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136)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136화(136/343)
136.
D&A 무역 회사. 꽤나 거대한 사옥을 올려다본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의 채하민이 눈에 들어온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항상 저 표정이었다. 미안해할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안, 동화야. ”
“그 말, 6번째 들어.”
왜 채하민의 부친께서 날 뵙고 싶다고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채하민의 죄는 아니다.
“하, 아빠 진짜, 오늘 너한테까지 뭐라고 하면 진짜 절연할 거야.”
극단적이잖아, 하민. 내가 이해할 수 없다 뿐이지, 아버님이 채하민을 진심으로 위하는 것은 맞으니 가급적이면 평화로운 결말이 있길 바랄 뿐이다.
우리는 별말 없이 회사 안으로 들어갔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비서님이 우리를 맞이해 위로 이끌어 주었다.
아무런 팻말도 걸려 있지 않지만, 그리고 과하게 꾸며져 있지도 않지만, 은근히 압박감이 느껴지는 분위기인 건물 최상층.
“…이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사장님께서 저는 미리 빠지라 하셔서 여기까지만 안내드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비서님의 안내에 우리는 조심스런 노크 후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하민이니.”
“…네, 아버지.”
“그, 옆에 동화는 같이 왔고?”
“……네.”
“들어 오거라.”
* * *
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하면서도 위압적인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정말, 분위기라는 걸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분이시군. 예전에 서바이벌 마지막 방송에서 잠시 뵀을 땐 이런 느낌까진 아니었는데. 한 회사의 우두머리라는 게 공간에서부터 확실히 보일 지경이었다.
“…우선 함부로 불러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네. 자네를 무시했다기보다는, 오늘 말고는 쉬는 날이 없다는 얘기를 아내에게 들어 급해서 그런 거니까.”
나는 채하민의 아버님이 직접 내린 커피가 담긴 잔을 받으며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사고를 멈춘다. 이렇게 사과를 해오시면 어떻게 해야 한담.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하민이가 잠시 밖에 나가 있어도 괜찮겠는가?”
옆에서 채하민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져서 재빨리 답했다.
“그건 제가 아니라 하민의 의사를 물어보시는 게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버님.”
“…그래, 그렇지. 그게 맞군. 하민아.”
채하민은 뭐라 말해야 할지 한껏 고민하다가 나를 잠시 바라본다.
“…저 아이돌 안 그만 둬요, 아빠.”
“안다, 이 요망한 것아.”
…워딩이.
“동화까지 편먹고 설득하면 힘들 순 있지만, 그래도 안 그만 둘 거예요.”
“안다니까? 너랑 그 난리를 쳤는데 그걸 모를까.”
“…저 문밖에 서 있을 거예요.”
“네 성격을 아비가 모르니?”
길고 길었던 문답 끝에 채하민이 여전히 이해가 어렵다는 표정으로 밖으로 나선다. 이해가 어려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니 그저 가만히 있어야겠다.
왜 독대를 하자고 하시는지, 전혀 감도 오지 않는다.
채하민이 나가 문이 닫히고, 짙게 내려앉는 침묵.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분위기를 살핀다. 하, 사업가의 감으로 구성된 대화는 자신이 없는데. 논리가 아니라 경험 측면에선 명백히 밀릴 테니까.
“…그래, 그 드라마를 고르는 데 자네가 강력히 주장했다고?”
의도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최근에 내 아내랑 연락해서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를 하나하나 캐물었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는 내가 그 드라마를 볼 거라고 확신했나?”
90% 정도의 확률로 그럴 거라 생각했으니, 그 정도면 확신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될 것 같다.
“…네.”
“그럼 하나만 더. 혹시 내가 드라마에 아들이 나오는 걸 보고 아이돌이란 직업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할 거라고 보았나?”
“아니요. 적어도 대화의 기회는 열릴 거라 봤습니다.”
“…아주 탐나는 인재구만 그래.”
갑작스런 과속은 유전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저는 알 것만 같습니다, 아버님.
“아주 사업하는 데 적합해. 차라리 나중에 하민이가 사장이 되면 자네가 보조를 맞춰도 좋겠군.”
“아버님.”
나는 상체를 약간 앞으로 내민다.
“하지만, 저나 하민이나, 아이돌을 관두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 자네 드라마 대사를 듣고 내가 많이 깨달았지. 자네나 내 새끼는 젊으니 타오를 때기도 해.”
저런, 그건 고려했던 사항이 아니었는데.
“게다가 자네가 말하는 투를 들어보면, 딱 알지. 자네는 꽤 지혜로운 사람인 것을. 내 감은 거의 틀리지 않거든. 사업은 머리로 하는 거지만, 결국 사업이 실패하지 않으려면 감이 좋아야 해.”
그리고 채하민의 아버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자네를 보면, 꼭 내가 젊었을 때 마주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르는데, 들어보겠나? 한강에서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눈… 친구라기엔 먼 사이의 이야긴데.”
죄송하지만,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결국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 이야기의 끝에 있을 거라는 게 눈에 선히 보였으니까.
“이 회사가 지어진 게 20년 전이지. 그러니까, 자네와 나름대로 동갑일세. 다른 말로 하면 하민이와도 동갑인 셈이고. …말인즉, 내가 하민이 어릴 적에 많이 곁에 있어주질 못했어.”
죄송하지만, 하민에게 직접 하시는 게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처음엔 사업도 휘청였고 말이지. 어둠 속에서 헤매는 기분도 들고 말이야. 믿는 건 내 감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게 안 통하면 어쩌나… 고민도 많이 헀고. 어느 날은 술에 취해서는 잠시 강가에 앉아 있었어.”
죄송하지만, 제가 여기 앉아 있어야 할 필요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신사처럼 젠틀한 동년배 한 명이 와서 옆에 앉아서는 나랑 길게 길게 대화를 나눴지. 아직도 앉으면서 했던 첫 마디가 강렬히 기억 나는구만. ‘강물이 흐르는 걸 보니 시간과 함께 모든 건 변하겠네요.’라고. 처음엔 무슨 개소린가 했는데 말이야.”
…저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진리’다.
“대화를 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내가 강물로 콱 뛰어들까 생각하고 있던 걸 그 사람은 알았었나 봐. 그래서 그렇게 말하면서 곧 그 힘든 일도 변하겠다 위로해준 셈이었던 거지. 내가 고민을 얘기하면, 그 사람은 깊게 생각해 보고 나서는 곧바로 대답해 줬는데……. 그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지혜로웠어 . 그래서 물어보니, 철학을 전공했다더라고. 그분이 그때 품에 안고 있던 원고를 선물이라면서 나한테 줬거든.”
그리고 그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는지 겉이 조금 해져 손때가 묻은 원고를 들어올렸다. 그곳엔 제목인 듯 만년필로 휘갈겨 쓴 문구가 눈에 띈다. ‘망할 인생, 그리고 망할 철학.’이라는 강렬한 문구가.
……잠깐.
“그때 이후로 나는 수시로 한강을 찾았고, 그와 만난 날에는 꼭 무언가 하나를 배우고 왔네.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내 삶의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쩌면 인생의 스승 같은 것 아니겠나? 한강에서 가끔가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지만, 사업을 포기하지 않게 만들어준 것도 그 사람이었던 것이 사실이지. 서로 번호조차 알지 못하고 아는 거라곤 이름뿐이었지만 말이야.”
아쉽게도 나는 원고에 적힌 제목에 눈이 붙박여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반면 채하민의 부친은 내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더 꺼낸다.
“…신기해. 인생이 참 신기해. 어떻게 필적까지 닮았나. 유전으로 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리고 왜 아들 있는 걸 나한텐 얘기해 주지도 않았는지, 참.”
원고와 내 사인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 나는 서서히 입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마지막 질문이네, 동화 군. 아버님의 성함이 어떻게 되나?”
“……지, 공우입니다.”
“…그래. 방금 전 마지막을 취소하고, 하나 더 묻겠네. 원래 무역하는 사람은 조건을 달고, 또 달고 하는 법이니까 이해해주게.”
그리고 그는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더니 입을 연다.
“혹시 이 회사 사장 자리엔 관심이 없나? 그래야 자네 아버지와 수지타산이 맞는 셈인데.”
나는 우선 짧은 충격을 가다듬었다. 생각해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셈 아닌가.
“우선, 저는 숫자랑 친해지기에는 아직 어린가봅니다.”
사업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굉장히 완곡하게 돌려 표현해 보았다. 그러자 채하민의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껏 웃은 뒤 아련한, 기억의 저편을 바라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미소 짓는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 내가 미쳤지. 회사에 대한 애착 때문에 어린 아들을 이해를 못 하고. 나도 젊을 땐 그랬는데 말이야……. 그 친구도 그렇게 말했는데 말이야.”
잠시간 그는 그저 잡담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안경을 쓰고 나서야 알아봤다는 것, 얼굴이 이제 와 보니 닮은 구석이 많다는 것, 하나하나 내 아버지의 기억을 자극하는 말들만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마친 그는 모든 원고와 사인을 서랍에 집어넣고 문밖으로 소리쳤다. 복성의 풍성한 울림이 돋보이는 발성이었다.
“들어오너라, 하민아!”
* * *
채하민은 회사에서 나와 돌아오는 길에 나를 부여잡고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를 캐물었다. 방음이 좋았는지 귀를 바싹 대고 있었는데도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채하민에게 뭐라 말해주지도 못할 만큼 기묘한 감상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게 대체 얼마만인가 싶어서. 그리고 개연성이 있다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얽힌 관계도가 놀라워서.
“동화야! 나 아이돌 절대 안 그만둬! 아버지가 설득 같은 걸 엄청 잘 하시지만 그래도 너까지 넘어가면 안 돼!”
“…하민, 아까 네 아버님이 하신 말씀 안 들었어?”
“들었지.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앞에서만 그렇게 말하고 뒤로는 너를 이용해서 나를 설득하려 할지도!”
……꿈을 지지해 주겠다는 말까지 믿지 않으면 어떡하니, 하민.
“나는 거짓말 잘 안 해, 하민.”
“그게 거짓말인 거 이제 나도 알거든.”
세상에, 지난번에 토끼에게 동족으로 인정받더니, 지적으로도 성장했구나. 자랑스럽다.
“해외 나갈 일 있으면 연락하라는 아버님 말씀도 들었잖아. 호텔 같은 거 지원해 줄 수 있으시다고. 정말 인정해 주신 거라니까.”
“…안 믿겨서 그렇지. 그렇게 옳은 길이 아니라고 주장하시던 분이 갑자기 왜.”
원래 늙을수록 옛 추억 앞에서 무력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늙으면서 굳어진 고집보다 추억이 더 강렬해서 그런 것 아니었을까.
이후로 채하민의 얼굴엔 계속해서 의심과, 감동, 그로 인한 눈물, 대뜸 드는 의구심 같은 것들이 몇 번이나 교차하며 감정의 큰 변화를 보였다.
“아, 이거 약간 억울하다, 동화야. 왜 내가 말했을 땐 이해 안 해주셨으면서, 너랑 말하고 나니까 이해해 주시지.”
채하민은 울먹거리면서 그렇게 말하다가도.
“…그래도, 진짜 고마워.”
라고 갑자기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하민.”
“그렇게 말해도…….”
나는 조심스레 녀석의 어깨를 부여잡고 말을 끊었다. 채하민은 스스로의 생각보다 자신이 강하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너는 혼자서도 문제 해결할 수 있었을걸.”
채하민은 그 안에 담긴 속뜻을 알아들었는지 멍하니 나를 보다가 해맑게 웃어버렸다.
참, 좋은 점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근데, 해외라 그러니까 갑자기 궁금하긴 하네. 우리도 해외 진출 같은 거 하겠지?”
채하민은 그만 생각하기로 했는지 일부러 화제를 돌린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이돌들은 한국에서 성공하고 나면 일본 같은 해외 시장으로도 발을 뻗는다고 하던데.
“…글쎄.”
기왕이면 아직 한국의 고마운 분들을 조금 더 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