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308)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308화(308/373)
나는 저 멀리 가는 테이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맞는 말이네.
쳐 맞는 말.
어딜 그럴싸한 궤변을 지껄여.
이곳의 인간들이 어떤 취급을 받으며 어떤 고통을 겪는지 나도 봐서 알고 있다.
물론 내가 직접 겪은 게 아니니 내가 배부른 소리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근데 말이야.’
인류의 해방, 뭐 인간들의 희망. 다 좋은데.
그건 셰인이 전부 짊어져야 해결되는 일은 아니다.
셰인이 가능성을 타고났다고 강제로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해야 한다는 법은 없는 거였다.
셰인도 셰인 나름대로 도움이 되기 위해 필사적이고 실제로도 많은 도움이 된다.
물론 가장 효율적인 건 셰인이 검 같은 무기를 잡는 거겠지.
그런데 셰인이 고통스러워하건 말건, 피를 보고 힘들어하며 누군가를 죽이는 것으로 죄책감에 괴로워하든지 말든지.
그냥 선봉에 세우면 이 세계가 알아서 바뀌나?
고작 셰인만으로?
‘그럴 리가 있나.’
그렇게 치면 셰인 대신 테이가 더 강해져도 되는 거 아닌가.
이곳은 마법이란 게 존재해서 식사도 포션 하나로 때우고 잠도 포션으로 때우며, 자지도 먹지도 않고 싸울 수 있는데.
물론 반동으로 단명하겠지.
그런데 미리 자유로 풀린 인간들이 전부 수명 깎아서 광폭 물약 먹고 하면 5년 안이 뭐야, 5년 전에 인간들이 승리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물약 먹고 싸운 이들은 싸그리 반동으로 죽었겠지만 몇만의 희생으로 백만 이상의 인간이 노예에서 풀리면 그게 바로 효율 아닌가?
‘너도 그렇겐 못 할 거잖아.’
테이 본인도 그렇게 못 할 거면서.
굳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지금처럼 할 수 있는 걸 해 가면서, 서로 힘내자고 말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그냥 셰인을 탓하며 너만 도왔으면 더 쉬웠다고 뒤에서 저럴 필요 없이.
그걸 테이도 아니까 정말 셰인을 윽박지르지 않는 것이다.
본인도 그냥 욕심인 걸 아니까.
누군가는 테이의 말이 맞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가 잘 모르지만 이런 걸 공리주의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다수의 행복이 한 명의 불행보다 값어치 있을 수 있지.
‘그런데 난 공리주의자가 아니니까.’
셰인이 아니라도 케인이 있다. 그리고 테이도 강하고 다른 자유인들도 전부 강력한 트레잇을 지니고 있지.
셰인이 독보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자질이 있단 거지 다른 이들이 약한 게 아니다.
거기에 셰인의 멘탈까지 생각한다면, 과연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지닌 셰인을 다만 가능성만으로 내몰 필요가 있냐는 소리였다.
“고맙, 고맙소…….”
“덕분에 아프지 않아.”
“다시는 앞을 못 볼 줄 알았는데. 다행이야.”
“전부 조심하세요. 다치시면 안 돼요. 아셨죠?”
셰인이 주둔지로 돌아와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치료하느라 바쁘다.
충분히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하고 있다.
나는 셰인을 한 번, 그리고 저 멀리서 물자를 나르는 테이를 한 번 바라보았다.
비록 셰인이 전투에 나서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하긴 해도 테이가 아주 나쁜 놈은 아니었다.
물론 현재까지만 놓고 봤을 때 말이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도대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테이는 살아 있는 신이 되어 세계를 계속 루프하는가.
왜 셰인을 그렇게 만들고 케인의 영혼을 바스라뜨리려 하는 걸까.
‘왜, 어째서.’
잠시 생각하는 동안 세계가 일렁거린다.
어, 이런 건 처음인데?
잠시 세상이 멈추는 듯하더니 내가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물속에서 올려보듯 시야가 흐려졌다가 되돌아온다.
‘뭐지.’
나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내렸는데 순간 깜짝 놀랐다.
‘심장이야…….’
케인이 바로 앞에 있어서 진짜 와, 너무 놀랐네.
몸이 부딪힐 리 없다는 건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슬쩍 옆으로 비키니 케인이 내 뒤의 무언가를 보고 있었던 듯 시선을 돌리다 걸어간다.
그리고는 셰인이 들고 있던 피 묻은 빨래 바구니를 대신 들었다.
* * *
케인은 방의 문을 열었다. 한쪽에 마법 램프가 아주 약한 밝기로 켜져 있고 아이보리색 커튼이 내려져 있다.
아늑해 보이면서도 조금은 어두운가.
하지만 이젠 밤도 낮처럼 볼 수 있는 케인에겐 의미 없는 일.
종종 들어오면 물건이 한두 개 어질러져 있던 책상 위가 꽤 깨끗하다.
고작 메모로 보이는 종이 한 장 정도.
그리고 침대에서는 아델리안이 그 고대 요정의 언어로 된 서적을 안고 옆으로 누워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아델리안.”
식사를 위해 깨우려고 다가가나 대답이 없다.
보통은 바로 일어나진 않아도 살짝 뒤척이긴 했을 텐데, 숨도 심장 박동도 고요하다.
깊게 잠든 모양. 종종 새벽에 다른 이들과 회담할 때 듣던 것과 같은 소리.
“아델리안.”
한 번 더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 가볍게 어깨를 잡고 흔드는데 잠에서 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 이상한 감각에 케인이 슬쩍 마나를 집어넣어 확인했지만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혹 독이나 마법일까 했지만 정말 말 그대로 너무나 깊이 잠든 상황.
‘이상하군.’
하지만 이토록 깊게 잠든 적이 있었나.
문득 아델리안을 더 흔들려다 말고 케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아델리안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메모지가 쉭 하고 날아온다.
그것을 읽은 케인이 미간을 좁혔다.
강제로 깨우려고 하자면 깨울 수 있을 것은 같다.
하지만 정신적인 일이 엮여 있으니 자신보다 더 적합한 이가 있지.
“일단 하루가 지나지 않았으니.”
아델리안이 최소한으로 기다려 달라고 한 시간은 이틀.
하지만 케인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지켜 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고자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체이서.”
케인이 세이렌으로 체이서를 부르며 아델리안의 방에서 걸어 나갔다.
* * *
수도와는 다른 뜨거운 볕과 짠 내가 섞인 습한 바람.
약간 비린내가 섞인 것 같으면서도 상쾌한 공기다.
분명 계절은 겨울이 다가오는데 남해는 언제나 여름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샤하드 님, 이 중요한 시기에 남해 군도까지 온 게 맞는 일이겠습니까?”
샤하드는 손차양을 만들어 그늘진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다 이옐의 말에 웃었다.
“당장은 수도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건 아니니까.”
이노센트의 일원들은 대부분 거물이라 아무리 황자라고는 해도 약속을 미리 정하는 게 맞는 일이다.
거기에 축제 기간이고 축제를 즐기기 위해 온 게드만 대공 부부를 비롯해 다른 이들을 방해할 필요는 없는 일이지.
“그들은 축제가 끝난 후 만나도 좋지. 그리고 당장 날 만나고 싶어 안달 내는 귀족들 중 반은 세리아의 세력일 테고 반은 어중이떠중이일 텐데.”
고작 며칠 남해에 내가 내려와 있다고 무슨 상관이겠냐며 샤하드가 으쓱거렸다.
“오히려 이때 넙죽넙죽 만나 주면 그게 더 얕보이는 짓이야, 이옐.”
샤하드의 말에 이옐이 알겠다는 듯 끄덕이는데 말없이 서 있던 이트가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옵니다.」
이트의 말에 샤하드와 이옐이 고개를 돌리니 물로 흠뻑 젖은 아르만과 부관인 호슈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샤하드 님, 이곳까지 오시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그런데 본가로 급히 내려가야 할 일이 있었어서 말이죠…….
하며 조금 핼쑥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아르만을 바라보다가 샤하드가 입을 열었다.
“좀, 바빠 보이긴 하네.”
“마음 같아서는 경치 좋은 곳이라도 안내해 드리고 싶지만 샤하드 님도 바쁘시니. 일단 이쪽으로 오시길.”
아르만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샤하드가 걸었다. 부둣가의 좁은 나무다리를 건너가더니 남부 제독이 있을 본성이 아닌 조금 떨어진 선착장으로 향했다.
자주 쓰지 않는 것인지 혹은 얼마 전 태풍이라도 온 것인지. 선착장 앞부분은 부서져 있었고 곳곳엔 파편이 널려 있었다.
부서진 파편의 단면이 색이 고르고 단단해 보이는 데다 젖은 부분도 거의 없는 것이 방금 부서진 것 같았다.
“…또 부쉈네.”
“그래서 제가 그냥 수리하지 말자 했잖습니까. 아르만 님.”
“그럼 배는 어찌 승선하고.”
“헤엄쳐서 배로 가 올라타야죠.”
젖은 옷은 갈아입거나 이본에게 말려 달라고 하고.
궁시렁거리는 호슈아의 너머로 바다에서 무언가 스윽 올라왔다.
“어?”
그에 반사적으로 샤하드의 부관인 이옐이 검을 쥐는데 살기를 느끼지 못한 이트가 이옐의 손목을 잡는 순간.
물대포가 날아와 호슈아의 등을 가격하더니 촤악 하고 물이 퍼지며 그나마 좀 말라 가던 호슈아가 다시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변했다.
“마린…….”
손님 오시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건만… 아르만이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끼애액. 뀨아.
기분이 좋은 듯 마린이라 불린 해룡이 배에 호슈아를 올린 뒤 둥둥 떠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창가에서 내려보던 샤하드가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조용할 겁니다.”
호슈아를 제물로 바치고 잠깐의 안식을 확보한 아르만의 얼굴이 퀭하다.
‘어쩐지 얼마 전에 쌍둥이를 출산했다던 기사의 얼굴과 비슷한데.’
“못 볼 꼴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야. 덕분에 해룡이 실존한다는 것도 알았고.”
헉슬리가가 앞으로 더 강해질 거란 정보를 미리 얻은 것도 소정의 이득이니.
샤하드가 술을 섞어 차갑게 만든 과일차를 한 모금 마시며 웃자 아르만이 은색 머리칼을 쓸어 넘긴 뒤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긴히 하실 말씀이란 게 무엇입니까, 황자님.”
“아, 이번… 그곳에서의 회담 때 말이야.”
샤하드가 느리게 운을 띄우니 아르만이 차를 한 모금 넘기더니 입을 열었다.
“여러모로 충격적인 시간이었죠. 그분들을 거기서 다 뵐 줄은.”
아델리안이 능력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모인 인원의 면면이 전부 엄청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며 아르만이 웃었다.
“게다가 황자님도 같은 일원일 줄은 몰랐는데.”
아르만이 장난스레 영광입니다.
하는데 샤하드가 찻잔을 어정쩡하게 든 채로 잠시 아르만을 바라보았다.
“아델리안이… 대단하지?”
잠시 샤하드의 트레잇 중 천재가 빛을 발휘했다.
아르만의 말 저변에 깔린 그 미묘한 뉘앙스.
그 위화감에 샤하드는 일단 맞장구쳤고 그에 아르만이 밖에서 들리는 호슈아의 비명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다들 아델리안을 크루거 가문의 망나니로만 아니까 밖에서 이런 대화를 나눌 이가 없어 답답했는데.”
그나마 이노센트의 일원 중 또래인 샤하드와 대화하니 기분이 좋다는 듯 아르만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 치욕을 감내하면서 뒤로는 이노센트를 관리하고 그분들을 포섭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샤하드 님도 아시겠지만 그러면서 바라는 건 어린애들이나 입에 올릴 만한 대륙의 평화라니.
“조금 아이러니하죠. 그 힘이 있다면, 황자님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공국으로 독립도 불가능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조금 의아한 건 카이만 대공이 아닌 아델리안이 이노센트의 주인이라는 건데.
“그 뒤에 카이만 대공을 만날 기회가 있어서 넌지시 물었으나 이노센트 쪽 일은 전부 아델리안의 영역이고 자신은 정말 협력자일 뿐이라 하시더군요.”
정계의 능구렁이.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가문까지 통째로 삼켜질지 모르니 조심하라며 듣던 카이만 대공의 악명이 무색해질 만큼 깔끔한 느낌의 대화였습니다.
샤하드는 아르만의 말을 들으며 적당히 추임새를 넣었으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겨우 상황을 정리한 다음 샤하드가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노센트의 수장이… 아델리안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샤하드는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헉 하고 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