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51)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51화(51/373)
“이게 다 무슨…….”
훌라와 구경나온 루나의 가족들이 입을 쩍 벌린다.
나는 크루거의 반지를 열어 그동안 모아둔 식량을 벌판 한가운데 쏟아내었다.
거의 작은 동산 만큼 쏟아지는 온갖 자루들.
밀과 옥수수, 귀리와 보리 같은 기본적인 곡물부터 저장성이 높은 감자나 고구마, 건조된 빵과 당근에, 사과 같은 부자재나 설탕 소금 같은 필수 조미료까지.
“이 정도는 해줘야 계약서에 사인하기 잘했단 생각하지 않겠어?”
결국 신의 계약서에 지장을 찍어버린 훌라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더불어 금화를 궤짝으로 쌓기 시작하니 훌라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그나저나 저 아이가 루나의 마지막 동생인가.’
조금 떨어진 천막 뒤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수인족.
그런데 얼굴엔 표범 무늬가, 귀는 토끼 귀다.
‘하이브리드?’
나중에 대도시에 들릴 일이 있다면 수인족에 대한 책을 좀 읽어야겠다.
잠시 우리 쪽을 보다 다시 천막 뒤로 숨는 그 아이의 모습에 나도 못 본 척한 후 주머니에 손을 넣는 척 아공간을 열어 세이렌을 꺼냈다.
“난데. 내가 말한 건 어찌 되어가?”
세이렌을 쥐고 알카이도에게 말을 거니 이어폰을 낀 것처럼 내 귀에만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챠비드의 국경 근처에 지부를 하나 내어 물류 파악 및 상단을 적극적으로 운영할 계획입니다.>
“상인 관련 트레잇이 하나라도 나오기 전엔 절대 휴일 주지 말고.”
나는 자신의 앞날을 모른 체 식량과 금화를 보며 꿈을 꾸는 표정으로 궤짝을 어루만지는 훌라를 보며 웃었다.
“족장님, 이게 다 무엇입니까.”
때마침 훌라의 부족원으로 보이는 이들 네 명이 다가와 그녀에게 묻자 훌라가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때 본 표범 무늬의 남자와 더불어 새로운 이가 한 명.
‘물소인가.’
건장한 몸과 부리부리한 눈. 양옆으로 난 물소의 뿔이 거대하다. 한쪽 뿔은 부러졌던 듯 강철로 윗부분을 덧씌워 놓았고 다른 뿔은 살짝 무늬를 조각해 뒀다.
거친 천 옷을 입고 있지만 터질 듯한 근육은 감출 수가 없는 게, 어린애 머리통만 한 주먹으로 맞으면 한 방에 가겠는데…….
등엔 자기 몸통만 한 양날도끼를 매고 있어서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으나 케인은 호승심이 이는 듯 슬쩍 내 앞으로 나온다.
“들어가.”
그에 내가 한소리하곤 훌라에게 설명을 들은 듯 쌓인 물자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가슴을 퉁퉁 두드리며 인사했다.
“파티나의 전사 댜미드요. 당신들이 예언자가 말한 종결자로군.”
구원자가 아니라?
나는 의외의 단어에 침묵하며 훌라와 대전사 댜미드를 바라보았다.
“굴레를 끝낸다느니 뭐 그런 말을 하는데. 난 어려워서 모르겠지만. 일단 적은 아니라고 하더군. 흐하하.”
파안대소하는 물소를 보며 나도 그냥 웃었다. 일단 뭐 적이 아니란 소릴 했으면 된 거지.
구원자가 아닌 종결자인 이유는 아마 챠비드가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와서 지원하니 좀 달라진 게 아닐까.
당장은 그 정도로만 짐작되었다.
“하지만 족장을 꼬여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한 건 너무하군.”
웃으면서 말하는데 묘한 위압감.
한걸음 나에게 다가오는 댜미드의 모습에 케인이 다시 내 앞으로 나오려는 걸 손짓으로 멈춘 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당신네 인간들은 다를지 몰라도 우리에게 족장은 나름 할 일이 많은 자리요. 훌라는 아직 어려 신임받기 위해선 더 많이 일해야 하고.”
그래서 족장 신분에 사람들을 이끌고 사냥꾼을 감시하러 초원을 돌아다닌 건가.
나는 킁 하고 더운 콧김을 뿜는 댜미드를 보며 웃었다.
“지금 나와 한 계약이 훌라의 지위를 더 굳건하게 만들면 만들었지, 해가 되진 않을 거야.”
내 말에 설명해보라는 듯 댜미드가 팔짱을 낀다. 키가 2m는 넘겠는데, 올려보니 목이 뻐근한 정도.
나는 고개를 조금 치켜들곤 여유 있는 음색으로 말을 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 그 정도는 으뜸 부족 정도면 족장이 없어도 잠시는 괜찮겠지. 그 시간 동안 훌라가 상인으로서 배우고 작은 규모나마 상단을 직접 이끌면 어찌 될까.”
애초에 훌라는 챠비드를 위해 나선 것이다.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상단이 하나라도 생기면 다른 상단도 가격을 조금이나마 조정하기 시작하겠지.
거기에 그들이 단합해 훌라의 상단을 압박하려 해도 무력으로는 으뜸 부족을 업고 있고 공급으로는 크루거 가문.
즉 내가 있다.
차라리 더 큰 규모로 상단을 쳤으면 쳤지 훌라의 공급처를 말릴 수는 없지.
거기에 훌라를 치려고 규모를 키우면 훌라 쪽에서도 명분이 있으니 다른 부족을 규합하기 더 쉬울 터.
‘다른 상인들이 크루거 가문에 항의해도 방법이 따로 있고.’
작은 파이로 싸울 것이 아니라 파이 자체를 크게 만든 것이라고 입을 털면 된다.
식량보다 마진이 많이 남는 건 기호품과 사치품, 혹은 건설 토목 같은 것들.
식량을 안정화한 후 챠비드가 발전할 기미만 보여줘도 불만은 쏙 들어가겠지.
“지금 내가 내준 이 식량과 금화는 그에 대한 원조이니, 훌라의 입장에서 실패해도 손해 보는 건 약간의 시간뿐인데. 할만하지 않아?”
“그래. 맞아, 댜미드. 우린 그동안 너무 웅크려 있었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모험이 필요한 순간도 있는 거다.”
훌라가 다가오며 한마디 더 얹자 댜미드란 대전사도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쿵쿵 치며 인사한다.
“솔직히 예언자의 말을 듣고도 나는 당신을 의심했소. 이 좋은 기회를 아무 대가 없이 왜 우리에게 주겠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유를 꼽자면 있더구려.”
갑자기 훌라가 조금 아깝지만 하며 덧붙이는 말에 다른 이들을 도와 수레를 구해 짐을 싣던 루나가 얼른 뛰어온다.
“우리 도련님은 그런 파렴치한 분 아니에요!”
아니, 뭐가 뭐가?
“도련님은 아주 원대한 계획이 있으시구, 미래를 위해 훌라 님에게 지원해 드리는 거니 오해하지 마세요.”
“그, 그런 거요? 하지만…….”
“그리구 제일 힘이 센 분이 안 돕구 자꾸 여기서 뭐 하세요. 일하세요.”
루나가 날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보는데? …아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거야 맞긴 한데.
나는 대전사 댜미드를 데리고 사라지는 루나를 바라보다 다시 훌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튼. 일단 저 식량으로 급한 곳 불은 끄고. 금화는 필요한 곳에는 아끼지 말고 쓰다가 상단 창단할 때 보태.”
“그래……. 그리고 고맙다. 열심히 해서 내가 네 앞날에 한 줌 힘이 되도록 하마.”
나는 그에 그냥 웃었다.
* * *
“정말 더 안 있어도 괜찮아? 우리끼리 다녀와도 되는데.”
한 손으로는 고삐를 바투 쥐고 다른 손으론 코덱스를 열어 내용을 훑다가 물으니 루나가 고개를 젓는다.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지만… 나는 밤색 암말을 루나네 부족에게 주고 대신 회색 털에 흰 점이 박힌 야생마를 타고 있는 제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미궁 도시 라비린에서 나왔을 땐 내가 속성석 인첸트에 정신이 팔렸고 그 이후엔 훌라와 동행한 덕에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쳤었지만.
‘제로도 슬 파악에 들어가야지.’
단순히 요리 노예로만 쓰려고 데리고 온 건 아니니까.
[제로―도플갱어의 시작과 끝]대표 Traits : [복제(D+)] [상냥함(A+)] [요리(S)]
히든 Traits : [천변만화(A)] [위엄(C-)]
요리가 대표 트레잇으로 올라왔고 상냥함이 올라갔으며 위엄이 내려갔다. 아마 우리랑 있으면서 막내 취급당해서겠지.
그리고 저 천변만화. 저게 뭔지 애매한데, 제로가 도플갱어라는 종족임을 고려한다면 아마 외형 변화에 관련된 트레잇이 아닐까 추측하는 정도.
‘애초에 시체를 삼키지도 않고 지금 저 모습이니까.’
내 아공간엔 혹시 몰라 남겨둔 제로의 몸이 그대로 있었다.
‘그럼 저 몸을 죽이면 또 시체가 남을까 아니면?’
제로가 알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도망갈 생각이지만. 알아두면 여러모로 쓸모 있을 텐데.
‘거기에 약간의 양심만 버리면 제로를 필요할 때 죽였다 살렸다 해도 되고…….’
솔직히 나에게 붙은 트레잇이 부유감이 아니라 뭐 사이코패스 같은 거였으면 시도해 봤을 일이다.
“어, 왜 춥죠?”
“날씨는 선선하구 바람두 안 부는데……?”
순간 제로가 부르르 떨어냄에 난 슬쩍 시선을 먼 지평선 쪽으로 돌렸다.
‘아니, 지평선이 아니네. 저거 뭐지.’
챠비드의 안으로 제법 들어와서일까, 지평선 대신 저 끝으로 가물가물하게 산 같은 것이 보인다. 아주 가늘게 솟은 그것은 일반적인 산맥이 아닌 화산처럼 보였다.
대충 지평선이 보이는 거리가 4~5km 정도던가.
그런데 산으로 보이는 것의 끝만 살짝 보이는 거리라면 저 산의 위치는 더욱 멀 터.
내가 그것에서 눈을 떼려는데 케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안개군.”
“정말 흩어지지도 않고 저 부분부터 짙은 안개가 있습니다, 선배님들.”
“이상해요…….”
안개?
나는 제로가 손가락질하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안개라고?”
“하긴… 저걸 안개라구 해야 할지 의문이 드는 모습이긴 해요, 도련님.”
아니. 내가 의문문으로 말한 건 그 이유가 아니라…….
내 눈엔 안개가 안 보이는데.
아니, 정확하겐 안갯속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살짝 흐릿한 연기 정도? 루나나 제로가 말하는 만큼 완벽하게 안이 보이지 않는 농도가 아닌, 오히려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안개의 존재도 모를 정도.
나는 저 멀리 토굴 같은 구멍과 더불어 그 근처를 배회하는 오크와 리자드맨들을 바라보았다.
당장 보이는 건 일곱 정도인가. 토굴 주위를 맴도는 걸 보니 유적의 주인이 일부러 깔아 둔 것 같은데.
아마 안갯속에서 괴물과 마주치면 혼비백산할 테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싸울 바엔 도망칠 테니, 효과적으로 유적에 사람을 밀어 넣으려는 장치인가.
‘도박쟁이 발부스.’
나는 저 유적 던전에서 우릴 기다릴 이의 이름을 한번 되뇌곤 낮게 숨을 흘렸다.
“말은 여기 두고 가야겠는데?”
“그럼 저는 말을 지키고 있을까 합니다. 아델리안 님.”
“아니.”
제로가 냉큼 하는 말에 난 웃으며 거절했다. 지금은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상태지만 데리고 다니며 뭐라도 경험을 쌓게 해야지.
‘도플갱어의 종주나 되는 녀석이 무능력할 리가.’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근처 사목에 말을 묶는 제로를 보다 말고 안개 쪽으로 걸음 하는 케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그래?”
“기척이 느껴지다 말다 하는군. 이 안개가 흐름을 방해하는 것 같다.”
그리곤 검집에서 검을 뽑아냄과 동시에 오러를 둘러 안개를 가른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솜처럼 케인의 검격에 잘리듯 하다 스믈스믈 다시 뭉쳤다.
“분명 안에 살아 있는 무언가가 느껴지긴 하는데, 이게 방해하니 몇이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군.”
좀 더 수련해야겠다 중얼거리는 케인을 나는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인공 놈이 진짜 뭐라는 건지. 애초에 저 안개는 마법적으로 생성된 걸 테니 그걸 뚫고 느낀 네가 비상식적이다, 인마.
“일단 들어갈까요?”
루나가 머뭇거리다 내 곁에 와서 하는 말에 나는 끄덕하곤 코덱스를 열었다.
“한 번의 힘을 무의미하게.”
안갯속이 잘 보이는 걸 티 낼 필요는 없지. 나중에 도박쟁이를 만날 때 최소한의 꼬투리도 잡힐 필요 없다.
그 녀석, 무슨 아티팩트가 있는지 행운 같은 트레잇이 붙은 유닛은 유적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니까.
나는 모른 척 케인과 루나, 제로의 몸에 파츠 실드를 걸어낸 뒤 케인과 루나를 선두로 나와 제로가 후미로 진형을 잡고 긴 줄을 서로 나눠 잡았다.
“혹시 줄이 끊어지거나 놓고 이탈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내가 최대한 찾을 테니. 하고 말하는 케인을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안갯속으로 들어가는데.
“진짜 손을 뻗으면 손끝이 겨우 보이는 정도네요.”
“무섭습니다…….”
나는 슬쩍 내 곁에 붙는 제로를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넌 죽어도 다시 살아나잖아.”
“딱 한 번만 그렇고 또 죽으면 아닐지도 모르잖습니까…….”
아, 그러네.
아니면 쿨타임이 어마어마하게 길던가.
내가 잠시 생각하는데 케인이 멈추더니 검극을 앞으로 겨눈다.
“뭔가 온다.”
줄을 놓으며 동시에 앞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 뛰어나가면서 검을 휘두르는 케인.
분명 안갯속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을 텐데 정확하게 케인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진 리자드맨의 꼬리를 잘라낸다.
그 잘린 꼬리가 루나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루나 또한 줄을 놓고 앞으로 나섰다.
“소리, 소리도 거의 안 들리고 앞이 안 보입니다.”
안갯속으로 들어가면 소리마저 먹히는지 바로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마치 먼 곳에서 울리는 것 같은 낮은 소리만 귀로 들린다.
나는 일단 추이를 지켜보며 케인과 루나가 밀리는 순간 도우려 했는데 그 순간…….
‘끄어어어억!’
들리지 않을 오크의 비명이 들리는 것만 같다.
나는 도끼를 피해 바닥에 웅크렸다가 다시 솟아오르듯 몸을 띄우며 오크의 중심을 차는 루나를 보며 허리를 숙였다.
‘저렇게 귀여운데… 몬스터 거기 분쇄자…….’
그때 던전 앞에서 들은 말이 스쳐 지나간다.
게다가 케인이 바로 옆에 스쳐 지나가며 봤을 텐데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하고 있단 눈치.
둘이 진짜 뭐하고 돌아다녔냐…….
나는 아찔한 기분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