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328)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328화(328/373)
양면의 신 바사하의 성녀인 에리엘은 동물의 이빨처럼 뾰족뾰족하게 깎아둔 돌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고민했다.
‘이것보다 대사제님께서 채찍질을 해 주시는 게 더 빨리 차지만.’
다른 신의 신전에 급히 볼일이 있어 갔으니 별수 없다.
혼자 고통을 모으는 수밖에.
저번 악신교의 신전에서 지금까지 채워둔 고통을 일부 소모한 덕에 다시 부지런히 채우며 에리엘은 기도했다.
자신을 성녀로 내린 양면의 신 바사하에게 잘하고 있는지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아무런 답이 없었다.
이전 성녀들은 종종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었지만 에리엘은 이상하게도 제대로 된 신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러한 의지를 품고 계시리라 짐작되는 찰나의 깨달음 정도만이 신의 존재를 짐작하게 할 뿐.
‘제가 부족하여 그러시나요.’
양손 모아 기도하던 에리엘이 뾰족한 돌 방석 위에서 일어났다.
무릎과 정강이에서 피가 비치지만 익숙하게 닦아낸다.
어차피 고통 내성의 트레잇 덕에 큰 아픔은 없었다. 받은 고통 또한 언젠가는 고통 전이 트레잇으로 남에게 주게 될 데미지일 뿐.
다만 마음은 쓰렸다.
바사하의 성녀로서 기도하고 공부하며 기다리고 있지만 자신의 숙명이 무엇인지 아직 확신하지 못했기에.
대사제는 무언가 아는 건지 대놓고 교세를 넓히는 것도 아니요, 전면에 나서지도 않는 상태였다.
마치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다른 신전에 잠입해 그곳에서 영향력을 쌓고 암시장 ‘새벽’을 관리할 뿐.
‘하지만 나는…….’
에리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 성녀로 내린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교단에 성녀 혹은 성자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순하게 지닌 신성력의 크기로만 좌우되는 자리가 아니므로.
신이 직접 내리는 자리였고 보통은 마땅한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새롭게 이름을 알린 성녀가 있지 않았던가.
아직 만신전에는 들어오지 않았으나 요즘 들어 폭발적으로 교세가 확장 중인 이노센트.
매우 독특한 교리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다 했던가.
축제의 그 사건 때 에리엘도 광장에서 구경하고 있었기에 기억한다.
은보라색의 긴 머리칼과 몽환적인 분위기, 얼굴을 가린 하얀 레이스 안대는 뭐라고 했더라.
‘보이는 것에 치우치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하던데.’
사람들 말로는 그러했다.
사실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의미를 부여하고 찬사를 쏟아냈었다.
‘하긴 그 정도로 대대적인 봉사와 구휼을 내세운 신은 없긴 했지.’
그날 이후로 종적이 사라지긴 했지만 아직 제국의 수도에 머물러 있을 거라는 게 중론이었다.
소문으로 들어 다른 성녀들이 더 있음은 알고 있지만 지금 에리엘에게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건 이노센트의 성녀인 리온이다.
‘만나면…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모든 궁금증이 해결되지는 않아도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분.
어쩐지 그 예감이 평소보다 선명함은 혹 신이 내린 계시일까.
“어디서 찾지?”
무작정 나가 봐야 만날 수 없을 텐데도 마음이 술렁거린다.
에리엘은 내키는 대로 나가려다 문득 문 옆에 달린 작고 둥근 거울을 바라보았다.
부스스한 하늘색 머리와 푸른 눈동자.
그러고 보니 하의의 무릎 아래로는 핏자국도 묻어 있지 않은가.
에리엘은 급한 대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슥슥 빗은 뒤 손에 신성력을 둘러 옷을 탁탁 털었다.
시들고 햇볕에 바싹 마른 장미 같던 핏자국이 옷에서 사라진다.
부스스한 머리도 조금은 가라앉은 듯 보였다.
‘일단 나가보자.’
집안에 틀어박혀 기다린다고 그 성녀가 문을 두드리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당장이라도 나간다면 집 안에 있는 것보다는 만날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바사하신은 양면의 신이자 동전의 신.
동전이라 하면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그중 확률도 있지 않겠는가.
에리엘이 막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울렸다.
“…어?”
이 집을 아는 이는 대사제 외에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사제가 노크를 할 리도 없지.
잠시 문고리 앞에서 멈춘 손이 허공을 배회했다.
똑똑똑.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
재촉하듯 빠르지도 무언가 의미를 넣은 큰 소리도 아닌.
지금 문 뒤에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알리듯 가벼운 소리다.
살기도 악의도 느껴지지 않는다.
에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에리엘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모습에 잠시 머뭇거렸다.
분명 환한 낮인데도 빛을 깊게 빨아들이는 것 같은 감청색 머리칼과 오색 빛이 아른거리는 진주색 눈동자.
얼핏 보면 평범한 외모지만 뜯어볼수록 점점 아찔함이 피어오를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다.
“마리안느예요.”
자신을 마리안느라 소개한 여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와인과 샌드위치, 그리고 컵케이크가 든 피크닉 바구니를 보여준다.
“제로 씨에게 부탁해서 받아 온 건데, 아직 점심 전이죠?”
“네? 네.”
제로는 누구지, 저 사람은 누구지?
에리엘이 혼란스러운 듯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를 아시나요?”
조심스러운 에리엘의 질문에 마리안느가 살포시 웃었다.
“그럼요, 우리는 오늘 만날 운명이니까요.”
운명의 신 르웰르의 성녀.
마리안느가 어리둥절한 얼굴의 에리엘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 * *
전염병에 대한 계획도, 챠비드의 수인족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해 전쟁을 일으키려는 계획도 잠시 중단되었다.
정확하게는 이미 해둔 일을 수습하거나 마무리를 굳이 하지는 않지만 진행조차 더 하진 않는 것이다.
더불어 인신 공양마저도.
“대장, 도대체 상부에서 왜 지랄입니까?”
데이지가 짜증 난다는 듯 마법이 걸린 단검을 돌리다 다른 손으로 머리칼을 흩는다.
동굴에서 팀원을 한번 싹 희생시킨 데다 겨우 살아남은 놈이 본단까지 외부인을 데리고 와 사고 친 덕에 변방의 변방까지 밀린 것도 억울한 시점이었다.
최고급 제물로 치는 사람이 아닌, 떠돌이 아인족이나 몬스터를 잡아서 공양하는 일은 교단 내에서도 가장 인정받지 못하는 일 중 하나.
그에 멕켄과 데이지는 안 그래도 처벌 대신 받은 잡스러운 일을 하고 있던 와중 들려온 소식에 의욕이 아주 싹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글쎄, 본단에 남은 인원에게 전해 듣기론 그분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더군.”
대륙 전역에서 흐르는 무고한 피를 위해 이루어지는 일들을 잠시 멈추라고.
동시에 흩어진 전투 인원을 본단에 모으라 하니.
“본단으로 가면 당분간 공양은 하지 못하게 되는 거지.”
멕켄의 말에 데이지가 단검에 검집을 씌워 그 끝으로 머리를 긁으며 투덜거렸다.
“언제는 이 일이 그분의 힘을 되찾게 하니 꾸준히 해야 한다지 않으셨습니까.”
근데 무슨 본단 호출입니까.
그것도 대륙에 퍼진 조들 전부?
“무슨 대규모 전쟁이라도 한답니까?”
하며 투덜거리던 데이지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어, 설마.”
그때 본단에 난입했던 침입자들.
다른 신의 신도라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진짜 전면전 붙는 거 아닙니까?”
그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듯 싱글싱글 웃는 데이지의 모습에 멕켄이 입을 열었다.
“너는 제물 수색조도 아니고 공양조면서 왜 그리 좋아하나.”
기본적으로 강한 무력을 지닌 수색조가 아닌 해체나 고문 등에 능한 공양조의 조장이었던 데이지다.
데이지의 무력이 약한 것은 아니나 다른 것에 더 특화되어 있으니 전면전에 나갈 일은 거의 없을 터.
그에 싱글벙글하던 데이지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야 전면전을 하면 포로도 많이 잡아 오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죽일 거 그분에게 바칠 것들을 쥐어짜고 죽이면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앉은 자리에서 사람들이 굴러 들어올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며 웃는 모습을 보다 멕켄이 품에서 촛농을 먹인 천 뭉치를 꺼냈다.
“앗 저도 주십쇼.”
천을 열어 촉촉한 생담배를 꺼내 한입 입에 물던 멕켄은 데이지에게도 나눠 주며 손끝에서 불을 피워 올려 연초 끝을 태운다.
“포로를 그렇게 쌓을 거면 굳이 전면전을 준비하진 않겠지.”
“아, 그럼 저는 재미 못 봅니까?”
멕켄은 잠시 침묵했다.
성신교에 몸을 담은 지도 꽤 오래 지났다.
그 처음이 제대로 생각나지 않을 만큼.
그런 멕켄에게도 이번 일은 꽤 낯선 일이었다.
데이지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본단에 심어둔 연락책에게 듣기론 상황이 꽤 이상하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분께서 처소를 비우실 예정이라…….’
분명 힘의 회복을 위해 어둠 같은 마나 장막을 겹겹이 쳐서는 속성 비보를 느리게 흡수하고 계시지 않았나.
살아 있는 신.
말 그대로 이 지상에 현신해 있으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견딜 수 없는 신성과 권능을 대륙 곳곳으로 흩어 둔 상태.
그러니 무고한 피를 흘리고 비보를 모으며 생명을 지워 신성과 권능의 회복에 도움을 주는 것이 교단의 몫.
그런데 그것이 전부 중단이라.
‘마치 더 이상은 쓸모가 없다는 것처럼.’
아예 신성과 권능의 회복이 필요 없다면 왜 굳이 모든 전투 인원을 본단으로 불러들이는 것인가.
데이지의 말대로 전면전을 꾀하고 있다면 그 상대가 누구일까.
성신교는 수면 위로 오르지 않은 교이긴 하나 그렇다고 힘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평범한 사람들.
즉 일반 신도의 수가 매우 많고 신성력이나 다른 능력을 쓰는, 직위를 내려받은 신도가 적은.
삼각형 형태의 집단이 일반적인 만신전의 교단 모습이라면.
성신교는 오히려 아무 능력이 없이 믿기만 하는 일반 신도의 수가 적고 전투 및 다른 분야에서 재능을 가진 이들의 수가 많은 다이아몬드형 집단인 셈.
그러니 어지간한 만신전의 교단들은 굳이 모든 전투 담당 교인들을 집합시키지 않아도 대적이 가능하다.
“이번에 우리와 마찰이 생긴 교단이 어디인지 기억하나?”
멕켄의 질문에 데이지가 단검을 들고 자신의 손바닥을 탁탁 치며 대답했다.
“분석을 맡은 놈의 말에 따르면 본단을 습격한 쪽은 양면, 혹은 거울의 신을 따르는 거 같다고 하고.”
그 외에도 척진 곳이야 많긴 한데.
“수도에서 우리의 계획을 방해한 이노센트나 태양신교도 대상이 되지 않을까요?”
멕켄이 담배 연기를 뱉으며 생각했다.
양면이나 거울의 신 교단은 매우 교세가 작다.
이노센트는 교세 자체는 크지만 대부분이 일반신도에 본단 자체가 없이 아직 떠도는 느낌이니 전투 신도들을 육성할 여력은 없을 터.
그렇다면 태양신 하미드의 교단인가 하면 또 굳이 전면전을 치를 필요까진 없다는 게 멕켄의 판단이었다.
“이상하군, 너무 이상해.”
감히 인간이 신의 뜻을 가늠할 수 있겠느냐마는.
멕켄은 이상하게도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언젠가 그런 일이 있지 않았던가.
잠입했던 귀족의 집에서 보았던 풍경.
마치 잘 만들던 나무집에 못 하나 잘못 박았다는 이유만으로.
잘 쌓던 모래성에 파도가 밀려와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다 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던 고집스런 누군가.
어쩐지 그 모습이 문득 떠오름에 이것과 큰 관계가 있나 싶으면서도.
멕켄은 한숨 섞어 담배를 태웠다.
“일단 본단으로 합류한다.”
가서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조금 더 명확하게 가닥이 잡힐 터.
멕켄의 말에 손이 근질거리는데 꼭 합류해야 하냐며 데이지가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