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Extra in a Trash Game RAW novel - Chapter (97)
망겜 속 엑스트라가 됨-97화(97/373)
처음엔 사소한 일이었다.
“웬일로 어제 외출했어? 카빌리에 보석상에서 뭐 산 거야?”
“그게 무슨 말이지? 난 어제 아카데미 밖으로 나간 적 없어.”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어떠했더라.
“그럼 잘못 봤나 봐.”
그게 시작이었다.
내가 가지 않았던 장소와 시간, 하지 않았던 행동과 표정.
그것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와 나를 옥죄던 것은.
가디아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길게 흘러내려 마치 빛을 뿌리는 것 같은 청은발과 아이스 블루의 눈동자.
고압적으로 내려보는 것 같은 시선과 붉은 입술.
자기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자니 객관성이 결여될 수 있어 조금 박하게 말한다 해도 어디에서 쉽게 보일 외형은 아닐 터.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디아는 티 나지 않게 입 안에서 혀를 짓씹었다.
겉으로는 언제나 고아하게. 흠이 잡힐 구석 없이. 자신의 단점이란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남성에 대한 불신 외엔 남에게 보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리하여 괴로움마저도 속으로 삭이는 법을 알고 있었기에.
겉으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피비린내가 나는 숨을 삼켰다.
‘감히 누구인가.’
자신과 같은 용모로 왕도를 돌아다니며 격에 떨어지는 행위를 하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자신이 아니라 하기엔 너무나도 명확한 모습.
누군가 찍어온 수정구 속 인물은 가디아 자신이 보아도 똑같았기에.
“리제가 늦는군.”
잠시 나간 하녀, 리제가 아직 돌아오지 않음에 가디아는 천천히 일어났다.
시킨 일에 대한 늦은 처리는 수업을 다녀와서 해도 될 테니, 지금은 강의실에 가는 것이 우선.
“어제도 도박장에서 누가 봤다던데.”
“쉿, 크루거 가문에 끌려가서 고문당할 일 있나. 그런데 동생도 영지에서 유명한 망나니 아니랬어?”
“핏줄은 핏줄인가 보네.”
키득거리며 험담하는 것들에게 일일이 신경을 쓸 필요 없지.
가디아는 턱 끝을 올리고 시선을 곧게 앞으로 두며 걸었다.
냉기가 스며 나오는 것 같은 모습.
그 모습에 대놓고 수군거리던 이들도 잠시 멈추고 가디아가 지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리고 강의실에 들어간 직후.
가디아는 처음으로 표정이 부서지며 당혹스러운 입가를 손끝으로 짓눌렀다.
“…넌, 누구지?”
“너야말로 누구지.”
먼저 강의실에 와 늘 가디아가 앉는 그 자리에 앉은 인물.
긴 청은발과 아이스블루의 눈동자.
“아가씨, 맡기신 일은 다 처리하고… 어?”
강의실 문 앞에 서 있던 가디아에게 말을 건네던 리제가 강의실 안쪽에 앉아 있는 가디아와 문 앞의 가디아를 번갈아 바라본다.
툭.
리제의 손에서 편지 한 통이 떨어졌다.
* * *
“나중에 연금탑 한 번 들리자.”
“왜요, 도련님?”
“체력 포션만 있는 게 말이 되냐. 디버프 해제 포션도 있어야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델리안 님.”
나는 침대에 누워 끙끙 앓으며 속으로 연금탑을 가루가 되도록 씹었다.
왜 상처 났을 때 바르는 포션은 있는데 머리 깨질 것 같을 때 먹는 포션은 없는가.
이거 두통 차별 아닌가.
나는 내 이마 위에 놓인 물수건을 갈아주는 리프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엄지를 들어 보여준 뒤 진통 효과가 있다는 약초즙을 삼켰다.
어지간한 건 신성력과 마법으로 다 해치우니 제대로 된 진통제가 없다.
아니, 어디엔가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몬스터 접경지에는 없다.
“아직도 누워 있나.”
“그래서 불만 있으신지.”
그렇게 협곡 위에서 쓰러진 뒤 기절한 듯 깨어나니 이미 하루가 지났고 침대 위더라.
나는 아직도 회복 못 했냐는 듯 말을 거는 케인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아니. 약해도 너무 약한 거 아니냐, 아델.”
“풀네임으루 불러.”
“…리안.”
레이첼이 슬쩍 시비를 걸다 루나가 웃으며 하는 말에 뒤로 빠져 빵을 씹는다.
나 빼고는 다 정정한 모습에 눈물이 나네.
마나는 마정석을 갈아 썼는데 정신력이 깎인 것만으로 몸에 반동이 이렇게 올 줄이야.
나는 약초즙을 마신 덕인지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두통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더 쉬셔두 되는데…….”
그에 루나가 곧 죽을 사람처럼 내 팔을 부축한다.
“쉴 만큼 쉬었어.”
내가 화력이라도 강하면 유리 대포라고 자위할 텐데, 이 망할 몸은 제대로 된 트레잇 하나 붙지 않는다.
그러니 별수 있나.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하는 거고 더불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 도구를 쓰는 법.
내 가장 강한 무기는 트레잇도 아니요, 사실 돈도 아닌 케인이지.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일어서는 자, 거기에 완벽이라는 트레잇.’
일어서는 자로 칭호가 바뀐 것은 내가 짜둔 판 그대로 붙은 것이니 당연하게 이리될 줄 알았다지만.
거기에 천재, 만능, 강인함, 마나 제어에 디스펠과 더불어 외형까지 모든 트레잇이 하나로 묶여 완벽이 달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면 저 케인이.
저, 케인이. 완벽의 트레잇 등급이 고작 B라는데 알 수 있겠지.
저건 앞으로 어지간해선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저게 사람에게 붙는 트레잇인 것도 처음 알았고.
나는 삐꺽거리는 몸을 일으켜 제로가 넘겨주는 외투를 입고 입을 열었다.
“케인만 따라와.”
지금 가는 곳은 우르르, 모두 다 같이 갈 필요가 없는 곳이니까.
“아델리안 님, 다녀오십시오.”
“다녀와, 아델.”
“오시면 맛있는 거루 식사 차려놓을게요.”
―관리자님. 휴식이 더 필요합니다. 금방 돌아오시길.
나는 라인하르트를 만나기 위해 서늘한 복도를 걸었다.
“느낌이 어때?”
“기묘하군.”
나야 격을 쌓아 본 적 없으니 모를 느낌이지만 케인은 다르겠지.
“앞으로 익숙해져. 내 검이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라인하르트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일어났군. 아픈 곳은 없나?”
“보시다시피 걱정해 주신 덕에.”
나는 라인하르트의 말에 여상스레 대답하며 사용자의 눈을 켰다.
[라인하르트 라 아이슈텔른―부러지지 않는 검]대표 Traits : [투지(S+)] [강철(SS)]
히든 Traits : [신성력(D)] [연금(C)]
아이고, 아재요. 아직도 더 발전할 구석이 남았네.
칭호는 변화 없음. 거기에 투지는 등급 업 직전.
보람이 있네. 저 부러지지 않는 검이 그대로 붙어 있는 걸 보니.
나는 히죽 웃으며 의자를 꺼내 앉았다.
“우리 할 말이 좀 있지 않나.”
“총사령관님께서 하시려는 말과 제가 하려는 말은 좀 차이가 나긴 할 테지만.”
하긴 해야죠, 하며 의자를 까닥거리는데 메이샤가 차를 가져온다.
“케인은 이제 데려가겠습니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은 것으로 아는데.”
어차피 중요한 건 케인이 아니면서, 일단 한번 던져보는 것 같은 말에 나는 느슨하게 고개 가볍게 흔들며 입을 열었다.
“대신 원하시는 게 뭡니까?”
내 공손한 말에 무언가 거슬리는 듯 메이샤와 라인하르트의 미간이 살짝 움찔한다.
아, 오만 트레잇.
“자네의 목적.”
라인하르트가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케인이 내 곁으로 조금 다가온다. 그에 라인하르트가 묘한 눈빛을 보냈다.
“생각보다 더 강해졌군, 케인 대원.”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이 흥미 없다는 듯한 케인의 말투.
뭔가 했나 본데, 라인하르트가 나에게 뭔가 했는데 나는 부유감 때문에 모르고 케인이 막은 건가.
드래곤이나 다른 몬스터들의 피어도 그렇고, 부유감이 어떤 면에선 굉장히 도움이 되는데 그 덕에 몇몇에게는 의심을 사는 모양.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 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목적이라… 보시다시피 이곳 가비오렌의 안위?”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굳어진다. 어차피 공손하게 말해도 나에게 붙은 오만 트레잇 덕에 꿍꿍이가 있어 보이겠지.
그럴 바엔 시답잖게 예의 바른 척하는 것보다 건방지게 나가는 것이 맞다.
“아델리안 님, 실례가 안 된다면 저번처럼 당신에게 진실을 듣고 싶습니다.”
저번부터 저런 식으로 말을 하는 이유는 뭘까.
뒤에 서 있던 메이샤의 말에 나는 눈가를 매만졌다.
[메이샤 온―노력하는 비서관]대표 Traits : [암기력(S)] [진실의 언약(SSS)]
히든 Traits : [절대음감(C)] [물약 제조(B)]
진실의 언약이라.
원래 알고 있던 트레잇은 아니지만 예상하건대 특수한 능력이 붙은 트레잇일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하는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든가.’
트레잇 이름부터 그렇게 생겼다. 그리고 저리 나오는 걸 보니 트레잇의 사용 조건이 허락받는 것일 확률이 높고.
“뭐, 그러죠.”
이쪽이 알면서도 패를 까주는 건 그만큼 얻을 것이 있단 소리.
“다시 한번 묻겠네. 자네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곳의 안전.”
내 말의 끝에도 메이샤가 미동조차 없자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턱을 매만진다.
“대가는?”
“언젠가 한번 도움받는 정도? 뭐 들어보고 이상한 제안이라면 거절해도 좋아.”
나중에 악신교단이 대륙적으로 준동하면 어차피 손을 잡게 될 것이다.
그때 좀 더 쉽게 넘어오라고.
“고작 그것뿐인가.”
“나에게 뭐가 더 부족하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오히려 부족함이 있는 건 라인하르트 쪽이지.
나는 허공에서 손을 움직여 테이블 위로 마정석과 금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에 깜짝 놀란 메이샤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 마정석을 낚아채는 것을 곁눈으로 바라본 뒤 입을 열었다.
“이건 투자금. 보아하니 내 말의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나 본데.”
나는 히죽거리며 메이샤를 바라보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대륙의 안전. 그것을 위해 이곳에 왔어. 이곳에 언젠가 위험이 다시 닥칠 거야. 이것으로 대비해 둬.”
지금 그녀에게 내 모든 것을 말해 진실임을 인정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고. 책에서 읽었으며 당신들은 소설 속 인물이고 멸망이 찾아올 것이니 대비해야 한다고.
미치광이 종교가 일어나 신을 부르짖으며 대륙에 전쟁을 선포하고 자신들의 이상향을 이루기 위해 인간 외의 모든 종족을 죽이거나 지배하려 들 것이며, 인간이 아닌 자들과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인간들을 위해 당신들 모두 죽을 것이라고.
“…진실입니다.”
하지만 완벽한 내 사람도 아닌데 그런 말을 내가 전부 할 리가.
그녀의 말에 라인하르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걸 자네가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나는 미래의 일부분을 알거든.”
미래의 모든 것을 안다기엔 이미 내가 바꿔버린 부분이 존재하니 일부분이라고 말했다.
거기에 예지안이라고 정확한 트레잇을 말하면 거짓으로 판명 날 테니 나는 돌려 말했고 당연히 그것은 진실로 판명 난 듯 메이샤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언이나 예지 트레잇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뭐 그렇게 생각해도 되고.”
“…우리가 뭘 준비해야 하지?”
내 모든 말이 진실로 판명 난 순간. 경계는 허물어진다.
“공작급 몬스터가 내려와도 막을 수 있을 만큼.”
내 손보다 더 큰 마정석과 쏟아진 금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준비해야 해.”
* * *
트레잇이란 재능이다. 그것은 노력으로도 이루어지지만 기본적으로는 타고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타고남에 있어선 단순하게 힘이 세고 몸이 날렵하다 같은 특징을 떠나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트레잇 또한 존재한다.
메이샤의 트레잇처럼 어느 순간 조건을 깨우치고 사용법을 알게 되는 특수한 트레잇부터.
‘미래를 엿보거나 다른 세상을 보는 트레잇까지.’
그런 종류의 트레잇은 본인의 의지 하에 ‘사용’할 수 있고 보통 사용할 때마다 자신만의 대가나 제약이 따르는 법.
케인은 앞서 나가는 아델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얼마나 어디까지 내다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위해 치르는 대가로 인해 마나도 오러도 검술도 그 무엇도 손에 익지 않는 거겠지.
그럼에도 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 케인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을 모으고 아델리안 자신마저 위험에 밀어 넣으며 움직이는 것일 테니.
‘가장 날카로운 검.’
그것에 대한 약속을 위해.
“대충 말은 끝났으니 우리는 이제 제국의 왕도로 간다.”
케인은 문을 열며 안에서 기다리던 파티원에게 외치는 아델리안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