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320)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320화(320/373)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생긴다고는 하지만.”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도 일어나는군.
카이만이 낮게 중얼거리며 붉은 차를 한 모금 삼키자 가디아가 아이스블루색의 눈동자로 카이만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아델리안의 기사와 친분을 나누는 사이가 되신 거죠.”
가디아, 자신이 알고 있는 카이만은 심계가 깊고 냉혹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듯 가문을 이끌고 연구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가디아 자신에게는 그나마 상냥하기도 하고 다정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델리안에게는 차가우셨지.’
그렇다고 손찌검을 하거나 몹쓸 말을 하진 않았다.
오히려 잘 모를 땐 아델리안을 더욱 애지중지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만큼.
아델리안이 지금처럼 정신 차리기 전, 정말 세간에 퍼진 소문만큼의 망나니는 아니라도 보기에 기꺼운 모습으로 살지 않았던 시간에.
카이만은 아델리안의 악명을 덮어 주거나 옹호하지 않았다.
‘당시엔 그것이 편애라고 생각했지만.’
어린 치기였지.
가디아 자신에게는 많은 의무와 귀족의 자긍심 등을 입에 올리며 누리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것도 있다 했으면서.
유독 아델리안에게는 무른 듯 해 달라는 것은 다 해 주며 그 어떤 의무도 등에 지우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종종 방계의 혈족들이 와 하는 말을 믿었다.
가디아 자신은 죽은 어머니를 닮아 자꾸만 생각나게 하니 높은 수준의 교육을 핑계로 아카데미에 보내고.
아델리안은 아들이니 끼고 산다는 헛된 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 생각했지. 사실인지 아닌지 제대로 더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나도 그냥 원망할 상대가 필요했던 거였어.’
카이만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델리안에게 적개심을 품는 마음을 돌리지 않고 뒀다는 것 자체가 평소의 카이만이 할 일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카이만은 그만큼 아델리안에게 자애롭지 못했단 소리인데.
‘방금 본 것을 생각하면,’
“아델리안의 기사와 친분이라.”
카이만이 찻잔을 내리며 읊었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하긴 당장은 그리 보이겠군.
카이만이 자신의 턱가를 느리게 매만졌다.
“그 전에 가디아. 너는 방금의 일에 있어서 가장 먼저 든 의문이 그것이더냐.”
그 말에 잠시 가디아가 침묵했다.
보통의 사내들과는 달리 불쾌감이나 그런 걸 떠나 근본적인 공포를 일으키는 사내.
아델리안이 거둔 평민 기사이자 아델리안의 호위.
‘케인.’
이상하리만큼 그와 마주하면 공포심과 더불어 마치 무언가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 날에 카이만이 밤새 정리한 서류에 잉크를 몽땅 쏟은 것보다 더한 죄책감.
그래서 유독 케인과 만날 일이 생기면 피하고 싶고 하다못해 서리 베일을 얼굴에 두른 뒤에나 말을 섞었는데.
‘오늘은, 아니 앞으로 조금 달라질 거 같긴 하지.’
가디아가 입을 열었다.
“그가 한 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설명도 없이. 다만 진실되게 받은 사과.
직감적으로 저 사람은 절대로 이런 것을 쉬이 입에 올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자신이 신념으로 믿은 것으로 인해 행동한 것을 굳이 부정한다는 듯 잘못되었다고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런 케인이란 사내가 가디아의 기억에는 없으나 자신에게 저지른 큰 실수와 더불어 오해한 점에 대해 오늘 사과를 하러 온 것이다.
자신의 기억에는 없다.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고 운을 띄우기엔 너무나도 무겁고 진중한 태도.
그리고 더욱 이상했던 건.
‘그 이후 몸의 떨림과 공포가 멈췄지.’
케인의 말을 듣는 순간 뭔가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게도.
“저는 모르는 이야기를 뱉었죠. 하지만 가주님께서는 알고 계시던 것 같아 여쭙는 겁니다.”
마치 암호와도 같은, 혹은 같은 숫자의 페이지를 읽으나 그 책은 다른 느낌의 서로 통하지 않는 소통 속에서.
가디아 자신은 몰라도 카이만은 그 사과가 어디에 근거했는지 알아챈 것만 같았다.
‘그러니 저리 기분이 좋으시겠지.’
다른 이들은 쉽게 알아채지 못할 테지만 가디아는 알아보았다.
조금 더 부드러워진 시선을.
‘언젠가부터.’
아델리안도 무감각한 눈이 아닌 저런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니까.
“알고 싶으냐.”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카이만이 잠시간 침묵하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언젠가 아마도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카이만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두였다.
그 어떤 확신도 깃들지 않는 두루뭉술한 내용.
“보답받지도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어찌하냐고.”
그에 가디아가 아주 살짝 미간을 좁혔다.
당연하게 가디아는 망각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므로.
드래곤처럼 태어난 이후 모든 나날을 기억하진 못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내가?’
카이만이 익명으로 누군가를 후원하거나 빈민들을 구제하는 것에 크게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아무리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이라도 저런 말을 입에 올렸을 리 없을 터.
“제가 말인가요.”
가디아가 그리 묻자 카이만의 푸른 눈동자가 느리게 응시했다.
“그랬었지. 그리고…….”
잠시 카이만이 어떠한 기억이라도 더듬는 듯 말꼬리를 늘렸다 다시 말을 이었다.
“결국 누군가가 알아주지도 보답해 주지도 않았던 것 같지만. 오늘에서야 바뀌었군.”
“아델리안이 거둔 그 기사가 알아준다 한들 그게 그리도 큰일이겠습니까.”
그 케인이란 사내.
그자가 얼마나 고강한지는 잘 알고 있다.
지금 가디아 자신의 경지로는 끝이 가늠되지도 않을 정도.
그렇다고 해서 그자가 뭐라고 카이만과 자신을 알아주고 보답한단 말인가.
분명 그 사과와 더불어 나눈 말들을 미루어 봤을 때 케인이란 자가 자신들의 희생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자신의 행위를 그자가 뭘 안다고.
가디아가 그런 마음에 되묻자 카이만이 드물게도 낮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렇다면 왜 울고 있지.”
“예?”
가디아가 당황하며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어째서?”
뭐지, 이건.
눈물이다. 전혀 울고 싶은 기분도, 그런 감각도 들지 않았는데.
슬프지도 노엽지도 않은데 왜 눈물이 흐르는 거지.
“부디 이것을 잊게 될 일이 없으면 좋겠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만이 낮게 읊조렸다.
* * *
“다시 말해 보도록.”
“우리의 주적은 악신교단이며 처단해야 하는 존재는 살아 있는 신이다!”
아니잖아. 그거 말하려던 거 분명 아니잖아.
나는 비장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며 말하는 레이첼을 구경했다.
“내 이름을 들었다면.”
“당연하지. 그 악신교단을 처치할 사람은 누구?”
바로 너.
“살아 있는 신을 처치할 사람, 누구?”
바로 너!
하듯 레이첼이 손으로 케인을 가리킨다.
“그러니 네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온 거야.”
그리고 그런 모습을 저 뒤쪽에 옹기종기 모인 드래곤들이 바라보고 있다.
‘드래곤도 눈으로 쌍욕과 더불어 한심하다고 말할 수 있구나.’
못 하는 게 없네, 드래곤.
자기들끼리 아주 조그맣게 뭐라고 속닥거리는 거 같은데 나는 일반인이라서 잘 들리지 않는다.
그에 나는 슬쩍 내 옆에 꼬리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과자를 주워 먹는 레비를 안아 올리며 속삭였다.
“뭐래?”
“레이첼의 이번 유희 목표는 수치사냐고 그러는데?”
아, 말랑말랑하니. 힐링이네.
내가 잠시 레비를 조몰락거리고 있자 케인이 무표정하게 나를 한번 바라보다가 스쳐 간다.
한동안 꿈에서 다 큰 케인을 보다가 지금 케인을 보니 앳되네.
‘역시 키는 좀 더 자라는 게 맞는 듯.’
거의 제로 정도?
처음 봤을 땐 나보다 작았는데. 이래서 유전자가 중요한 거다.
‘난 왜 안 자라.’
성장판 닫혔니? 원래 내 몸인 강수호만큼은 커야 할 거 아니냐.
내가 한 손으로는 레비를, 다른 손으론 무릎을 쥐는데 소매로 이마를 훔치던 레이첼이 다시 나에게 붙었다.
이번엔 마나장막까지 치고.
“아델리안, 잘 들어.”
케인이 멸망 그 자체다.
잡채로 들린다. 나 지금 배고픈가.
“쟤가 우릴 모조리 죽일지도 몰라.”
닭죽 먹고 싶다.
“너 내 말 듣고 있냐? 어?”
레이첼이 내 어깨를 쥐고 흔드는 것에 저항 없이 흔들려 주며 나는 입을 열었다.
“레이첼.”
“왜.”
“네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진 모르겠지만 그럴 리 없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으면 마땅한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웃으며 손을 내미니 레이첼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린다.
그에 내가 손을 탑탑 위로 올려 치며 이거 말고 종이 같은 거 달라는 듯 눈짓하자 레이첼이 찡그리더니 내 손을 콱 잡았다.
아이고, 레이첼 손 모양으로 내 손이 찌그러지는 거 아닌가.
“잘 봐.”
레이첼이 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마치 빛이 깃든 것 같은 루비 같은 눈동자. 그것의 중앙이 길게 갈라지듯 둥근 동공이 아닌 파충류의 세로 동공이 열린다.
그리고 순간 내 머릿속으로 무슨 이미지가 스쳤다.
레이첼의 악몽에서 보았던 그것.
그리고 내가 몇 시간 전까지도 보았던 그곳.
드래곤들이 추락하고 붉은 피가 강처럼 흐르다 증발하듯 사라진다.
그 피들은 화살이 되어 대지를 디딘 아인족들에게로 비처럼 쏟아지고 엘프들이 쏘아 낸 화살은 거대한 마법 방벽에 막힌다.
로브를 입었지만 손이 그림자로 얼룩진 저거는 체이서일 테고.
허공에 떠서 마법을 쓰는 금발의 사내는 테이트리아고.
검을 들어 무표정하게 드래곤의 심장을 가르고 아인족들을 도륙하는 건.
‘케인이네.’
내가 조금 차가워진 눈으로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봤지?”
“봤다.”
레이첼이 케인이 간 쪽을 흘긋 바라보다가 다시 속삭였다.
“내 생각엔.”
케인이 배신하나 봐.
“그 전에.”
방금 내가 본 건 뭔데.
내가 마주 속삭이며 웃자 레이첼이 곁눈으로 뒤를 흘깃한다.
제로가 끌고 온 디저트 트레이에 관심 있는 듯 나눠 먹는 드래곤들을 확인한 뒤 레이첼이 입을 열었다.
“쟤들을 그 던전에 다 넣어 봤거든.”
무슨 던전.
아니 바다마녀 던전?
거기에 드래곤들을 떼로 밀어 넣었다고?
그곳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을 보여 주는 거라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쉽게 극복하기 힘들었을 텐데.
물론 한 번 클리어 하고 나면 의미 없으니.
아. 레이첼이 깨워 준 건가.
그럼 중도 포기나 다름없어서 클리어 보상인 정신력 상승 스텟 같은 혜택은 거의 없었을 테지만.
‘다만 악몽을 확인하는 용도로만 쓰였다면…….’
지상 최강의 종족이라는 드래곤에게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순간이 몇이나 될까.
어쩌면 저 드래곤들의 최소 반 이상은 레이첼과 비슷한 순간의 악몽을 꿨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순간 전후 사정을 파악하고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자 레이첼이 내 입을 닫아 준다.
“대부분이 나와 같은 걸 보았어. 아델리안.”
하지만 이게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거라면.
기억에도 없는 과거일까?
혹은 오지 않은 미래를 엿본 것일까.
“과거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게 이상하거든.”
망각의 축복을 받지 않아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것을 기억하는 드래곤들 중 그 누구의 기억에도 없어 알지 못하는 과거라니.
“차라리 예지몽이라는 게 더 맞지 않아?”
워낙 강력한 마나 적응력 때문인지 드래곤들은 종종 그런 꿈을 꿀 때도 있으니까.
“그러니 케인이 멸망을 가져올지도 몰라.”
나는 레이첼을 바라보다가 난처하게 턱가를 매만졌다.
이젠 어쩔 수 없나.
“일단 저들부터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
전술핵무기 여럿과 같은 곳에 있기 좀 그러니까 다른 드래곤들은 보내 놓고.
“그리고 우리 대화가 좀 필요할 거 같아.”
나는 웃으며 레이첼의 어깨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