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366)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366화(366/373)
색이 바랜 밤이며 그을린 낮이다. 볕 없는 노을이며 여명 없는 새벽이었다.
엉망이다. 모든 것이 그러했다. 마치 세상 전부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왜 우리는…….”
입 없는 이가 중얼거렸고 귀가 막힌 이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눈먼 이가 종말을 바라본다. 태양과 달이 같이 있더니 둘 다 없는 날도 있었다.
부서진 산은 하늘로 흘렀고 새는 아래로 날았다.
“왜 우리는 잊었을까.”
이 참혹함을. 이 두려운 광경을.
몇 번이고 반복하였는데 왜 망각하였나.
사람들은 곧고 거대한 어깨. 하지만 낡은 등을 바라보았다.
긴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사내는 황금색 눈으로 지평선 너머를 응시했다.
저 끝에서 검고 붉은 것이 엉켜 꽃무릇 같은 날개가 수도 없이 피어났다.
이 세계의 끝이 저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억했다면 난 당신을 증오하지 않았을 텐데.”
얼굴엔 표범 무늬가 도드라진, 입가엔 송곳니가 튀어나온 사내가 중얼거렸다.
이제 스물 하고도 중반은 되었을까. 그 사내가 중얼거리는 말에 누군가 비틀어 웃었다.
“그렇게 치면 여기 있는 이들 모두.”
모두 그러했겠지.
이번에도 하나의 신이 자신의 격을 바치는 대가로 깊고 낮으며 어두운 우물로 이 모든 기억을 끌고 갈 것이다.
부서져 버린 세계의 기억은 다시 잊히고 이곳에서 하나 되었던 이들은 전부 반목하며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겠지.
하지만 만약에. 떠올릴 수 있다면. 마지막이 오기 전에 기억해낸다면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저주이며 소원이었고 낙인이며 각인이었다.
“다음엔 부디 잊지 않기를.”
헛되며 덧없는 말인 것을 알면서도 자신은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 검은 머리의 인간 사내는 검을 들고 모두와 함께 저 멀리 피어난 날개의 꽃을 향해 달렸다.
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마른 대지는 물을 삼키지 못하고 그 모든 것이 거울처럼 저 멀리로 흘러갔다.
문득 아래를 보니 하얀 몸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뿔과 허리 아래로는 하얀 사슴의 몸. 그리고 붉은 눈동자.
물이 사방에 흘러 온통 거울같이 변한 세계가 뒤집힌다.
“아로 님.”
아로는 자신을 조심스럽게 불러 깨우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아로 님… 숙제 다 했어요…….”
먼 곳에 화등잔을 켜 희미한 오렌지빛이 도는 동굴. 부드러운 마른 잎이 깔린 바닥에 네발을 굽혀 앉아선 잠들었던가.
아로는 머뭇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응시했다.
표범 무늬가 올라온 뺨과 갈색의 늘어진 토끼 귀. 파란색의 눈동자에 세로로 열린 동공.
“헤쉬.”
데제브가 내준 숙제를 다 했나요?
아로의 물음에 헤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 부족의 족장인 데제브는 이번에 있을 으뜸 부족과 버금 부족의 회담을 준비하는 일로 자리를 비웠다.
때문에 한 일주일 정도는 바짝 해야 마칠 만한 숙제를 내주고 간 것으로 아는데.
“그렇게 가고 싶었나요?”
아로의 물음에 헤쉬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궁금…해서요…….”
하지만 보다 빠르게 숙제를 마친다면 부족대회담을 구경 와도 좋다던 데제브의 말도 있었으니 그것 때문에 저 아이가 그토록 힘냈으리라.
아로는 느리게 일어나 검은색 천으로 크게 만들어 사슴의 몸까지 가릴 수 있는 통옷을 입었다.
아주 가끔, 사슴이나 말, 혹은 소 같은 발굽 동물형 수인 중에서는 이리 네발로 태어난 이들도 있거니와.
예언자인 자신은 족장들 외엔 잘 모르니 이 정도만 가려도 될 것이라.
“날이 밝았으니 바로 출발해도 되겠어요.”
아로는 얼마나 기대한건지 벌써 가방을 챙겨 옆에 둔 헤쉬를 안아 자신의 등에 앉히고는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좋은 것만 볼 수 있을 거예요.”
이제는 기억 못 하는, 망각의 강에 가라앉은 어딘가와는 다르게.
“가는 길에 산딸기도 따 먹어요!”
“그러다 뱀딸기 집어 먹고는 이상한 표정 짓겠네요.”
헤쉬가 기쁜 듯 외치자 아로가 키득거렸다.
* * *
“계약자야, 그거 알아?”
아니 소금빵이란 게 있었어. 빵은 케이크처럼 달거나 식사 빵처럼 고소하거나 아니면 시큼할 줄 알았는데.
버터를 잔뜩 넣어서 폭신하게 만든 빵 위에 굵은 암염을 빻아서 뿌린 거야.
“이게 있잖아, 너무 맛있는 거야!”
<그래? 그래서 지금 어디인데. 인어성까지 얼마나 남았어?>
아델리안의 질문에 레비는 냉큼 세이렌을 끊었다.
분명 잘못한 것도 없는 데다 아르만의 배를 타고 인어족의 영역으로 순탄히 가는 중인데도 이상하게 뜨끔했던 탓이다.
‘가고 있어. 안 할 건 아니야.’
그냥 아직 모든 일이 끝나지 않아서. 마무리되지 않아서 찜찜한 걸까?
분명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고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남은 건 시간이다. 어차피 시간이 조금 흐르면 자신은 목표한 일을 해낼 텐데.
어째서 죄책감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레비가 난간에 앉아있다가 세이렌을 끄고 갑판 위에서 챠닥챠닥 걸어가니 배의 뒤쪽인 선미에 서있던 누군가가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 귀 끝을 겨우 스칠 정도의 길이인 청록색의 머리칼과 올리브색의 눈동자.
[레비.]아르만의 호위 골렘인 이본이 뒤로 부는 바람에 깃발처럼 날리는 긴 소매를 한곳으로 기도하듯 모아 다가온 레비를 안아 들었다.
[관리자께선 무어라 하십니까.]허공에 떠오른 물이 찰랑이며 글자가 되었다 사라진다. 그 모습에 레비가 대답했다.
“소금빵 맛있댔는데 아직 일 다 안 했냐고 구박했어.”
물론 정말 구박하진 않았지만 괜히 그렇게 말하며 이트에게 안기자 이트는 익숙하게 레비의 머리를 챠박차박 쓰다듬었다.
[그래서 이리 심통이 나셨습니까.]“응… 그래서 말인데 나 소금빠…….”
―삐이익!
레비가 이 기회를 노려 남은 소금빵도 입안에 보관하기 위해 시동을 거는데 선두 쪽에서 마린이 크게 우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이본이 허공을 박차듯 뱃머리로 향했다. 앞에서는 배를 장난삼아 끌고 가던 마린이 잔뜩 놀란 듯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로는 물속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듯 물이 비산하며 흩뿌려짐과 동시에 날카로운 산호 꼬챙이 수십 개가 튀어나왔다.
[…….]그에 이본이 한쪽 팔을 빠르게 벌리듯 움직이자 바람이 산호 꼬챙이를 밀듯 퉁겨냈고 발로 갑판을 한번 구르자 배를 중심으로 동심원이 퍼지듯 파도가 일었다.
“무슨 일이야!”
[인어족의 습격입니다.]그 진동에 갑판 아래에서 쉬던 아르만과 더불어 호슈아가 뛰쳐나왔다.
[포위하던 이들을 전부 밀어냈으나 빠르게 접근 중.]이본이 물로 원을 그리듯 밀어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소용돌이 해역의 직전.
인어족의 습격과 해적선의 약탈이 늘어난 요즘 이 근방 해역까지 항해하는 이들이 적었기에 인어족들이 놓치지 않으려는 듯 촘촘하게 포위망을 조이기 시작했다.
그에 이본에게 안겨있던 레비의 둥근 눈이 레이첼처럼 뾰족해졌다.
“내가!”
내가 처리할게!
―뀨우우…….
마린이 조금 불안한 듯 배에 바짝 붙어 소리를 흘리자 레비가 이본의 품에서 벗어나 다이빙하듯 몸을 날렸다.
“이제 돌아가! 나머진 내가 할게.”
레비가 그 말을 남기고 풍덩,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에 아르만이 잠깐 미간을 모으다 무언가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전 선원들. 당장 마나 엔진 가동하고 마린의 몸에 이어둔 밧줄 다 회수해.”
지금부터 우리는 전속력으로 빠져나간다!
아르만은 거의 초토화되었던 해변을 떠올리며 외쳤다.
* * *
스극, 턱.
스극, 턱.
반복되는 소리가 울렸다. 안쪽으로 갈수록 단단한 암석이 나오는데 그걸 케인이 스카로 잘라 뒤로 넘긴다.
공기와 빛.
둘 다 케인이 어찌 마나를 조작해 만든 것 같은데 그 덕에 널찍한 거실 정도 되는 공간은 제법 아늑했다.
다만 아직도 설산의 눈물 같은 경우, 그 희미한 가닥가닥만이 이어지는지 찾지 못한 상태.
오히려 다른 거라면 몇 번을, 몇 개를 찾은 뒤였다.
―관리자님.
“혹시 모르니까 돌아가자.”
도대체 이 설산 뭔지 모르겠다. 분명 내가 기억하기로는 1회차 때도 설산은 있긴 했는데.
‘테이트리아 이 자식. 갑자기 손님 와서 급한 대로 방 하나에 짐이나 옷가지 다 몰아넣듯 세계를 만든 거야 뭐야.’
나는 방금 케인이 암석을 잘라 드러난 거대한 얼음벽 너머로 나타난 눈동자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대충 보아도 빌딩만 한 크기의 무언가일 것 같다.
아니면 눈알만 작은 집 하나 정도 되고 나머지는 그보단 작거나.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를 얼음벽 너머에 보이는 눈동자와 우둘우둘한 피부만으로 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고대에 봉인된 어쩌고 하는 인트로가 나와야 할 거 같았다.
“아델리안.”
“조용히 하고 묻어.”
뭐 저거 깨워서 싸워보고 싶어? 어림도 없지.
케인이 나를 슬쩍 보며 운을 띄우는데 지금 바쁘다.
어딜 테이트리아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바쁘다.”
내 말에 케인이 여러 조각으로 잘라 뒤를 막듯 채웠던 암석을 마나로 허공에 띄워 가져와서는 퍼즐처럼 공간을 메운다.
거대한 빙하 속의 눈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중요한 건 저게 처음이 아니라는 거다.
이상한 계단 같은 게 보이는 공간이 나오지 않나. 어디로 이어졌는지 모를 온천이 나오지 않나.
물론 온천은 유용하게 잠시 썼다. 내가.
방금 본 괴물보다는 작은 괴물을 얼음 너머로 보거나. 한번은 너무 아래로 파고 들어갔는지 일렁이는 물 너머가 보였다.
‘아쿠아리움인가 했지.’
몸에 은은한 빛을 발하는, 오징어와 악어를 섞어둔 거 같은 게 얼음 너머 검은 공간을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건 헤엄치는 모양새였다.
빙벽과 설산의 어딘가는 북해와 맞닿은 곳도 있으니 아주 깊은 지층 어딘가는 심해일 수도 있지.
있는데 왜 길을 못 찾냐 이거다.
“마나로 탐색 못 하면 이거 길친가 진짜.”
내가 케인을 노려보며 말하자 리프가 나와 케인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가능성 있습니다.
그래. 케인 이 자식. 저거 나랑 몸 바뀌면 아무것도 아닌 놈일 수 있다니까.
―관리자께서 하신 말씀은 부정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나와 리프가 이때다 싶어 케인을 몰고 가는데 케인이 암석을 자르는 순간 마치 새벽의 달같이 은은한 빛이 번졌다.
“어?”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행동을 멈추자 은은한 빛을 내며 날아가던 세 개의 빛무리도 멈췄다.
“앗!”
“인간이다……!”
“아니야! 인간 아니야!”
한 뼘 정도 되는 키와 작은 몸짓. 흰자 없이 푸른색으로만 가득한 눈동자와 은색, 혹은 백색. 청백색 등의 머리칼.
수정을 깎아 만든 것처럼 보이는 물통을 들고 날아가던 그것들의 날개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페어리?”
설산의 페어리.
그들이 케인을 마주하며 오들오들 떨다가 날 보더니 급하게 날아온다.
―살기는 없습니다. 공포에 질린 모양입니다.
페어리가 급하게 날아오는데 리프도 제지하지 않는 걸 봐서는 연기는 아닌 모양이다.
“괴물이야!”
“악마! 악마!”
“도와조, 도와죠!”
우리 냄새가 나는 인간! 페어리 퀸에게 도장 받은 인간!
믿어도 되나? 믿어도 돼?
귀가 시끄럽다. 내 옷자락을 잡고 로브 안으로 들어와서는 등 뒤에 붙어 바들거리는 움직임에 나는 케인을 바라보았다.
“악마?”
쟤들이 너 악마래.
내 말에 케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