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57)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57화(57/373)
마치 한낮에 피어났던 서리처럼 푸르고 흰빛을 띠던 얼음의 속성석이 천천히 증발해 사그라든다.
그것이 지니고 있던 냉기의 마나가 불의 정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의 마나와 만나 허공이 일그러지듯 마나의 뒤틀림이 생겼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뒤틀림이 이곳의 곳곳에서 지속함에 마나의 격류를 잠재우고 흐름을 제어하는 마법사 중 몇몇이 다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대륙의 속성석이 당분간 씨가 마를 정도로 긁어모으고 있으나 부족합니다. 가주님.”
허공에서 맴돌던 불의 정수에서 간간이 폭발하듯 채찍 모양으로 튀어나오는 불의 마나를 익숙하게 흡수하던 카이만이 미간을 모았다.
“게다가 지금 챠비드의 어딘가에서 불의 마나가 날뛰는 중입니다, 카이만 님.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으나 그것에 공명해 불의 정수도 더욱 난폭한 마나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같은 나라 안 정도의 거리에선 이렇게 공간 격리 마법진을 깔아 두었어도 공명한단 소리군.”
카이만은 눈으로 빚어 만든 것 같은 아이스 엘프들이 창대에 찔려 불의 정수로 걸어가다 그들이 가진 차가운 마나를 빼앗기며 미라처럼 변해 죽는 것을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남쪽 군도에서 폭풍이 치고 비가 내리는 게 끊임없다던 그 섬에 대해 조사해 온 것을 말해 보아라.”
카이만의 말에 그의 앞에 몸을 숙이고 있던 사내 둘이 고개를 들며 번갈아 대답했다.
“그곳에 살던 주민들의 말로는 약 40년에서 50년 전부터 해신이 노했다느니 인간에게 버림받은 인어가 우는 것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했으나 저희가 알아본 바론 아티팩트 같습니다.”
“허나 인어와 관계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뱃길로 일주일 정도 걸리는 곳에 인어의 둥지가 있다고 하더군요.”
“직접 인어의 둥지까지 가 수소문해 본 결과, 누군가 인어의 보물을 들고 도망가 그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인어 왕이 수면기 중이라 경계심이 심하고 폐쇄적이라 그 이상의 정보는 얻어낼 수 없었습니다.”
카이만의 유독 붉어진 손끝이 아직은 새하얀 턱 가의 피부를 매만졌다. 그 손끝에 연한 선홍빛 마나가 피부 아래로 맴돌았다.
“보물을 들고 도망갔음에도 인어들이 별다른 행동을 취하는 대신 아직도 아티팩트가 그곳에 있다라……. 흐음, 그 폭풍우가 결계라면, 그리고 그것이 아티팩트의 힘이라면.”
가져야지.
카이만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아주 미세하게 커졌다가 작아졌다 움직이는 불의 정수를 눈에 담았다.
“확실한 것은 아니나 인어의 왕족 중 하나가 그 아티팩트를 들고 섬에 있는 것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몇 안 되는 왕족 정도의 지위가 아니라면 아직도 인어족이 회수하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의 말에 카이만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분간 불의 정수는 이 상태를 유지할 테니 마법사들을 데리고 가 결계를 파괴하도록.”
그리고 그 안의 아티팩트를 가져오라.
카이만의 그 말에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 * *
한동안 이 주위를 파괴하며 붙었던 케인과 레피드의 싸움은 거의 반나절이 지난 후 레피드의 마나가 고갈됨에 끝이 났다.
눈치를 보아하니 레이첼이 사라지기 전 레피드를 인간 기준으로 고위급 마법사 정도로만 힘쓸 수 있게 봉인한 결과인 거 같은데.
그 덕에 그 화려하던 옷도 머리도 온통 찢어지고 베이고 망가진 뒤 흙투성이가 되어 케인에게 목이 잘리기 직전에야 나는 케인을 불러 그 사달을 멈췄다.
“그만하고 이리와, 케인. 명령이다.”
“…운이 좋군, 너는.”
케인이 헐떡거리는 레피드 위에 올라타 검을 바닥에 박아 넣어 작두처럼 레피드의 목을 썰려다 말고 천천히 일어나자 레피드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제 목을 잡았다.
아직 마나가 모이지 않은 듯 손가락 새로 울컥울컥 쏟아지는 핏물을 바닥으로 흘리던 레피드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질린 눈으로 케인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진짜 인간이긴 한가 저거…….”
레피드의 말에 겨우 멈춰 내가 준 물을 마시던 케인이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고 그에 레피드가 깜짝하더니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아, 그만해, 그만해. 보내줘, 보내줘.”
그에 나는 2차전이 시작될까 봐 건성으로 말리며 몰골이 말이 아닌 레피드를 향해 미소를 띠었다.
“제가 겨우 말렸으니 이 틈에 어서 도망치시지요.”
내 비꼬는 말에 레피드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이익. 인간. 넌 내가 기억하마. 이리 살아가는 것을 신께 감사하라.”
겨우 마나가 조금 찬 듯 목을 치료하던 레피드가 노려보며 하는 말에 케인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마시고 남은 생수를 머리에 뿌리며 열을 식혔다.
‘크, 복덩이네. 복덩이야.’
사실 얻은 것만 따지면 아주 복덩이다, 저 드래곤.
나는 왁왁대며 시비를 걸면서도 케인을 피해 천천히 멀어지는 레피드를 향해 잘 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마나가 어느 정도 차면 어디론가 이동하겠지.
비록 레피드 때문에 펜던트와 실드 팔찌는 날아갔지만.
딱 그것만 제외하면 사실 내 손해는 없었다.
내가 죽을 뻔한 것도, 사실 죽지는 않은 데다 리커버리덕에 몸에 남은 후유증도 없고, 더군다나 레이첼과 후일이 기약 된 게 제법 큰 성과.
‘거기에 제일 중요한 이득은 따로 있고.’
나는 불을 피우는 루나와 급하게 무언가를 손질해서 만들려는 제로. 그리고 물에 젖은 모습으로 날 기다리는 케인을 바라보았다.
“그냥 바로 클린 써달라 하지 왜.”
“그냥 겉이 깨끗해지는 것과 물로 한번 씻는 건 다르니까.”
나는 코덱스를 꺼내 케인에게 클린을 쓴 뒤 마법 천막을 펼쳤다.
이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만 마리의 몬스터는 협곡으로 들어가 그 입구를 성벽 같은 거대한 돌로 봉인했으니 당분간 안전할 터.
‘설마 몇 년 후 있을 몬스터 침공의 이유가 이건가?’
분명 악신교단이 몬스터 웨이브를 꾸민 것까진 알고 있으나 그 많은 몬스터를 어찌 모았나 했는데…….
최소한 반은 여기 있는 것 같다.
아마 원작에서도 중2병… 아니, 마룡병에 걸린 레피드가 몬스터를 모아 마룡놀이를 하기 전에 레이첼이 한번 막았을 것이다.
그리고 레이첼은 은근히 생각하는 걸 귀찮아하니 대충 지금처럼 몬스터를 협곡에 몰아 놓고 봉인하라 했을 테고.
레피드도 아마 어디론가 가버렸겠지.
‘그걸 나중에 악신교단 쪽에서 발견해 자신들의 전력으로 써먹은 건가.’
아마 맞을 것이다.
일단은 당장 저 많은 몬스터들을 죽일 방법도, 애초에 저 봉인을 풀 방도도 없으니 두고 가야 하지만.
‘나중에 기회 되면 다시 돌아와야지.’
나는 바닥에 눌어붙지 않게 수프를 잘 젓고 있는 제로를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기절해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또 도련님이 저희를 구하신 거죠?”
“…아델리안 님, 저도 강해지고 싶습니다.”
둘 다 기가 팍 죽어 쪼글쪼글해진 모습. 나는 눈동자만 움직여 루나와 제로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뭘 그리 기죽어 있어. 지금 날 봐. 다친 곳도 하나 없잖아. 원래 밥 먹을 땐 마음 편하게 먹는 거야. 괜찮으니 걱정 마.”
“그치만…….”
“하지만…….”
케인이 특출난 게 사실이지만 그건 루나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여행을 떠난 뒤 얼마나 지났나. 1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나 성장할 수 있었을까.
드래곤을 만난 것은 말 그대로 교통사고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워낙 파워 인플레이션이 심한 후반으로 가면 드래곤이 측정기 역할을 한다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소수의 일.
루나는 이제야 자신의 재능을 알아가는 중이고 제로는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아이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제로는 특수 종족이니 검 같은 냉병기보단 마법 쪽일 거 같긴 하지만.’
그건 차차 내가 알아내어 개화해 주면 그만.
“비교를 절대 저놈이랑 하지는 말고.”
내가 케인을 엄지로 가리키며 하는 말에 시무룩하던 루나가 눈을 끔뻑거리다 한소리 한다.
“케인은, 좀 심해요. 도련님께 도움이 되구 싶지만 케인처럼 되려 했다간 마신에게 영혼을 30번쯤 팔아두 힘들 거 같아요.”
나는 버섯과 닭고기, 각종 채소를 켜켜이 꽂은 뒤 발부스도 맛보고 극찬한 소스를 발라 모닥불에 직화로 굽는 제로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내일은 오후까지 늦잠 자고 일어나서 이동하자.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겼었으니까. 이곳이 어디인지는 천천히 알아보고.”
“도련님… 길을 금방 찾을 수 있을까요?”
“뭐, 정 찾기 힘들면 한쪽으로만 걸어가 보는 수밖에 없겠지?”
챠비드이니 마을이나 도시를 발견할 가능성은 낮고, 지나는 부족이라도 만나면 잘 물어봐야 한다.
말도 찾아야 하고.
잠시 상념에 잠기다 모닥불에 의해 맛있게 잘 익은 꼬치와 눋지 않고 잘 끓여진 수프를 한 그릇씩 챙기는데 뒤쪽에서 스극거리는 모래 소리가 들렸다.
“큼. 하찮고 가련한 인간아. 네가 감히 나를 모실 기회를 주마.”
그새 옷 같은 걸 바꿨는지 겉모습은 깨끗해졌지만 뭔가 곤란해 보이는 얼굴의 레피드가 다시 슬금슬금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아주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하는 말에 나는 케인이 검을 뽑아 들고 일어나기 전에 손을 들어 앉힌 뒤 입을 열었다.
“뭐, 어떤 기회?”
이 황무지에는 어울리지 않은 번쩍거리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레피드가 슬쩍 나를 보더니 모닥불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 위대한 나에게 그 하찮고 저급한 먹을거리와.”
그리고 이어 마법 천막을 바라보는 레피드.
“볼품없는 천막을 바치는 영광 말이다. 물론 너희는 내가 쉬는 동안 밖에서 대기하는 기쁨을 느껴도 좋다.”
예상하건대, 레피드는 세상 물정 모르는 드래곤이 분명하다.
어디서 무슨 마룡왕의 전설 이런 구닥다리 소설이나 한 천 년 파고들다 나온 방구석, 아니 레어 구석 히키코모리 같은 거지.
저 당당하고 뻔뻔하다 못해 내가 되려 낯 뜨거워지는 자의식은 드래곤 특유의 오만함인가 하고 생각하면서도 레이첼이나 원작에서 본 드래곤 장로들을 생각하면 나이 든 드래곤들에게선 본 적 없는 자아의 비대함이라.
나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응, 꺼져.”
“뭐, 뭐?”
나는 보란 듯 고소하고 진하면서도 끝 맛이 부담스럽지 않게 단맛이 도는 옥수수 수프를 한 모금 마셨다.
그에 레피드의 눈이 내가 든 접시와 날 번갈아 보다가 꿀꺽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을 만큼 크게 목울대가 움직인다.
“인간의 몸, 좀 불편하지? 피곤하고 지치고 배고프고. 드래곤은 유희 생활을 할 때 자신이 정말 그 종족이 된 것처럼 군다던데. 그쪽은 아직 배가 덜 고프다. 그치?”
내 말에 브레스를 얼굴로 쏠 것인지 울그락불그락 해지는 레피드를 보다가 나중을 생각해서 그만 괴롭혀야지 한 뒤 아공간에서 통나무 의자를 하나 더 꺼냈다.
저런 덜자란 드래곤이라도 나중에 다 필요한 데다.
‘뭐라도 하나 입에 물려주고 레이첼에 대해 들으면 이득이지.’
“어디서 굶어 죽어두 좋은데…….”
“수프에 몰래 컥커 고추라도 빻아서 뿌릴까요, 토끼 선배님?”
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레피드는 루나의 눈빛에 한 삼백 번 죽었다 지금.
나는 루나의 귀를 쓰다듬어 준 뒤 눈에 불이 붙을 거 같은 케인도 발로 슬쩍 찬다.
“먹을 것과 잠자리는 나눠주지. 대신 조건이 있어.”
“뭔가.”
수프를 받으며 웃음을 참는지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레피드를 보며 나는 느긋하게 말했다.
“마나가 다 차면 우리를 원하는 곳으로 이동시켜 줄 것.”
“그런 일이야 나에게는 힘든 일도 아니로군. 좋다.”
수프를 받은 뒤 꼬치까지 손을 내미는 모습에 내가 살짝 제지하곤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까 나타났던 드래곤에 대한 게 궁금하거든.”
“흥, 그 폭력 드래곤. 그에 대해 말하라면 삼천세계가 지나가도록 말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나는 금세 투덜거리는 레피드를 보곤 웃으며 손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