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117)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117화(117/343)
117.
이예지 음향 감독님과 OST 작업을 한창 하던 중, ‘석류가 다시 활짝 필 테니’의 대본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우리는 공식적인 아지트인 내 작업실에 모여서 OST 반응도 보고 대본 리딩도 해볼 겸 모였다.
“형, 왜 제목에 석류가 있을까요? 무슨 상징적 의미가 있나?”
사실 나도 그 점은 잘 모르겠다. 석류는 알이 많다는 특성 때문에 번영과 풍요를 상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니까. 아니면 페르세포네의 신화가 연상되기도 한다. 판본마다 석류를 먹는 계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어쨌든 페르세포네가 석류를 먹음으로써 자연의 순환이 생겼고, 이로 인해 석류는 자연의 순환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둘 다 사생아가 황제가 되는 이야기랑 관련성이 모자라다. 별다른 이유 없이 주인공이 석류가 자라는 계절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쓸 수 있는 소재라 해석하기 더욱 까다롭다.
우리 얘기를 듣고 있던 채하민. 갑자기 박수를 짝 하고 치더니 소리친다.
“오, 나 그거 알아! 타로 입문서에 적혀 있었어! 타로에서 석류는 여성 인물의 권력을 상징한대!”
저리 가, 미신 신봉자. 어떻게 이리 하나하나 나랑 정반대인지 모르겠군, 망할 토끼 놈.
“어, 하민이 형 타로 공부해요?”
그에 이현재가 관심이 생겼는지 눈을 약간 반짝인다. 나는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점성술이나 도상학을 타로를 통해 배울 수는 있겠지만, 내 제자가 그걸로 운명을 본다느니 하는 개념만큼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응! 근데 엄청 어렵더라. 나 어젯밤에 동화한테 해석 부탁해 가면서 읽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도상학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이었지.
“근데 얘들아, 우리 대본 리딩 언제 해.”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자 류이든이 나서서 중재한다.
“그래서 우리 배역은 뭘까요.”
“그러게. 팀장님 말로는 하민이 위주로 나오긴 해도 다들 얼굴은 비출 예정이라는데.”
“저—는 조금 연기하기 쉬운 거—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배부된 대본. 바로 열어보려다 하나, 둘, 셋을 세면 함께 열어보자는 류이든의 제안에 손을 멈췄다. 별것 아니지만, 집단의 정서적 유대감 증진을 위해 필요한 의례다.
대본을 열어보니 대강의 배역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배우 이름을 적어뒀다. 빠르게 훑으며 가장 중요할 내 이름을 찾아본다. 기왕이면 없으면 좋겠군. 드라마라는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이기에 나는 모자란 점이 많으니까.
“오, 동화 형 이름 찾았다.”
저런. 이현재의 말에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쪽수를 확인한다. …음, 대체 왜 이런 배역이 떨어졌는지 모르겠군.
“잠깐, 이거 동화랑 하민이 배역이 비중이 좀 크네?”
“이건 제 통계대로면 멘션 언급 수랑 정비례하는 거 같은데요?”
“역시, 우리 애들 인기 자랑스러워.”
이건, 정말, 큰일이군.
* * *
‘석류는 다시 활짝 필 테니’의 촬영장.
짧은 장면이지만, 그래도 대사가 5줄은 넘는 역할. 이전에도 연기를 하긴 했지만, 실제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아마도 촬영장의 분위기도 다르지 않을까. 드라마는 시간과의 싸움이라고도 하니.
“동화야, 긴장된다.”
“…음, 나도.”
채하민은 내 말에 가만히 내 얼굴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와, 너가 긴장하는 건 진짜 오랜만인 거 같다. 데뷔 무대 전날 말고는 긴장한 거 본 적 없는데.”
그나저나 이놈은 내가 긴장하는 건 어떻게 알아채는지 참 신기할 노릇이다. 거울로 봐도 얼굴에 별 차이는 없던데.
그렇게 메이크업과 의상까지 챙겨입고 나자 잠시 앞 장면의 촬영을 대기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앞 장면이 끝났을 때,
“아니! 우리 후배 님들이 여길 또!”
제인의 커다란 목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졌다. 스타일리시한, 황족이라기에는 평상복스럽고 평민스러운 옷을 입은 제인이 손을 흔든다.
“디텍션 이후로 처음 보네. 견훤 오빠랑은 라디오했던데.”
얄궂게 웃으며 말하는 제인. 아마도 장난식으로 따지는 느낌인 것 같다. 우리들은 전원 일어나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To be blooming, 블로센스입니다!”
제인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 크기의 목소리에 제인이 눈을 크게 뜨곤 박수를 친다.
“이게 아이돌 패긴가 보다. 쩌네, 진짜. 신인 배우들은 이 정도 느낌은 아닌 거 같은데.”
“오랜만이에요! 선배님!”
친화력 좋은 채하민이 먼저 인사하자 제인은 웃으며 받아준다. 뒤이어 이 감독님까지 도착해서는 우리를 환영해 준다.
“오셨네요! 아,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의 연기 기대하고 있습니다!”
부담감을 살포시 얹어주시는 게 참 마음 아프군.
“그럼 내 가정교사 분과 하인님,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하루?”
제인이 채하민과 내게 말한다. 참고로 내가 가정교사다.
* * *
첫 번째 장면, 동양풍 느낌이 물씬 나는 방 안에서 나와 제인이 촬영하는 씬이다. 대사나 감정선이 어렵지는 않으므로, 아마 괜찮지 싶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 괄호 부분.
젊은 가정교사 (지동화) :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하라에게 잔소리를 한다, 음악과 함께 페이드 아웃)
대체 이 잔소리를 한다가 뭔지, 참. 아마도 지난번에 준성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 했던 것처럼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는 식인 듯싶다. 다행히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대본을 미리 받아보았기에 다행이다.
내 복장은 양복과 동그란 안경, 그리고 2대8로 넘긴 머리까지. 깔끔한 인상이지만 케케묵은 구시대적 관습을 온몸에 걸친 상태다.
구체적인 설정이 내 대본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정황상 주인공은 그저 평민처럼 살고 싶은 욕구와 황실에서 떳떳하지 못하기에 억누르려는 이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나란 가정교사는 그래도 황실의 핏줄인 이 사람을 최대한 황실의 핏줄다운 격식을 갖추고 살아보게 만들려는, 동시에 황실에서의 대접에 조금의 인간적 안타까움을 지닌 인간이지 않을까.
황실은 자꾸만 대충 가르치라고 하지만, 성격상 그렇게 할 수 없는 인간. 귀찮아하는 이 망나니 여인을 황실의 핏줄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
그렇기에 나는 표정을 단단하게 굳힌다. 최대한 단호한 표정으로, 교육을 따르도록.
“자, 동화야, 나는 너보다 5살이나 어린 애고! 너는 나보다 5살이나 많지만, 지능이 높아서 황실에 입사해선 짬처리 당한 가정교사야! 집중해!”
제인이 책상을 마주 보고 앉아 소리친다. 어떻게든 긴장을 풀리게 만들려는 의도가 강해 보인다.
“어차피 두세 번 컷 당하는 건 일도 아니니까 처음은 연습이라는 생각으로 막 해도 돼!”
“제인 씨! 기왕이면 한 번에 컷하는 게 좋거든요?”
이 감독은 제인의 말에 소리쳤지만, 제인은 호호 웃을 뿐이었다.
“자, 그럼 촬영 들어갑니다!”
그렇게 소리치는 순간 제인의 눈빛이 변한다. 귀찮아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펜을 들고 인문학 저서 위에 뭔지 모를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한다. 나 역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화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감독의 큐 사인. 약 5초 정도 안경 너머로 제인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무언가를 짓씹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뭐 하십니까.”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음산한 목소리. 제인은 그에 아랑곳않고 몸을 뒤로 기우뚱거린다.
“아! 선생님. 어차피 공식 석상에 설 일도 없는 서자인데, 공부해서 뭐 해요?”
나는 약간 안타까워지려다가도, 공부에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제자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황이 문제라면, 성장해서 우선 부딪혀 보는 것도, 진흙 속에서도 찬란히 빛나서 그 빛을 다른 이들이 볼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을 텐데, 눈에는 나태함만이 가득해서 모든 것을 지레 포기한 제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안타깝기에, 더욱 분노는 활활 타오른다.
하지만, 나는 분노를 표하기에는 격식이 몸에 밴 인간. 한숨조차 소리 내어 쉬지 않는다.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삭인다.
“…인간에게 지성은 강력한 무기가 되곤 합니다. 사람에게는 지혜가 필요하고, 공부는 그 지혜에 도달하는 한 교두보가 될 수 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지혜로운 인간이, 권력을 꿈꿀 때, 역사가 변화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은근히 돌려서라도, 지금의 공부가 추후 당신이 숨겨둔 비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혹은 비수를 날카롭게 하는 숫돌이 되어줄 거라고 얘기한다.
“에이, 그런 건 그냥 살면서 체득하는 거지, 지루하게 무슨! 됐고, 그냥 우리 퍼즐이나 같이 맞추죠? 그것도 지식 공부!”
그리고 이 어린 제자가 이 정도의 말도 이해할 수 없는 멍청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안경을 내리고 미간을 약간 문지른 뒤 다시 쓴다. 한숨을 내쉴 수도, 격식 없게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를 수도 없기에 조금이나마 표출해 본다,
“……어렸을 적의 꿈은 대체 어디로 가신 겁니까.”
그 말에 종이에 얼굴을 파묻고 옹알대던 제인이 뚝 그친다.
“황제가 되겠다던 우스운 발상은, 모두 사라지신 겁니까.”
나는 빳빳하게 세운 허리와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진다.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배역의 감정을.
“어렸을 때 그냥 장난삼아 한 말이지, 쌤.”
제인은 푹 늘어지는 목소리로 답한다. 자신의 꿈을 짓밟으려는 세상과, 이룰 가능성이 적은 꿈에 짓밟힌 제자. 결국 이 장면은 주인공의 무력함을 보여줄 뿐인 장면이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부디, 주인공이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3년이나 가르친 제자. 그의 몰락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장난은, 위대한 발명의 시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그나마 따스하게 보이기를 바라며. 제인은 내 미소에 약간 놀란 표정이 된다.
“그러니 어렸을 적 장난삼아 한 말이, 훗날 대한제국 역사에 남을 하나의 예언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준비된 대사는 여기까지. 하지만 이제 나는 나의 감정을 안다. 약간의 기대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느낀다. 스승으로서 해준 이 말 한마디에서 일말의 희망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하지만.
“아, 쌤, 그냥 공부가 하기 싫다고요!”
제인의 비명에 그 기대는 무너져 내린다. 나는 미간을 살풋 찌푸린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격식 없는 행위가 생리적으로 나오고 만다. 나는 입을 연다.
“사생아라면, 그 신분적 한계가 너무나 버겁다면, 누구도 신분으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해지십시오. 대한제국의 통치자로서 적합한 지혜를 갖추고, 정치적인 상황의 흐름은 냉정하게, 백성들의 마음은 따스하게 인지하십시오. 비록 공식 석상에 설 수 없을 뿐, 황제의 피가 흐르는 당신의 말은, 결국 영향력을 만들 테고, 그 영향력이 사람을 모으며, 그렇게 모인 이들은 당신을 결국 위대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신분적 한계 따위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사소한 흠에 비해 당신의 위대함은 너무나 거대하니까.”
나는 약간 높아진 어조를 낮추고, 조금 바빠진 숨을 고르고, 다시 차분한 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앞에서 놀라움과 당황, 그러면서도 약간의 설렘을 가진 제인과 눈이 마주친다.
“그러니, 공부하십시오. 당신의 위대함을 위해. 당신은 지혜 없이도 평생을 무난히 살아갈 수 있는 평민들과는 다릅니다.”
준비해 온 말은 여기까지. 어제까지 계속해서 주어진 상황과 감정선을, 늦은 밤이 될 때까지 방안에서 채하민과 대본을 읽으며 의논했다. 그를 토대로 작성한 말. 비록 음악 속으로 사라질지언정, 최선을 다해 준비한 대사를 끝까지 마쳤다. 이럴 때는 소설가로서 생활했던 경험이 참 도움이 되는 듯싶다.
하지만, 왜인지 제인이 입이 열린다.
“그래도, 그래도 실패하면요? 마지막에 갔을 때, 실패하면 전부 의미 없는 짓거리잖아요.”
애드립.
나는 주인공의 얼굴을 바라본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 내 입에서 희망찬 말이 나올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찬 눈이다.
이미 대본이 끝났지만 나 역시 곧바로 입을 연다. 그게 주인공에 몰입한 제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당신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도망자로서 도피하지 않았고, 화려한 불꽃으로 타오른 당신을.”
나는 차오른 숨을 한 번 내쉰 뒤 찬찬히 입을 연다.
“이제, 공부하실 생각이 조금은 드셨습니까.”
그리고 천천히 끄덕여지는 제인의 고개. 여전히 어안이 벙벙하고 자기 스스로도 고개를 어째서 끄덕이는지 모르지만.
나는 만족스레 약간 고개를 끄덕인다. 아까 전보다 더욱 따스한 미소가 새어 나온다.
“좋습니다. 책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