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105)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105화(105/343)
105.
회식이 끝나고 돌아온 날. 나는 쓰러지듯 잠들었다. 정확히는, 숙소에 들어서는 순간 발에 힘이 풀려서 채하민에게 업혀 침대로 수송됐다.
채하민이 약이랑 수액만 맞고 이렇게 버틴 게 용하다고 중얼거렸던 걸 잠결에 들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현재, 아침 9시. 나는 29년 인생에서 가장 늦은 시간에 일어났다.
“형—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채하민의 침대 위에서—이유는 모르겠지만— 물구나무를 서고 있던 석준과 눈을 마주친 나는, 그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대체… 너는… 왜 여기서.
아직은 몽혼한 정신에 석준의 실루엣이 점차 뚜렷해졌다. 여전히 침착하게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석준.
“…뭐 해.”
“물—구나무를 서—고 있습—니다.”
너도 참 한결같구나. 비트겐슈타인이 여기 있었다면 독일어로 욕했을 거다. 어떤 미친 인간이 맥락 파악은 하지도 않고 언어를 사용하냐고 소리 치면서.
“……왜?”
“이든 형님이— 형님을— 잘 보라—고 하셔서 새로운 관—점으로 보—기 위해.”
대단한 창의력이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으므로, 포기하자. 나중에 한 번쯤은 석준을 대상으로 심리 관련 연구를 해보고 싶기는 하다.
석준은 똑바로 서더니, 밖으로 나가 나의 기상을 널리 알렸다. 과거의 왕은 침대에서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곳곳에 정보가 퍼졌다고 하던데, 왕 같은 취급은 바라지 않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넘어지지 않는 다리. 아직은 힘이 온전히 들어가진 않았지만, 내일이면 회복될 것이다.
물론 그 아래로 물수건이 하나 툭 떨어지는 걸 보니, 간밤에 열이라도 났나 보다.
방문을 열고 나온 순간 채하민이 안도한다.
“이젠 설 수 있어?”
“응.”
“동화 형, 하민이가 어제 거의 밤새 너 간호했어. 4시 반에 나랑 교대했고.”
한 손에 채소 주스를 들고 있는 채하민이 왜 괜한 부담을 주느냐고 한마디 한다.
“에이, 그래도 알 건 알아야지.”
채하민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약간 묻어났다.
아팠을 때, 누가 간호해줬던 기억은, 4살 이후로 없다.
나는 따스한 기운에 몸서리치며 채하민에게 감사를 우회적으로 표했다.
“오늘 네 자식들은 내가 돌볼게. 조금 쉬어, 하민.”
희망, 어둠, 시작. 녀석들을 케어하는 법은 책과 채하민의 구두 진술을 통해 배워 공책에 정리까지 해두었다.
“아, 오늘 시작이는 내가 봐줘야 하는데….”
내 건강을 챙기느라 좋아하는 채소 주스도 제대로 못 먹고 비실거리는 채하민. 누가 보더라도 졸려 죽겠다는 표정이길래 류이든에게 눈짓했다.
끄덕.
짧은 끄덕임 끝에 류이든이 채하민을 붙잡고 조용히 방으로 끌고 갔다. 나는 조심스레 녀석의 손에서 채소 주스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상하기 쉬운 생주스니, 깨어나면 한 잔 만들어 줄 셈으로.
“동화야! 무슨 일 있으면! 꼭 나 깨워줘!”
그렇게 끌려가던 채하민이 애절한 목소리. 아이와 생이별하는 부모와 같은 목소리라서, 채하민이 미친놈이라는 데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왜 나와 이현재가 아닌 다른 모든 멤버들은 미쳤단 말인가. 통탄스러운 일이다.
나는 거실 한편에 설치된 사육장 앞으로 가 가장 아래쪽 시작 씨가 계신 곳 앞에 앉았다.
채하민이 언급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블루아이가 보였다. 나는 챙겨온 공책을 펼쳐 들고 II—3—A에 적힌 블루아이 항목을 훑어봤다.
‘…허물을 벗으려는 징조군.’
정도를 보아하니, 오늘쯤 벗을 확률이 높은 것 같다.
‘여기 있군. 허물 벗을 때 부모가 해야 할 일.’
참고로 ‘부모’라는 워딩은 채하민이 직접 적은 것이다. 역시 유전 법칙을 뛰어넘은, 세계 최초 파충류 아버지인 토끼답다.
“형, 제가 도와줄 만한 일은 없어요?”
이현재가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았다.
“…우리가 해줄 일이 별로 없어.”
습도를 높이거나 하는 일은 도와주는 일이긴 하지만, 허물은 결국 스스로 벗는 것이다.
* * *
나는 오랜 시간 가만히 소파에 앉아 시작 씨가 허물을 벗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아무 생각도 없이, 자신의 과거를 벗어던지기 위해서 꿈틀대는 시작 씨.
‘……그래, 벗어던질 때가 되었지.’
과거의 내게 따스함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따스한 온기는 언제나 쉽게 떠나, 사라질 뿐인 존재였다.
아마도, 그게 내겐 트라우마처럼 남았나 보다.
어제 신인상을 받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따스함이 떠나는 것이 내겐 너무나 두려웠다는 걸.
하지만, 이제 벗어던질 때가 되었다.
새로운 ‘시작’은 허물을 벗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까.
조금씩 시간이 흐른다. 시작 씨도 천천히, 안에 설치된 구조물에 몸을 비비며 허물을 벗어 내린다.
툭 하고 찢어진 머리 위 허물부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시작 씨.
다시 시간이 흐른다. 시작 씨는 이제 몸의 절반 정도 되는 허물을 완전히 벗어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허물을 벗어 내린 순간, 나는 짙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습게도, 음악으로 써놓고 이제야.
나는 계속 가만히 시작 씨를 바라봤다. 시작 씨는 은근히 행복한 듯 보였다.
* * *
“와! 우리 시작이, 성장했네!”
잠에서 깬 채하민은 내가 보여준 허물을 보고 단번에 일어섰다.
해맑게 헤실대며 채하민이 하얀 뱀인 시작 씨를 달콤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자기 자식이라도 되는 것만 같다.
동물을 저리 아끼는 건 존경할 만한 부분이긴 하다. 아마도 그걸 아니까 동물들이 신기하리만큼 채하민에게 친하게 구는 것이겠지.
나는 채하민이 장하다고 사육장 밖에서 시작 씨를 칭찬하는 걸 보며 나는 웃었다.
“…동화 형, 혹시 아직 아파?”
류이든은 내가 별일 없이 웃었다는 점에 놀라서는 사육장 옆에서 런닝을 뛰다가 넘어질 뻔했지만.
그렇게 평범하고, 사소한, 그래서 소중한 일상 중에 이현재가 태블릿을 보다가 소리친다.
“…형들, 저희 작곡여행 영상이 떡상!”
……그런 해괴한 단어는 또 처음 듣는구나, 현재. 떡이라는 접두사는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닌 형태소야.
맥락상 긍정적인 뉘앙스라는 건 알 수 있겠다.
“저희 시상식 때 무대 연관 동영상에… 아니, 잠깐만요, 분석이 모자라서, 그러니까…….”
채하민과 함께 시작 씨의 새로운 자태에 홀려 있던 나는 가만히 이현재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오, 갑자기 조회수가 엄청 늘었네.”
이현재의 말을 듣고 핸드폰을 확인하던 류이든의 중얼거림. 이로써 떡상이 상(上)을 기본으로 해서, ‘떡—’이 강세접두사로 기능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알아냈어요. 이번에 위즈니에서 우리가 코스프레한 거 시즌 3가 나오나 봐요.”
시작되는 이현재의 브리핑.
“거기에 시상식 때 화제된 거, 준이 형이랑 네스퀵 누나가 덕질 대화한 거, 뒤늦게 동화 형이 작곡가라는 점이 주목받은 거, 작곡여행 때 썼던 곡이 퀄이 높았던 거, 모모지로 얼굴이 익숙해졌던 거, 소소하게 커뮤니티에 계속 언급된 거. 이게 전부…….”
이현재가 급히 태블릿을 훑어보다가 감격해서 소리쳤다.
“형들! 저, 저희 갑자기 관심을 많이 받기 시작하는 거 같은데요?”
…음, 좋은 이야기군. 나는 다시 시작 씨를 바라봤다. 어쩜 저리 하얗고 아름다울까. 어떻게 자신의 과거를 쉽게 벗어날 수 있을까. 철학적으로 배울 점이 많은 생물은, 어쩌면 뱀이 아닐까.
“…하민, 시작 씨, 존경스럽네.”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중얼거림. 채하민은 이현재의 말에 밝아졌던 것보다 훨씬 더 밝은 표정이 돼선 내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지. 우리 시작이, 장하고, 또 멋지고…….”
류이든은 신나서 이현재에게 달려갔고 이현재는 벌떡 일어나서 류이든에게 매달리듯 폭 안겨 소리쳤다.
석준은 와중에 요즘 취미를 들인 보석 자수를 하면서 집중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현재의 말은 듣지 못한 듯싶다.
“우리 시작이가, 처음에 요만할 때 꼬리 무는 거 보고 엄청 마음 아팠는데 이제 상태도 많이 괜찮아지고… 너무 장해.”
한참 이어지던 채하민의 자식 자랑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평화가 계속 지속될 수만 있다면, 그리고 팬분들이 우리를 응원해 줄 수만 있다면, 관심을 많이 받는 게 내겐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저희 이번에 작곡여행 곡 내야겠죠, 이든 형!”
“맞지. 무조건 맞지. 이게 다 우리 은인이 노력한 덕분에!”
또 시작되는 류이든의 은인 타령에 나는 무시하고 시작 씨와 채하민의 자식 자랑에만 집중했다.
“우리 은인 씨! 이리로 좀 와봐!”
“…조용. 시작 씨랑 대화 중이니까.”
헛소리엔 헛소리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 * *
그날 밤, 나는 조용히 기지생을 호출했다.
‘…기지생, 계십니까.’
그에 곧바로 특유의 소리와 함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완료 시작합니다!퀘스트 ‘찬란한 1년’ 완료!
당신은 데뷔 이후의 1년을 마친 끝에, 대중의 인정을 받는 신인상을 획득했습니다. 신인상이 당신의 새로운 시작을 찬란히 빛내줄 것입니다!
보상 : 기지생의 단편적 정보, 가능성의 조각]
기지생.
내가 허물을 벗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생물을 꼽으라면 누가 뭐래도 기지생이겠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이 생물에 대한 감사한 마음 때문에라도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어졌다.
[만약에 제 정체를 알아내시면, 제가 엄청 긴 시간 동안 시공간 안정화를 위해서 야근을 해야 합니다!]정정하겠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라도 이 생물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겠다.
[저의 정보를 획득하시겠습니까?]나는 가만히 알림창을 봤다.
……그래. 획득할게.
[오늘 밤, 꿈에서 뵙겠습니다.]그 말을 보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무언가가 끝나간다는 감각이었다.
“동화야, 자?”
그때 채하민의 한마디가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아니. 왜?”
어두운 방안에서 서로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나누는 대화는, 비언어적 표현이 배제되어 있는데도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때가 있다.
“고마워서.”
“……어제도 말했잖아. 내가 더 고맙다고.”
나는 약간 몸서리치며 이불에 몸을 비볐다. 제기랄.
“아니, 어제 할머니가 또 전화가 왔거든.”
“…어.”
“근데, 올해 지인 운이 왜 이렇게 좋았냐고, 덕분에 덕 좀 많이 봤지 않으냐고 하시는 거야.”
그러고 보니 그분이 은인이라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처음 만드신 분이군.
“……그래.”
“나 진짜 놀래서, 사주 배워 볼까 하다가 너무 어려워서 타로를 한번 배워 보기로 했어.”
……저런. 예전이었으면 비과학적이라고 뭐라 했겠지만, 내가 처한 상황이 반례가 돼 버렸군.
“어쨌든, 나 믿고 같이 회사 나와줘서 고마워. 또, 우리 위해서 노력해 준 것도 너무 고맙고! 내가 타로 배우면 너 건강운부터 보긴 해야겠지만…….”
“……내가, 내가, 더 고마운데, 하민.”
나는 말하는 도중 숨이 터질 뻔한 걸 억지로 꾹 눌러 참는다. 아프면 별 게 다 난리다. 망할.
이후 채하민이 뭐라 중얼거리며 잠에 들 때까지, 나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채하민이 잠들고, 내가 잠들기 전까지도.
* * *
그리고 마침내 잠에 빠져들어 몽롱한 부유감에 휩싸였을 때, 순간 눈이 떠진다.
눈앞에 낯선 듯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전에도 한 번 와 본, 공간과 그 공간의 틈새 같은 곳.
공간이 약간 일그러지고 ‘위잉’ 하는 기계의 시동음이 들리더니, 그 중간에서 컴퓨터 모니터로 만들어진 기지생이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반갑고 오랜만입니다.”
나는 모니터에 그려진, :—) 라는 이모티콘을 보고 미소 지었다.
“야근할 준비는 되셨습니까, 기지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