진 신들과는 달라.
실제로 존재하며 살아 있는 신.
“죽은 자를 일으키고 재물을 내려주며 재능까지 일깨워 주시지.”
대신 그만큼 강한 믿음과 신앙, 그리고 제물을 바쳐야 하지만.
“이 세계는 그릇 같은 거야.”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은 한정되어 있지.
그리고 우리의 신은 그릇을 혼자서도 가득 채울 수 있는 분.
그러니 그릇이 깨지지 않게 하려면 어찌 해야겠어?
“필요 없는 물들을 버리고 그릇을 단단하게 만들어야 하지.”
그릇에 자리만 차지하는 필요 없는 잉여. 그 물 한 방울 한 방울을 우리가 도려내는 행위 자체가 그릇을 단단하게 만듦과 동시에 자리를 만드는 것.
에리엘은 사람들을 죽이고 인신공양을 한 이유를 그리 합리화하는 사내를 보며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에리엘의 말에 사내가 태연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서?”
“네?”
“그만큼 가치 있는 일에 목숨을 걷어갔으니 그들의 삶은 구원받았을 거야. 그리고 중요한 건.”
우리의 신께서 원하신다면.
예를 들어 새로운 낙원에 손이 부족하다면 다시 살아나겠지.
“그들은 선택받은 거야. 고작 며칠의 고통을 버티고 죽은 것으로 살아 있는 신, 그분께 귀속되었으니까. 그 말은 언제건 그분께서 원하면 이 세상에 되돌려 놓을 수 있다는 거지.”
새로운 세상. 낙원이 오면 성신교의 모든 교인은 오롯한 인간으로 천하디천한 다른 종족들을 부리며 관리자로서 세계를 꾸릴 것이다.
견족이 호위를 하고, 인어족이 언제나 노래를 부르며, 조인족이 편지와 물건을 나르고, 엘프는 시중을 들 것이며, 드워프는 인간을 위한 물건을 만들고, 드래곤은 교인들을 수호하는.
그런 완벽한 세상.
“그들이 날 버리고 가지만 않았어도.”
나는 용서했을 텐데.
하지만 날 버리고 간 순간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낙원도 망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사내가 붉은 흔적이 남은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후후. 그들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본단이 쑥대밭이 되어 있으면 그 표정이 볼 만할 거야.”
살아 있는 신, 그분은 어차피 자잘한 일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분이니까.
본단이 다 타버린다 해도 나서지 않을 터.
사내가 홀로 중얼중얼거리며 걷자 그 뒤를 에리엘이 따르며 올라오는 욕지기를 삼켰다.
어찌 그토록 잔인하게 공물을 받는 이가 신일 수 있을까.
악마에게 인신공양하는 흑마법사만큼 더러운 자들.
에리엘은 지하통로로 내려가는 사내를 따라 계속 걸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국경의 어딘가.
그곳에서도 한참이나 외진 곳을 걷고 지하를 헤매고 산을 뛰어넘어서야 갈 수 있는 곳.
성신교의 본단은 보통 사람은 우연히도 찾을 수 없는 은밀한 곳에 세워져 있었다.
“저곳인가요.”
“그래. 이제 내가 아가씨를 데리고 들어갈 거야.”
그냥 막무가내로 들어갈 수는 없어.
저리 보여도 온갖 마법과 신성주문으로 보호되는 곳이니까.
하지만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정말 부활 의식이 가능한 곳인지 확인하러 온 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넘어가겠지.
그런 경우는 많거든.
사내가 히죽히죽거리며 중얼거렸다.
“개중 몇몇은 그분을 만나지 못하고 우리 선에서 돌려보내지기도 하지만.”
가진 게 없으면 굳이 그분을 우리가 뵙게 해 드릴 필요가 없잖아?
하며 사내가 엄지와 검지로 원을 그리며 흔드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인형줄에 걸어 흔드는 것처럼 기묘했다.
에리엘은 묘하게 망가진 듯 초점이 나간 사내의 눈을 바라보았다.
분명 사내가 말하는 것들은 성신교에 대한 미련이 묻어나나 그 눈은 이미 죽어 있는 게 이상했지만.
‘미쳐 버린 거겠지.’
보통 사람이라면 제정신으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사내가 문을 지키는 이에게 돈을 주며 에리엘을 흘긋 보면서 무언가 속삭이니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에리엘이 등에 매고 있던 대형 양날도끼의 천을 풀어 휘둘렀고 문지기의 목이 그대로 허공으로 치솟았다.
“하학, 하하.”
에리엘과 같이 온 사내가 품속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더니 발화석을 한 움큼 쥐고 뿌리기 시작했다.
“이걸 누가… 줬더라. 알 게 뭐야.”
이따가 다 불타오르라고.
아공간에서 기름과 발화석을 꺼내 여기저기에 뿌리며 사내가 휘청휘청 한쪽으로 걸어 나갔고 에리엘은 그런 사내를 버리고 느리게 안으로 걸었다.
뒤쪽에서 이윽고 펑!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는다.
등 뒤가 덥게 그을리는 기분.
그에 에리엘이 도끼를 굳게 쥐는데 무언가 터지는 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이들이 에리엘을 보자마자 일단 검부터 휘둘렀다.
“일단 죽여! 죽이고 나서. 으악!”
“컥!”
‘고통전이.’
에리엘이 지금껏 자신이 받았던 고통의 일부분을 그들에게로 떠넘겼다.
달려오던 그대로 엎어져서는 몸을 경련하며 뒤트는 그들의 머리를 도끼로 콰직 찍으며 에리엘은 고개를 들었다.
이제부터 누군가가 일정 범위 안으로 에리엘에게 다가오면 고통받는 것이다.
회초리로 수백, 수천 번을 살갗이 터지도록 맞는 고통부터 불에 살갗이 타고 돌에 찧어지며 가시에 찢기는 고통.
한겨울에 차가운 물 속에 웅크리는 고통과 바늘로 온몸을 찔리는 고통들이.
‘고통내성’으로 에리엘은 반감되었던 그것들은 ‘고통전이’로 타인에게 증폭되어 번질 것이다.
그 고통을 참고 다가오는 이들은 도끼로 몸이 썰려 나가겠지.
“저 계집은 누구냐!”
“당장, 크헉!”
뛰어오던 이들이 마치 유령이 배에 칼을 꽂기라도 한 듯 쓰러져 몸이 뒤틀리는 모습에 몇몇은 뒷걸음을 친다.
에리엘은 천천히 걸어 바닥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을 도끼로 목을 내려치며 튀는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
“바사하 신이시여.”
저들에게도 선한 양면이 있습니까?
제게 악한 면이 있는 것처럼.
에리엘이 피 묻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