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373)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373화(373/373)
고요하다. 케인은 비공정의 제어실에 앉아 앞에 비친 풍경을 응시했다.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과거를 하나씩 되돌려보는 중이기에 이렇게 펼쳐진 녹음이 되레 낯설기까지 하다.
이젠 척박해진 세계가 뇌리에 더욱 익숙했다.
‘테이트리아…….’
거스르고 거슬러 올라 기억하는 옛 전우의 얼굴.
더불어 이 비공정의 모습까지도.
이 비공정의 제어실에서 리프와 함께 테이트리아가 주도한 작전을 기억한다. 분명 그때까지는 같은 곳을 보고 있었건만.
케인은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무수히 많은 기억 속의 손보다 조금 더 작고 흉터 하나 없는 손.
많은 루프 중 이 세계의 진실과 자신의 과거에 도달했던 순간은 이번 한 번이 아니다.
종종, 어쩌면 제법 자주.
테이트리아가 되돌린 횟수 자체가 너무나 많기에 아주 가끔 케인이 모든 걸 기억해낸, 혹은 알아버린 회차 또한 분명 존재했었다.
하지만 늘 실패했지. 성공했다면 지금까지도 오지 않았을 터.
분명 무력으로도, 나중엔 반신에 올라 신격으로도 테이트리아를 짓누른 순간도 존재한다.
하지만 언제나 결과는 같았다.
루프를 막을 수 없었으니까.
원래 검사로 시작하여 검사로 극을 본 자신과 마법사로 시작해 신에 오른 테이트리아의 차이일까.
절대적인 무력도 신위도 그 격도. 절대적으로 드높인다 한들, 그리하여 테이트리아를 죽인다 하더라도.
결국 시간이 흘러 자신이 죽거나 혹은 망가진 세계를 보며 다음엔 부디 오롯하게 되찾기를 바라며 스스로 루프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반복되던, 무수한 그 절망의 기억과 지금이 다른 건 단 하나.
‘시간.’
그 어떤 순간보다 빠르게 기억을 되찾았다.
아델리안이 초반부터 자신을 이끌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으로 이 시점까지 빠르게 끌고 왔으니까.
이건 제법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지금까지 이 세계의 비밀, 케인 자신의 기억과 더불어 테이트리아에 대한 일까지.
그것을 깨달은 시점은 언제나 끝이 이미 도래한 뒤였으니까.
살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 발악하며 미친 듯이 무엇이라도 해보려 파고든 뒤에나 발견하는 것이다.
세상은 이미 부서지고 사람들은 거의 다 죽어 한 줌만 남은 상황에서.
비명과 눈물과 핏물로 얼룩진 세계 위에 발 디딘 채로.
마지막까지 가서 발버둥 치다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아직 그 무엇도 망가지지 않았으니까.
케인은 멀리 뻗어있는, 녹음이 짙은 숲과 요정족들로 분비는 마을을 응시했다.
대부분의 기억 속에서 테이트리아가 바다 빛 진주를 빼낸 덕에 그것을 되찾기 위해 쏟아져 나온 골렘들로 인해 파괴당했던 이곳.
최초의 역사, 원래대로 흘러야 하는 세계는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
이미 이 세계는 테이트리아가 다시 짜 맞춘 역사대로 흘러간 것이 본래대로 흐른 역사보다 무구하게 길다.
그러니 케인 자신이 테이트리아를 대신한다고 하여 이 세계가 다시 원래의 역사대로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뒤바뀐 세계라도 그 끝이 정해진 멸망이 아닌 새로운 미래로 흘러가도 되지 않을까.
‘내가 해야 한다.’
그리고 그건 케인이 해야 할 일이었다. 아델리안이 아직 모든 게 망가지지 않은 시간 속에서 눈을 뜨게 해줬으니까.
테이트리아의 영혼을 불살라도 멈추지 않는 루프를 멈추는 건 오롯하게 자신의 몫이겠지.
케인은 한참이나 녹음의 수해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인 님, 어디 가십니까.
같이 그 광경을 바라보던 리프의 물음에 케인이 말했다.
“해답을 찾으러.”
* * *
“너 괴물이야?”
“아카데미에서 펴낸 사전적 의미로 따지자면 저보다는 라헬라리브로아 씨가 괴물이 아닐까요?”
라헬라는 자신의 앞에서 그림자로 된 의자에 기대앉아 술을 마시는 체이서를 응시한 뒤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 사전을 펴낸 학자가 우리를 보면 분명 괴물의 정의가 바뀔걸.”
라헬라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저었고 그 말에도 체이서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그냥 그렇게 적혀있겠죠. 케인이라는 두 글자 정도?”
어디에 비비겠어요, 절. 하는 그 모습에 라헬라의 점액질 같은 촉수 머리칼이 꿈틀거렸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닌데…….”
아니 그런데 그 케인이란 인간은 그냥 규격 외 아닌가?
라헬라는 체이서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만든 사념 공간에서는 죽어도 정말로 죽는 게 아니라는 그 장점 하나를 지독하게도 뽑아내는 저 사내가 두려울 정도였다.
“도대체 그런 미친 짓은 왜 하는 거야.”
라헬라는 혀를 내둘렀다. 원래 마법사들은 머리가 전부 이상한 이들 뿐이다.
전부 연구와 더불어 실험만 하다 보니 다 미쳐버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단언하건대 체이서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흑마법사도 그런 짓은 안 할 거 같은데.”
“그야 흑마법사는 안 하겠죠.”
혈마법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니까, 하며 체이서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아니 그 전에…….”
온갖 인체실험을 자행하는 건 분명 흑마법사다. 하지만 그런 이들도 자신의 몸으로 하진 않는다.
하지만 체이서는 이곳에 박혀 온갖 것을 자신의 몸에 실험해대기 시작했다.
체이서는 외도 마법사. 피와 그림자. 그리고 감정 및 정신을 조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피나 그림자를 움직이고 감정을 북돋거나 혹은 가라앉히는 일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일반 원소 마법사와는 달리 외도 마법사의 경우 기초적인 주문 외엔 전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법.
제대로 된 스승도 제시된 길도 없는 마법이라는 건 필연적으로 목숨을 담보로 한 수련이 강제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걱정을 접어둘 수 있는 라헬라의 공간을 알게 된 체이서가 할 일은 뻔한 것이었다.
“고작해야 제 몸의 피를 다 빼본다거나 하는 일 좀 해봤다고 괴물이라니 너무해요.”
“그거만 한 게 아니잖아요, 그거만 한 게.”
능력을 최고로 쥐어짜면 무엇까지 가능한지.
그리고 자신의 피 한 방울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림자를 어디까지 퍼트릴 수 있는지.
타인의 감정과 정신에 얼마나 관여할 수 있는지.
비록 가장 후자의 경우는 주어진 조건 하에 완벽하게 파헤치지는 못했으나 체이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체이서가 검은 뱀처럼 웃으며 라헬라에게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제 몸의 피에 마정석을 녹여 넣어볼까요?”
“미쳤어?”
라헬라는 다 마신 우유 잔을 들고 버럭 소리쳤다.
* * *
핏기가 없음에도 창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에게 차를 건네는 손가락은 대리석을 조각해 만든 것 같다.
볼 때마다 신비로운 느낌이다. 요정족은 대부분 저런가?
나는 가뮈르가 건네주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응시했다.
“엘프는 천성이 느긋하다는 대륙의 속설이 있어 직접 오셨나 했습니다.”
“아. 그럼 온 김에 그것도 말할까?”
내 말에 바하디가 가뮈르의 뒤에서 가뮈르를 살짝 흘겨보는 것이 어지간히 빠듯하게 군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일단 정령의 숲에 있는 엘프들은 전부 무장을 갖춘 상태입니다.”
그 외 대륙 각지로 흩어진 다른 동족들은 1차 및 2차 소집 후 훈련을 마친 뒤 최종 소집 전까지 일상으로 돌려 보내둘 거란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원래라면 전문 병과가 없었지만 이번 일로 개편하게 되었으나 사실 아주 큰 의미는 없을 거 같군요.”
가뮈르가 내주는 서류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엘프는 종족적인 연유로 활과 정령술에 능하다.
더불어 수명도 길지.
처음엔 정령술, 혹은 궁술. 그것도 아니면 아예 다른 것에 손을 댄다 하더라도 몇십 년, 혹은 백 년 이상 되면 결국 다른 것에도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장수종들은 대부분 여러 분야에서 인간보다 강점이 많았다.
대신 그만큼 종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현저히 낮은 편이라는 게 흠이긴 했다.
인간들은 전쟁으로 10만 명이 죽어 나간다 해도 몇 년이면 인구수는 다시 끌어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장수종의 경우 너무 한 번에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면 다시는 회복 못할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걸 따질 일은 아니었다.
‘별 수 없나.’
테이트리아가 다 죽이는 것보단 어떻게 같이 연합하고 저항하는 게 맞지…….
나는 몇 가지 자료와 더불어 보고를 마저 받은 뒤 입을 열었다.
“이번에 요정의 기사에게서 신발을 내가 받아야 할 거 같은데.”
“최저한의 기준은 충족하셨군요.”
가뮈르가 보석안으로 내 얼굴을 천천히 훑어본다.
“셋 이상의 요정왕에게 인정받았으니까.”
페어리도 요정이다. 그러니 그들을 이끄는 페어리퀸은 당연히 요정왕이지.
이게 크게 잡으면 엘프나 드워프같이 깐깐하거나 아예 정령, 혹은 요정계에 존재하는 순혈 요정의 대표까지 올라가야 하지만 나는 살짝 편법을 쓴 거다.
이렇게까지 해서 쓸 수 있는 신발은 사실 부위가 부위니만큼 전력상승이 아주 큰 건 아니었다.
이노센트 사가에서도 이벤트 아이템 정도였고.
본래도 그럴 것이다. 요정은 변덕스럽고 장난기가 심하니까 가치에 비례한 조건을 걸지 않는다.
고작 빵 한 덩어리에 천금을 매기기도 하는 게 요정족이라 본디 내가 얻으려는 신발 자체는 사실 이 고생을 해서 얻을 필요는 없었다.
나처럼 마나고 오러고 못쓰는데 드래곤이나 드래곤만큼 강한 이들과 함께 돌아다닐 거 아닌 이상…….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던데…….’
난 왜 머리도 몸도 고생하는 기분이지.
조금 슬픈 느낌으로 차를 마저 마시는데 가뮈르가 나무 넝쿨이 엉겨 붙은 것 같은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케인에게서 들어 아시겠지만 아리나이드의 성에는 녹음의 고리가 있습니다.”
“안 그래도 그거 케인이 간 김에 가져 오자던데.”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내가 가뮈르에게 묻자 가뮈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는 말을 하지 않았나 보군요.”
그냥 있다길래 가면 어련히 알아서, 하는 느낌이긴 했다. 나도 그냥 그게 어디에 있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하이엘프인데다 대장로인 가뮈르를 데리고 가 살짝 뒷배로 좀 써가면서 쉽게 해볼 생각이었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얻기 힘든가?
“설산에서도 마나 파장의 교란이니 하며 좀 찾기 힘들었는데. 위치가 확실하지 않나?”
다들 설산의 눈물처럼 녹음의 고리도 아리나이드 어딘가에 있다 정도로만 알고 있다면 살짝 번거롭긴 할 것이다.
요정의 나라 전체를 뒤져야 할 수도 있으니.
“아닙니다. 녹음의 고리는 그 행방이 확실하죠.”
“그럼 뭐 지키고 있는 드래곤이나 그런 존재라도?”
어지간하면 케인 선에서 마무리 될 텐데.
아 설마 불의 정수처럼 무언가의 신체라서 죽이지 않는다면 못 받는다거나.
몬스터면 그나마 괜찮지만 그게 아니라면 조금 곤란하다. 우리가 좋자고 죄 없는 이를 죽이는 건 좀 꺼려지니까.
외과적인 수술로 빼낼 순 없나.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기니 가뮈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녹음의 고리는 아리나이드 왕실의 왕관입니다.”
“왕관?”
“그렇습니다.”
“왕관?”
재차 묻자 가뮈르가 옅게 웃으며 차를 마신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남의 나라 왕궁에 쳐들어가서 왕이 쓰고 있는 왕관을 받아야 한다?
보통 관을 넘긴다는 건 그냥 나라를 준다는 의미라 말 그대로 나라가 정복당했을 때나 타인의 손에 넘어가는 게 그건데.
그걸.
‘케인 이 자식.’
무슨 돌맹이 주우러 가자는 듯 말했네, 이거.
나는 이마를 탁 짚으며 한숨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