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126)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126화(126/343)
126.
하루가 가지 않기를 원해도 하루는 가고 만다. 개연성이 높은 귀납적인 결론이 오류일 가능성은 왜 이리도 낮을까.
나는 TV를 눈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려다 말았다. 생각해 보면, 부끄러울 건 또 무엇일까.
“와, 예고편에 동화 얼굴 나온다.”
“방―금 하민 형님도 나왔습니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고, 옆에 앉은 채하민을 바라본다. 폰을 들고 어머니와 메신저를 주고받고 있는 걸 보아하니, 자기가 저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알려주고 있나 보다.
“하민, 혹시 가족들도 이거 보신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꽤나 중요한 물음이다.
“어, 엄마가 아빠 몰래 이거 틀어놓을 거래.”
내가 부탁드린 것을 그대로 이행해 주신 채하민의 모친분께 박수를. 이제 드라마가 재미있어서 채하민의 직업을 다시 보는 계기로 작동만 해 주면 좋겠군.
채하민이 하품을 한 번 하다가 짝 소리 나게 박수를 친다.
“내가 팝콘 튀겨 올까? 아까 매니저님한테 부탁해서 조리용 팝콘 사 왔어.”
아니. 너는 이 집을 튀길 거잖아. 아니면 튀긴 팝콘이 비처럼 내려오거나.
“오! 좋습니다!”
석준은 눈치를 반찬으로 두 끼 정도 먹었는지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바로 튀겨 올게!”
저 무의식적 방화광에게 부엌을 맡길 수는 없으므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하민, 내가 튀길게.”
“에이, 동화야, 나만 믿고 딱 기다려!”
“평소에 네가 해준 거 많이 얻어먹었으니까 보답해 주려고.”
“어? 그, 그래?”
이렇게 말하면 네가 나서기가 좀 그렇지. 채하민은 자기의 보답을 해주겠다는 말에 기쁨과 아쉬움이 기묘하게 섞인 표정을 짓는다. 입은 자연스레 웃는데, 눈엔 아쉬움이 묻어난다.
물론 이렇게 닻을 내리고 나면 진정으로 원하는 걸 말하는 것 역시 협상의 중요한 기술이다.
“…같이 만들까.”
“좋아, 좋아!”
그래, 그거면 족하다. 최소한 부엌에 기상이변이 일어나는 사태는 막을 수 있겠군.
* * *
드라마가 시작할 무렵 마침 완성된 팝콘을 가지고 가자, 류이든이 한 입 먹자마자 맛있다고 극찬했다. 물론 내가 눈빛으로 강제한 것이다.
“와! 하민! 요리 실력이 일취월장해 가네!”
채하민은 그에 약간 쑥스러워서 멋쩍게 웃는다. 류이든의 말이 들리는 순간 뭐라 할 말이 많은 표정이 된 이현재는 약간 골똘히 생각하고 내 얼굴을 한 번 본 뒤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뒤, 가만히 팝콘을 먹었다.
뭐, 여우 놈.
그렇게 채하민 칭찬을 한창 하는 도중에 드라마가 시작된다.
“오, 합―니다.”
드라마의 초반부는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대략 30분을 캐릭터를 잡는 데 할애했으니까. 그 사이사이에 멤버들이 등장해서 제인에게 당황하는 장면. 웃음과 밝은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러는 와중에도 약간씩 불길한 분위기가 밤마다 문득 고개를 들이민다. 제인 내면의 우울과 황실 내 치부를 바라보는 아니꼬운 눈빛, 그리고 그런 제인이 어떤 행동을 할지 사사건건 감시하는 모습까지.
그리고 드디어 그 개 같은 장면이 나온다.
“…동화 나왔다!”
정확히 초중반부, 제인의 불씨를 피워주는 첫 장치로 내가 등장했다. 추가 촬영분과 함께 조금 더 긴장된 카메라 무브까지 곁들여서.
“형, 근데 나 궁금했던 건데, 형은 죽음을 불사하고 덤비는 도전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이현재가 그런 긴장감 속에서 대뜸 괴상한 소리를 한다. 답이 정해진 질문이군.
“…저건 ‘맞다’나 ‘옳다’의 문제가 아니야, 현재.”
누군가에게 목숨보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 무언가의 부재(不在)로 삶 전반의 만족도를 잃게 된다면, 윤리적으로 몰락할 수 있겠지.
그 무언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맞냐 혹은 옳냐를 따지기 이전에 그 개인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가령, 누군가 부정한 방법으로 금전을 취득해놓고도, 사용하지 않고 노숙자 생활을 하더라도, 그게 누군가에게는 멍청한 짓거리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사람에겐 윤리적인 몰락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런 선택은 ‘해야 한다’라는 가치 판단의 영역이 아니라, 현상으로서 우리에게 펼쳐지고 선택될 뿐이다.
…라는 짤막한 설명으로는 충분히 논증되지 못했지만, 그건 이현재가 고3 수험생활을 하던 도중 지치면 설명해 주면 된다.
“동화가 이럴 때마다 한국대 간 게 이해가 돼. 무슨 말인 거야.”
류이든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맞아, 나 반도 이해 못 했어.”
그 정도는 아니었어. 한국어로 말했는데 어째서.
그렇게 한창 떠들면서도 나는 드라마를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제인에겐 내 말 한마디가 불씨가 되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음에도 자연스럽게 이끌린다. 드라마 속의 지동화 역시 마찬가지로, 황실에서 교양 정도만 가르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의지에 맞춰 제왕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거 위험한 거 아냐?”
류이든이 문득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도 답해주지는 않았다. 모두들 알고 있었으니까. 제목이 괜히 석류가 ‘다시’ 활짝 필 테니로 지어졌겠는가.
―선생님, 이거 가르치면… 안 되지 않아요?
마침 드라마에서도 제인이 국제정세학 교재를 들고 가만히 바라보다가 적절하게 질문을 던진다.
―혼자 뛰어내리면 무섭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엔 제대로 공부하십시오. 아직 때가 아니라 그렇지, 몇 년 후면…….
―잔소리 멈춰요! 아! 나 변했다고!
―그걸 또 티 내고 계시니 문제 아니겠습니까. 숨기십시오. 무릇 황제는 비수를 전시하고 다니지 않습니다.
무신경한 내 대답이 짤막하게 이어지자, 멤버들이 환호하며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망할. 나라도 작업을 하러 갔어야 했는데.
이런 다른 움직임, 그리고 변화된 분위기가 1년 정도 이어지자 결국에는 비수가 겉으로 드러나고 만다. 불안감을 느끼는 황실 후계자 후보인 장남과 차녀가 커피를 마시다가 날 선 표정을 짓는 장면이 이어진다. 최근에 황실의 부패가 주목되고 있는 상황에, 저런 새 얼굴이 갑자기 등장한다면 민심이 어떻게 이어질지 뻔히 보이니까.
―…느낌 더럽게 쎄해. 그지?
―아, 그러니까 말이지. 뭔가, 뭔가 묘해. 딱 보이는 건 아닌데 말이야.
―거기, 한 번 청소할까?
―…방법은?
―어머, 나이가 드니까 손이 미끄러져서 불이 나버렸네?
―어머, 어의는 우리 쪽 사람이라 사인 판정을 제대로 안 해줬네?
단순한 대화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선히 그려진다. 그리고 드라마 속 지동화가 심어둔 눈은 그런 기묘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궁내에서 수시로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살피다가 마침내 채하민에게 찾아가기에 이른다.
―궁 밖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를 확보해 주셔야겠습니다.
―비밀 통로요……? 그게 혹시, 필요할 일이… 생겼나요?
―흠,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심상찮습니다.
―……네? 그럼!
―불필요한 말이 늘 많습니다, 당신은.
그리고 뒤돌아서는 지동화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채하민의 모습. 할 말이 많지만, 그래서 약간 눈물이 고이다가 코끝을 찡그리고는 다시 돌아선다. 그 배경 뒤로 제인의 어머니가 기른 작은 석류밭이 클로즈업된다.
“어씨, 동화 뭐야! 멋있어!”
“하민 형님! 연기 멋있습니다!”
그리고 장면이 급박하게 이어지다가, 종국에는 자신의 예상보다 빨리 움직인 후보자들로 인해 궁내를 미친 듯이 달리는 지동화의 모습이 이어진다. 흐트러진 머리를 바로 할 새도 없이 그대로 문을 박차고 들어가 채하민과 제인을 붙잡은 뒤 빠르게 말한다.
―확보됐습니까.
―…네.
―그렇다면, 가십시오.
제인은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어렸다. 황제의 자세인 침착함을 아직은 기르던 중이기에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다. 지동화는 다시 제인 쪽으로 돌아서 천천히 말한다.
―황제가 되기로 하셨던 첫날을 저는, 아직 기억합니다. 그 첫날에 제가 함께 있을 수 있은 영광이었습니다.
―마, 마지막 인사처럼 말하지 마요, 썜. 뭔데요. 왜, 아직, 덜 가르친 게 많, 쌤.
―마지막은 없습니다. 황제에게는 영원만이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모든 선택은 영원으로 남을 것이고, 그러니 제 영광 역시 영원할 것입니다.
채하민이 급박하게 뒤에서 뛰어 들어오며 작은 목소리로 제인에게 가야함을 알린다.
―잠깐, 하민. 잠깐만, 나 아직, 잠깐만!
―망설임은 독소라고 제왕학 첫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아직 멀었습니다, 참.
―그러니까!
―말이 많습니다. 가르친 것 중에선 단 하나만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지동화는 조용히 내려다본다. 제인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울음을 터뜨리더니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다.
― 난…… 황제가 될 인간입니다.
― 그럼 뭐하고 계십니까, 하민 씨, 보필하십시오.
지동화는 마지막 모습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힘겹게 미소를 짓는다. 연기할 때에는 어차피 들통날 통로,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럼 황제가 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이후 모두 도망가고, 홀로 남은 방안, 점차 불길이 치솟는지 주변이 붉어진다.
―한, 10초 남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은 지동화는 넥타이를 풀어 헤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모습으로 가만히, 숨을 고르다가 문이 열리고 들어온 가면의 사내를 바라본다.
―총일 것 같진 않고, 칼입니까? 탄피가 남으면 그건 또 소란스러울 테니.
눈앞에 제인이 아닌 남자가 앉아 있다는 데에서 당황한 모습이 가면 밖까지 드러난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다음 황제가 이런 피바다 위에서 피어날 석류꽃이라니.
지동화는 진심으로 활짝 웃으며,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다.
―반면에… 어찌나 추악합니까, 당신들은. 황제는 무슨, 뒷골목 개새끼들에나 어울릴 만한 꼬라지가 정말 우습습니다.
목소리가 약간 떨리지만, 그 속에 담긴 확신만큼은 단단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는 화면, 테마 곡이 하나 흘러나오며 끝을 알린다.
여담이지만, 다음 화에서는 도주 과정에서 채하민의 희생으로 제인이 살아남게 되는 스토리가 이어진다. 드라마 대본상 우리가 더 나갈 수 없기에 생긴 일이다. 물론 모든 조력자가 죽은 환경에서 제인의 고뇌와 여러 선택지의 교차 등 감정선이 폭발하기 위한 장치들이기도 하고, 제인의 성장 드라마라는 점을 확정 짓는 구성이기도 하다.
“……동화야아아아아아!”
채하민이 팝콘통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한테 달려들어서 어깨를 흔들어댄다.
“골이 울…….”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이번에는 류이든의 흔듦까지 더해진다.
“동화 형! 형! 제가 사랑해요! 동화 형아아!”
“망할, 가만히 좀 있,”
그리고 이현재와 석준까지 재밌어 보였는지 흔드는 데 가세한다. 망할 여우 놈은 점점 사악해져만 가는군.
그렇게 흔들리다가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느낀다. 목화인가 싶어서 모두 떨쳐내고 핸드폰을 들자 예언과 준성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고 내려놨다. 우리 동생은 조금 바쁜가 보군.
“아니, 그래서 이거 다음에 어떻게 되는데? 너희는 혹시 알아?”
알지만 가만히 있어야겠다. 나는 재빨리 채하민 쪽으로 고개를 돌려 토끼 놈을 시선으로 억누른다. 가만히 뒀다가는 모두 술술 불어버릴 것 같은 마법의 입을 지니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