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329)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329화(329/373)
깃펜의 단점은 펜 돌리기를 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연필 같은 게 있긴 하지만 보통 평민들이 쓰고 귀족들은 전부 깃펜을 쓰는 모양이다.
하긴 원래 사치품은 실용성이 아니라 과시를 중점으로 하니 하늘하늘한 깃펜이 보기에는 예뻐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시험 기간에 다른 일에 대한 능률이 제일 오른다더니.’
서류 작업하기 싫으니 생각이 자꾸 삼천포로 빠지던 가운데 방문이 슬쩍 열린다.
“바빠?”
살짝 열린 내 방문의 틈 사이로 레이첼이 얼굴만 빼꼼 들이밀어 묻는다.
나는 레이첼의 긴 붉은색 머리카락이 늘어져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하는 것이 신경 쓰여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랑 대화할 시간은 있지.”
사실 쌍수 들어 환영이다.
내가 당장 서류 더미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이리 들어오라는 듯 손짓하는데 레이첼이 히히 웃으며 다른 누군가와 같이 들어온다.
아니 잠깐만, 혼자인 줄 알았지.
붉은 머리와 눈을 가진 노인에 녹색 머리와 눈을 가진 소년, 그리고 검은색 머리에 검은색 눈을 가진 여인.
누가 봐도 드래곤이다.
“내 친구들인데 할 말이 있대서.”
레이첼이 아주 해맑게 말하는 거 보니 나쁜 일은 아닌 거 같고.
일단 들어와서 앉으라 손짓하니 레드 드래곤으로 보이는 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네.”
“이쪽도.”
내가 실실 웃으며 말하니 그린 드래곤으로 보이는 소년이 눈썹을 까딱한다.
아마 반사적으로 내 오만에 반응한 모양.
원래는 나랑 대화하려고 온데다 레이첼이 데려왔으니 적대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트레잇이 트레잇이다 보니 처음의 레피드가 그랬듯 이상하게 거슬리는 모습이었다.
뭐, 그래도 레이첼도 가만히 있는데 어쩔 거야.
어차피 오만 트레잇으로 공손하게 나가도 드래곤에게는 껄끄럽게 느껴졌을 터.
그럴 바엔 내가 편한 게 낫지.
더불어 케인도 있겠다 다른 애들도 이제 드래곤이랑 할 만하니 꿇릴 거 없다 난.
그냥 당당하게 마주하니 붉은 머리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거래를 하러 왔네.”
이야기가 길어지려나 싶어 내가 슬쩍 차를 준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시선을 던지는데 레이첼이 인상을 확 구긴다.
그래서 별수 없이 술을 가져와선 마시며 이야기를 듣는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의외의 내용이라 나는 잠깐 멈칫했다 입을 열었다.
“아니 케인보고 다 패달라고?”
“…놀랄 구간이 그 부분이야?”
내가 되묻자 그린 드래곤 소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그야 흑마법사가 테이트리아 수도의 지하 수로에 자리 잡아 가는 건 대충 알고 있었으니까.
“크음, 다 패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 간의 원만한 협의하에.”
레드 드래곤 노인이 계속 말을 고상하고 우아하게 돌려 말하지만 그게 그거 아닌가.
종을 초월한 강자의 경우 제대로 된 대인 전투 경험을 쌓기 힘들고 어쩌고.
드래곤은 날 때부터 완성형으로 태어나기에 돌발적인 상황에서 대처가 어쩌고 하고 말한들.
본론은 그거잖아.
“케인이 단시간에 너무 강해져 몸의 기능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드래곤 정도는 되어야 한다며.”
혼자 수련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약한 이들과 검을 맞대는 것은 의미 없는 일.
그러니 케인이 제대로 힘을 사용해도 버틸 수 있으며 맞상대가 가능한 이들과 대련을 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그 말은 따지고 보면 그냥 걔네들 다 패라는 말밖에 더 되나.
“드래곤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다 모이는 경우도 드무니까.”
블랙 드래곤 여인이 말을 얹지만 결론은 아무리 봐도 케인이 몽둥이 들자는 소리인데.
옆에서 레이첼이 이마를 짚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그에 노인과 소년, 여인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레이첼에게 핀잔 받는 저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냐마는.
그런데 사실 또 나쁜 생각은 아니란 말이지.
더불어 이들이 함정을 파거나 뭔가 위해를 가하려고 나에게 제안하는 게 아닌 것도 알겠다.
드래곤은 강한 만큼 단순한 구석이 있으니까.
굳이 복잡하게 계산하고 치밀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데다 아득한 시간을 살아가는 종족이니 말이다.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그런데 맨입으로?”
“곧 일어날 이변에 대한 정보로 모자른가.”
내 말에 노인이 대답했다. 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정보라.”
물론 그렇게 많이 지금 반입되었다는 건 모르긴 했고 마나의 흐름도 내가 직접 느낄 수는 없는 거라 놓친 부분이긴 하지만.
어차피 일이 터져도 수도는 쑥대밭이 될지언정 우리 파티는 무사할 게 뻔하니까.
다만 불필요한 인명피해를 사전에 줄일 기회를 잡은 거 자체는 좋은 일이다.
일반 사람이 많이 죽어 나갈수록 살아 있는 신에게는 좋고 우리에겐 안 좋으니.
“그럼 무얼 원하지.”
노인의 말에 나는 레이첼을 흘긋 바라보았다.
레이첼은 드래곤들을 바다 마녀의 던전에 밀어 넣은 덕에 케인이 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적이 있었지.
지금은 체이서가 내 기억을 일부 공유해줘서 오해가 풀린 상황이지만.
문제는 레이첼이 그리 결론을 내렸다면 다른 드래곤들도 그랬을 거란 거다.
애초에 내 앞에 앉은 세 명이 그러해서 케인에게 덤볐던 거고.
이 부분은 나중에 안 꼬이게 풀고 갈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드래곤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올 때 쓸데없이 뒤통수 맞을 일은 없어야 하니.
레이첼도 아닌데 굳이 모든 걸 공유할 필요는 없다.
다만 훗날을 위해 보험 정도는 들어놓는 게 맞는 일이니까.
“별건 아니고 언령으로 맹세 좀 해주면 하는데.”
내 말에 드래곤 셋이 조금 구겨진 표정을 지었다.
* * *
“가능해?”
“불가능하다고 하면 저 버려지나요?”
나는 체이서의 대답에 턱을 괸 채로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그렇게까지 악덕은 아니거든.”
“불가능까지는 아닐 테지만 좀 힘들어요. 그냥 몬스터 1만 마리 잡아 오기 이런 걸 시키세요.”
체이서가 뱀같이 웃는다. 말이 1만 마리지 체이서의 능력상 피가 흐르는 종류면 생각보다 어려운 거도 아니면서.
“뭐, 무슨 몬스터. 가고일? 레이스? 골렘? 미믹?”
“…방금 악덕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피가 흐르지 않는 종류로만 말하니 떨떠름한 표정이다.
“진짜 좀 힘들어?”
내가 웃으며 물으니 체이서가 드물게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저보고 드래곤의 정신 방벽이 무의미한 마법을 만들어 내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뭐 말처럼 쉬운 줄 아세요?”
적에게서 빼앗아온 내 유닛이 이렇게 무능력할 수가!
내가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체이서가 이마를 짚었다.
“요즘 저만 부려 먹히는 기분이 들어요?”
“그럴 리가.”
내가 주문한 게 좀 까다롭긴 하다.
케인과 드래곤들을 직접 맞붙게 했다간 아무래도 위험한 부분이 있으니까.
공간이야 케인의 능력으로 유리시킨다고 해도. 거기서 죽으면 끝 아닌가.
어차피 대련한다면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 더 효율이 큰 법.
그러니 일종의 가상현실 같은 느낌으로 혹은 꿈같은 느낌으로 정신 일부분만 구현할 수 있나 했지.
살아 있는 신이 체이서에게 보여준 환각처럼 생생하다면 서로 실제로는 누가 죽지 않는다고 해도 전력으로 맞상대 가능할 테니까.
더불어 그게 되면 드래곤들에게 내 기억 속의 비공정과도 붙여볼 수 있다.
사람 일은 혹시 모르니 상대해 본 것과 안 해보는 건 또 차이가 크게 나니까.
“그런 식으로 본격적인 마법을 구상할 거면 저나 소르페만으로는 좀 힘들고, 파이얀까지 붙여주세요.”
파이얀은 꿈의 강림이라는 트레잇이 있으니 조합하면 조금 더 쉽고 빠르게 내가 원하는 마법을 구상할 수 있을 거란 체이서의 말이었다.
“안돼.”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소르페는 그렇다 쳐도 파이얀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살아 있는 신이나 루프에 대하여 제대로 알려준 사람 중에 백 퍼센트 내 의지로 알려준 거라 할 수 있는 이는 케인 뿐이다.
케인은 당사자니까.
이 세계는 거짓이고 반복되고 있다는 걸 당장 알아서 좋은 건 하나도 없다.
진실을 굳이 모두에게 공유할 이유가 없는 법.
누군가는 알려주면 뭐 더 큰 각오, 더 거대한 분노의 힘 이런 걸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건 몰라도 어차피 지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삶이다.
지금 이 삶이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인, 소중한 인생이다.
그런데 굳이 루프에 대해서 알려주면 어찌 생각할까.
보통은 행복한 기억보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더 강렬하고 많은 게 이곳의 삶이다.
그것을 무수히 반복해서 겪더라도 그다지 별 의미 없다고.
넌 단지 누군가를 몰락시킬 거대한 판에 소모품일 뿐이라고.
죽음이 끝도 아니며 이후의 더 좋은 내세에 대한 기대조차 사라진다.
어린 시절 겪었던 부당함, 성장하면서 받아왔던 고된 삶과 고통.
그걸 그냥 똑같이 겪으며 다시 반복했다는 걸 아는 게.
그게 뭐 좋은 진실인데.
우리 파티 중 과거가 행복한 이 있나.
다 살아 있는 신이 엉망으로 꼬아놨는데.
제로나 레이첼이 얼추 알고 있던 게 아니면 말 안 했다.
체이서도 내 기억이 공유된 덕에 알게 된 거지 내가 말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내가 루나나 리프, 파이얀에 레비에게 괜히 말 안 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진실이라는 게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니까.
“그냥 뭐 몸으로 때우라고 그래.”
드래곤들 튼튼하니 죽기야 하겠어?
내가 급격히 심드렁해지자 이번엔 체이서가 눈을 가늘게 뜬다.
“그럼 별수 없죠. 케인 좀 데려가겠습니다.”
제힘으로는 안 되니 협조하라고 명령 좀 해주시겠어요? 하는 체이서의 말에 내가 턱을 괴고 응시했다.
“어디로?”
“파이얀은 안된다니 별수 있겠어요? 제게 만들라 명령은 하셨고 저는 해야겠고”
그럼 대체재를 구해야죠.
하고 체이서가 검은 눈동자로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는다.
“바다 마녀의 던전 말이에요.”
전 아직 안 가봤지만, 그거 아델리안님이 말한 것과 비슷한 원리로 구동되는 거 같던데.
“실제와도 같은 환상, 하지만 육신에 직접적인 데미지는 없음.”
그 던전의 마법을 조금 비틀어 적용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며 테이서가 말했다.
“레이첼이 그들을 던전에 집어넣었다 뺐다 하는 걸 보면 아직 던전 주인이 존재하니 마법이 돌아가는 것일 테고.”
그럼 그 던전 주인을 잡으면 파이얀 대용으로 쓸 수 있을 거란 말에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역시 체이서, 나쁜 쪽으로 아이디어 내는 건 우리 중에 네가 제일 잘하는 거 같다.
“좋아, 케인 붙여줄게, 그나저나.”
그렇게 되면 바다 마녀의 던전에 체이서도 일단 한번은 시험 걸리게 될 터.
“레이첼이 그러길 턱이 부서질 정도로 한 대 때리면 보통 일어난다더라.”
내가 깨워주는 게 제일 평화로울 테지만 그럼 체이서의 악몽을 내가 보게 되니까.
“케인이면 머리통이 부서질지도 모르니 사양하겠습니다.”
어차피 가장 두려워하는 거라고 해봐야 알고 있으니까요 하고 체이서가 읊조렸다.
“이미 비슷한 걸 아주 많이 당해봐서.”
혼자 알아서 깨어나 보죠.
체이서가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