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351)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351화(351/373)
오래 사는 이들의 시간 감각은 짧게 사는 이들과 다른 법이다.
고작 30년 남짓 사는 하플링에게 10년 동안 변하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대다수 고개를 저을지 모르나, 인간에겐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닌 것처럼.
만년을 산다는 드래곤에겐 고작 100년의 유희는 즐거움으로만 남겠으나 인간에겐 평생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그러니 아주 긴 시간, 헤아릴 수도 없이 오랜 시간을.
고작 20년에서 길어봐야 30여 년을 반복해서 흘려보내고 있는 살아 있는 신에겐 고작 일주일, 한 달. 혹은 일 년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일 뿐이었다.
어쩌면 자만이요 어찌 보면 방심이라 불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 숨을 쉴 때마다 의식해서 평생을 쉴 것이요 어느 이가 음식을 씹어 삼킬 때마다 맛을 음미하며 살겠는가.
중간중간 일그러진 이번 회차는 어차피 중도에 그만둘 예정이었으니 큰 관심도 집중도 필요 없는 것이었다.
당장 케인을 찾아가 그를 죽이면 새롭게 세계는 시작될 것이었다.
그것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아주 조금 여유를 부린 것이다.
속성 비보를 흡수하는 것은 힘을 되찾는 것이요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니 그것이 주는 기분이 제법 괜찮은 것이었으니까.
어차피 리셋 하면 처음부터 다시 기억과 힘을 채워야 하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것이 주는 공허감을 조금 뒤로 미룬다 한들 큰 것이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 사람으로 치자면 더운물이 식을 때까지만 목욕을 즐기다 나온 그 정도일 것이다.
고작 며칠,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을 그리 보내는 것이 본디 나쁜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라면.
“이제 되었다.”
피어오르던 마나를 전부 흡수한 뒤 이 공간의 기운도 이질감도 지우던 마나 장막을 거두자 어둠과 마나로 가득 차 있던 공간이 밝게 드러났다.
살아 있는 신은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마나가 주던 고양감과 몽롱함이 사라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때가 왔다.”
이번 회차는 망가졌으니 다음 회차로 넘어가려 마음먹은 뒤로 속성 비보를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늘 전부 삼킨 것들이 즐거움의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이제 이 정도 즐겼으면 되었지. 이제 할 일은 이렇게나 회차가 꼬이고 망가질 수 있다는 기억을 남기는 것이다.
케인을 죽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어 하나둘 기억을 찾게 되면 어느 때에 지금 기억하기로 마음먹은 이 순간이 떠오르겠지.
전염병도 기근도 전쟁도 그 무엇도 제대로 운용되지 않은 순간이.
물론 아직 찾지 못한 비보를 모두 찾아 삼키면 이번과 비슷하게 망가져 버린 회차가 있을 수도 있을 거지만 굳이 그걸 확인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므로.
“체이서.”
마음만 먹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 기회가 무한하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이미 너무나 많이 겪어봤다는 것은 많은 것을 야기한다.
무료함, 귀찮음, 나태함.
“예. 부르셨어요?”
그래서 그랬다.
체이서가 무언가 달라졌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이 절대로 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만 먹으면 체이서의 뇌를 망가뜨리는 것을 대가로 기억을 읽어본 뒤 다시 재생시킬 수 있으면서.
그 영혼까지 뚫어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
이번의 이 세계에서 그 어떤 것을 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의미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케인에게로 가자.”
내가 말한 자를 미리 찾아 그 위치를 상시 확인하고 있었겠지?
마치 잠에서 방금 깬 듯 늘어지는 말꼬리를 잡아 이으며 물으니 체이서가 눈을 휘어 웃었다.
“여부가 있을 리가요.”
다른 누구도 아닌 체이서였다. 자신만이 다시 쓰고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책.
겉을 단단한 금속으로 된 표지에 자물쇠까지 달고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자신을 거역할 수 없도록 적어둔 책이다.
그러니 누가 그것을 망가뜨릴 수는 있어도 내용을 바꿀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간단하게 자물쇠를 열고 안의 내용을 조금 읽어봤다면 달랐을까.
살아 있는 신은 오늘따라 유달리 체이서의 그 미소가 의뭉스러워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자물쇠를 열고 책장을 펼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곧 서고 채로 불태울 예정이었기에.
그래서 검게 일렁이는 체이서의 그림자가 자신을 덮을 때 그냥 느리게 눈을 감았고 다시 뜬 순간 시린 빛과 더불어 익숙한 눈동자와 마주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금색 눈동자를.
* * *
짙고 푸른 바다가 보이는 절벽 위에 그려진 봉인진.
기본적으로 성녀의 이름을 받은 마리안느와 에리엘, 그리고 태양신의 대주교인 하미드가 삼각대형으로 봉인진의 끝에 서 있었다.
그 세 명이 살아 있는 신의 신력을 나눠 지탱함과 동시에 신력을 제외한 나머지 위압을 분산하기 위한 인원으로 나와 케인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이 원을 그리듯 쭉 봉인진을 둘러싸듯 자리 잡았다.
그리고 케인만이 봉인진의 축이나 외각이 아닌 조금 떨어진 바깥에서 전체를 바라보며 대기했다.
나는 가장 위험하며 동시에 역설적으로 가장 안전한 케인의 옆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오러나 마나를 각성하지 못한 나를 살아 있는 신의 앞에서 지켜줄 만한 이가 케인뿐이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살아 있는 신이 만약에 무조건적인 섬멸을 선택한다면 일단 케인부터 노릴 것이니 본디 죽음에 가장 가까운 곳이겠으나 케인을 믿는 입장으로선 이보다 안전한 곳은 없었으므로.
“보조만 부탁드립니다. 그 압력의 부하만 나눠서 가져가 주세요.”
“알았다니까. 나 못 믿어?”
“믿죠…….”
하미드가 레이첼에게 신신당부를 하면서 동시에 얼핏 지나간 표정을 보니 못 믿는 게 확실한데.
하미드가 슬쩍 시선을 돌리며 레이첼 씨가 가장 강하고 믿음직스러우니 제 뒤에 계셔달라 한 거죠, 하고 덧붙인다.
사회생활 잘하네.
태양신과 레드 드래곤, 둘 다 불 속성이라 내가 붙여둔 거긴 한데.
그걸 저렇게 하미드가 말하니 레이첼은 금세 기분 좋아진 얼굴로 웃으며 걱정 말라 호언장담 중이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우유를 한잔 들고 내 뒤로 다가온 라헬라가 중얼거렸다.
“저 정도 봉인진이면 짧은 시간이라 가정했을 때 드래곤이라도 수십을 묶어둘 수 있을 거 같은데.”
만드려는 환상 속 에너미가 도대체 누구길래 보고 참고하라고 날 여기 데려온 거야 하며 라헬라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우유에 홀리는 게 아니었는데…….”
뭔가 억울한 듯 라헬라의 문어발이 바닥을 꼬득꼬득 닦듯이 파기 시작한다.
사람으로 보자면 불안감에 다리를 떠는 것과 비슷한 행위인가.
잠시 그걸 내려보다가 나는 웃었다.
“무슨 그런 약한 소리를.”
그래도 넌 내근직이라서 현장 업무는 안 하는데 어디서 우는소리를 하는 거야.
의식체가 아닌 본체였으면 조금 더 쥐어짜도 될 텐데 마지막 남은 의식체라 너무 쥐어짜다가 터지면 안 될거 같아서 참여가 아닌 구경만 시키는 건데 말이지.
내가 좋은 말로 타이르자 라헬라가 뭔가 힘 빠진 고양이 같은 얼굴로 소금을 한 꼬집 넣은 따뜻한 우유를 홀짝이는데 문득 케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다.”
“전부 준비해!”
케인의 말에 루나가 외치자 둔한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공기가 팽팽해진 기분이다.
가뮈르가 한 치의 오차도 주지 않기 위해 이 근방의 마나를 전부 제어 중이라 분명 칼같이 시린 바람이 들어오지 못할 것인데.
어쩐지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몸이 차갑게 질리는 느낌이다.
긴장, 혹은 두려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직까지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부유감 덕에 두근거리던 심장이 가라앉는다.
지금 숨을 제대로 골라야 한다.
분명 살아 있는 신에겐 부유감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케인의 말을 듣고 한번 숨을 크게 쉬기도 전에 봉인진 중앙의 공간이 일렁거렸다.
마치 방금 그 부근만 세계가 오류라도 난 것처럼. 아지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기괴한 일그러짐.
분명 지금 그곳에서 열리고 있는 것은 체이서의 그림자 공간이나 매번 같은 모습이되 그것이 뿜어내는 기운은 달랐다.
분명 짧은 시간이다.
내가 눈을 한번 깜빡이는 정도의 시간.
하지만 뇌가 인식하기론 긴 시간이었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모든 것이 보였다.
긴 검은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황금색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한다.
케인과 닮았으나 조금 더 작고 어리고 섬세한 얼굴이 무료함에 잠식되어 이채 없는 눈을 하고 있다 이쪽과 마주하는 순간, 마치 스위치를 켠 듯 눈에 빛이 서린다.
그리고 그 순간 마리안느와 에리엘, 그리고 하미드가 발동시킨 봉인진이 체이서의 그림자와 엉키며 사방에서 가시 달린 체인이 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은 속도로 셰인의 육신을 꿰뚫었다.
새끼손가락만 한 굵기의 가시 체인 수십 개가 몸을 감싸는 게 아닌 그대로 관통해서 속박한 다음 촉수처럼 혈관에 파고들어 검은 체인이 붉게 변할 만큼 피를 흡수했다.
“흐음.”
그에 살아 있는 신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무언가 강한 것이 바닥을 내려치기라도 한 듯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지반이 조금 내려앉으며 바닥의 풀들이 납작해지고 동시에 나와 케인을 제외한 모두가 피를 토했다.
“재미있네.”
살아 있는 신이 관통된 손가락을 조금 까닥거리더니 낮게 웃는다.
그에 체이서가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숨을 골랐다.
“마지막에 날 재미있게 해주려고 노력했구나.”
체이서도, 너도.
하며 살아 있는 신이 케인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직 케인의 뒤에 서 있던 나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듯 시선이 닿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몸에 돋은 소름이 그것을 증명하였다.
살아 있는 신에겐 부유감도 무엇도 통하지 않는다.
몸에 달라붙어 있던 껍질을 뜯어낸 것처럼 눈을 한번 씻은 것처럼. 귀의 먹먹함이 거두어진 것처럼.
나는 이 현실에서 오롯하게 내가 서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는 넌.”
케인이 한 걸음 내딛자 케인의 몸에 가려 살아 있는 신이 보이지 않는다.
“고작 그 정도인가.”
케인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사방에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위압을 케인이 밀어낸 모양.
그에 살아 있는 신이 키득키득 웃었다.
“이번엔 나보다 네가 먼저 강해졌구나. 그것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으마.”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랴.
“네 동생의 몸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도. 혹은 이 몸으로 널 죽이는 것도.”
나는 어느 쪽도 환영할 일이므로.
살아 있는 신이 그리 말하며 마치 어서 자신을 죽여 보라는 듯 가볍게 목소리를 흘림에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래, 살아 있는 신이, 테이트리아가 원하는 것은 케인의 고통이지 자신이 꼭 케인을 죽이는 것이 목표는 아니니까.
그리고 나도 그걸 알고 이 일을 계획한 거고.
원래라면 테이트리아는 이곳으로 오며 자신이 케인을 죽이거나 혹은 케인이 자신을, 즉 셰인의 몸을 죽이거나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서로를 죽일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테이트리아가 셰인의 몸을 강탈하고 있단 그 사실만으로도 케인이 고통받는다.
그렇기에 지금 봉인진에 잡혀 죽기 직전이라도 굳이 무리하게 케인을 공격하지 않는 거였다.
만약 봉인진이 없었다면 케인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그냥 달려들어 케인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죽였겠지.
그런 뒤 케인에게 제압당하더라도 이득이니까.
“널 당장 죽일 생각은 없다.”
“셰인의 몸을 죽일 수 없나 보군. 그래 그런 적도 있지. 그렇다면 곁에 두고 감시할 건가? 그래봐야 결국 너는 너의 죽음까진 막지 못할 텐데.”
시간은 언제나 나의 편이니까.
나는 그 말을 하는 살아 있는 신의 앞으로 걸어가 눈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