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137)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137화(137/343)
137.
나는 책장 한 구석에 있던 책을 조심스레 꺼내들었다. 아들에게 주겠다고 직접 제본해서 그런지 어설픈 태가 나는 책, ‘망할 인생, 그리고 망할 철학’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어떻게, 당신은 죽어서까지도 모자란 아들에게 도움이 되어 주는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사셨던 아버지가 낸 책 중 한 권. 내가 태어날 즈음에 집필에 성공하셨다고, 내게 책을 주면서 웃으시던 기억이 난다.
내가 어렸을 적에 닳고 닳도록 읽어서 많이 헤진 페이지를 천천히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머리가 더 좋다는 걸 눈치 채신 아버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그 민낯부터 차근차근 보여주셨다. 그때부터 입버릇으로 붙은 단어가, ‘망할’이었다. 어머니가 애한테 참 좋은 거 가르친다고 하자, 아버지는 웃으면서 ‘모든 인생은 망하는 법이지.’라고 자랑스레 대답하곤 하셨다.
이 책을 펼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목화를 떠나보낸 이후부터였으니, 약 15년만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엔 책장에서 여기저기 헤진 악보집을 한 권 꺼내든다. 어머니의 이름이 적힌 악보집. 어렸을 땐 음악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이제 와 한 줄 한 줄 새겨 보니 얼마나 냉철한 시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어두운 감정을 날선 선율로 새긴 악보는 이제야 내게 어머니의 가치관을 민낯부터 알려준다.
이렇게나 다른 두 분이 서로 사랑에 빠졌다. 함께 길을 걷다가도,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아버지는 존재의 마지막이 무엇일지 사유하고, 어머니는 생명의 죽음을 연주했다.
작곡가와 대학 강사. 두 분 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대단한 면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세상이 모든 재능을 담아내진 못했다. 그렇기에 그리 풍족하진 않았지만, 집안의 훈기만큼은 명확히 기억이 난다. 따스한 철학자와 차가운 작곡가 밑에서 세상을 배웠던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영광이었다.
“…아빠. 엄마.”
조용히 입에 담아 보는 감각이 낯설다. 하긴, 7살이 됐을 때부터 나는 두 분을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으니까. 그리고 그제야 두 분의 죽음이 내 눈앞에 선명히 떠오른다. 어렸던 그날, 그날 이후로 애써 외면하고 있던, 이성적으로 이해하더라도 감정적으로 거부했던 사실이 명확해진다.
그래, 이제야 두 분의 죽음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죽음을 바라보기엔 어렸을 땐 여유가 없었고, 목화를 보내고 나서는 면목이 없었다.
나는 눈물 한 방울을 조심스레 흘려보냈다. 어렸을 때 했어야 할 통곡은 결국 오늘의 눈물 몇 줄기가 되고 말았다.
주디스 버틀러는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상처라고 얘기했다. ‘나’라는 개념 자체가 가족과 같은 주변인의 영향으로 성립된 존재라는 의미다. 내 모든 삶은, 결국 그 두 분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타인. 나를 구성하고 있는 얼굴들. 오늘에서야 그 흔적을 되새겨 본다.
……비록 너무 감상적이지만. 오늘 하루만, 유년의 그날을 대신해서.
나는 책을 펼쳐 든다.
‘망할 인생은 너무나 많은 이데올로기 속에서 허우적댄다. 자연의 동결은 순간을 영원으로 인식케 하며, 끊임없는 변화를 왜곡한다. 우리의 순간은 그 수많은 왜곡 위에서 굴절하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는 따스한 사람이었지만, 문장은 가끔 정도를 지나쳐 난해할 때가 있었다. 아마도 이 책은 돈 걱정 같은 걸 모두 포기하고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만 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버지가 쓴 문장 아래에 어렸을 적 나의 필체로, 약간은 삐뚤빼뚤하게 제멋대로 쓴 해석이 적혀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포스트잇으로 아버지의 답변 혹은 제안이 쓰여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억누르지 않은 순간부터, 왠지 모를 따스한 감각이 몸을 휘감아 온다.
* * *
류이든은 지동화와 채하민의 방으로 들어가려다 멈칫했다. 왠지 이 문을 벌컥 열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까. 조심스레 방문을 살짝 열고 확인한 순간 그는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우네.’
지동화가 우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그는 기괴한 것을 본듯 약간 몸서리치고 말았다.
‘미래라도 잠시 엿봤나.’
하지만 지동화라면, 그럴 때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기 위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면 잠기지 울지는 않을 테다.
들어가서 위로를 할지 말지, 깊은 고민에 빠졌지만, 동화는 아마도 혼자만의 시간이길 바라지 않을까.
류이든은 결론을 짓고, 문앞에 가만히 앉았다. 누군가 들어오려 하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 지동화보다 똑똑하지 못하니까,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밖에 없어서 아쉬울 뿐이었다.
* * *
채하민은 아버지와 길고 긴 통화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뭔가, 허무하네.’
아버지의 응원이 지나치게 낯설게 느껴졌다. 동화가 또 무슨 수를 둔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아버지를 설득한 것이 분명한데, 이렇게 항상 도움만 받아서야 친구라고 할 수가 없는데!
채하민은 그 특유의 습관대로 잠시 땅굴을 파고 들어갔다. 동화에게 연기를 가르쳐 준 적은 있다지만, 그렇게 큰 도움은 아니었을 거고. 옆에서 늘 귀찮게만 만드는데 이래도 될까. 무수히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쳐 갔다.
오랜 연습생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정의로운 성격 탓에 알고 지낸 사람은 많지만 친한 친구는 적었던 채하민은 어떻게 해야 동화에게 보답할 수 있을지 고민됐다.
‘…이든이 형은 왜 저기에.’
그런데 류이든이 자신의 방 앞에 앉아 팔로 몸을 들어 올리는 요가 자세를 하고 있는 걸 보고 채하민은 잠시 멈칫했다.
‘색다른 곳에서 운동을 하고 싶었나 보다!’
채하민은 그렇게 결론짓고 문에 다가간다.
“이든 형, 잠시 좀 비켜 주라.”
“…안 돼.”
그러고 나서 류이든은 한껏 낮춘 목소리로 안에서 동화가 울고 있다는 짧은 한 마디를 던진다.
“…어?”
채하민 역시 류이든처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조용히 류이든의 옆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거짓말한 건가?’
분명 좋은 이야기만 한껏 했다고 얘기해줬는데. 그렇게 다시 또 땅굴을 파 들어가는 채하민이다.
“……형들 잠시, 아, 뭔지 알 것 같아요.”
채하민이 방문 앞에 앉고 나서 공부하다가 물어볼 게 있었던 이현재가 분위기를 보고 대충 무슨 상황인지 파악해서 채하민의 옆에 앉아 공부하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방에 들어가면 안 될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저-만 빼- 놓으시면 약-간 서운합-니다!”
석준은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방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재밌어 보였는지 이현재와 류이든의 사이에 앉았다.
그렇게 블로센스에서 지동화를 제외한 모든 멤버가 방문 앞에 둥그렇게 둘러 앉아 각자 할 일을 했다. 한 명은 팔 근육 단련을, 한 명은 굴착 사업을, 한 명은 공부를, 한 명은 핸드폰으로 덕질을.
* * *
얼추 모든 감성을 털어내고 후련한 마음으로 세수를 하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바로 눈에들어오는, 멤버들이 둘러앉아 있다가 내가 나오자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모습.
내가 모르는 사이 우리 그룹에 원시 종교가 정착하기라도 했나. 구지가라도 불러야 어울릴 법한 모습이다.
“도, 동화 형, 안녕?”
류이든의 표정을 보니 내가 나오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날 계획이었는데, 내가 조용히 나오는 바람에 모두 무산됐나 보다.
망할, 들켰나 보군. 가장 합리적인 해답은 내가 우는 걸 알고 류이든이 모두를 멈춰 세웠다는 가설이지 싶다.
“…여기서 뭐 해, 다들.”
그러므로 모른 척하자. 나조차도 아까 전의 나를 유년기가 되살아난 망령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니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우, 그냥 의자가 너무 딱딱해서 색다르게 바닥에 앉아서 대화중이었지.”
“마, 맞아, 동화야.”
…방금까지 아버지가 써 놓은 아름다운 논리를 읽고 와서 그런지 저 말들이 하나같이 괴상하게 들리는군.
한 명씩 얼굴을 마주보다가 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뭐.
“…그럼, 나도 좀 앉을게.”
헛소리는 헛소리 나름대로의 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까지 바닥에 앉고 나자 류이든이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너, 귀 엄청 빨갛다!’라고 입 모양으로 말하는 류이든. 그래서 나 역시 입 모양으로 답해 줬다.
닥쳐, 강아지.
* * *
“이번 앨범하고 잘 하면 해외로 잠시 다녀올 수도 있다더라.”
바닥의 원탁회의 중 류이든의 말로 한 가지 화두가 던져진다. 채하민과 돌아오면서 했던 말이 이렇게 빨리 현실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음, 근데 좀 이르지 않아요?”
“요즘 해외로 나가는 거야 뭐 관례지, 이젠.”
“…하긴 한국에서 자리도 제대로 못 잡은 상황에서 해외 활동 나가는 형들도 많이 보긴 했어요.”
“그러니까, 기왕이면 이번 앨범을 대박 내는 게 좋지. 한국 팬분들한테 한동안 얼굴 못 보여 드리니까.”
이미 앨범이 다 완성된 상황에서 그렇게 말해도 바꿀 수 있는 게 없는데, 이든 형.
“…오, 좀 멋있었어요, 형. 연습생 때 보는 줄.”
이현재가 수줍게 웃으면서 말한다. 아마도 류이든의 리더적 면모를 가장 아끼는 건 저 여우 놈이지 싶다.
“호, 혹시 일본도 갑니까? 그럼 저 꼭 들리고 싶은 놀이 공원이 있습니다!”
놀러 가는 게 아니야, 준.
“아직 일정은 안 나왔지. 그래도 아마 일본에는 가지 않을까? 제일 무난한 선택지잖아.”
류이든은 바닥을 손바닥으로 한 번 탁 친 뒤 주의를 집중시킨다.
“어쨌든! 이번 활동 힘내자! 공백 약간 길었으니까! 멋진 모습 보여주자!”
…그래. 오글거리지만 말 자체야 맞는 말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 * *
나는 ‘망할 인생, 그리고 망할 철학’을 읽으며 샵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회색으로 염색한 머리의 뿌리쪽이 검게 자라, 다시 염색을 하기 위해서.
오늘은 쇼케이스 날. 드디어 앨범이 공개되고, 팬분들과 만나는 날이다.
예상보다 떨리는군. 촬영이나 활동, 자체 컨텐츠 제작 같은 것은 꾸준히 진행됐지만, 무대에 서는 것 자체는 오랜만이니까.
뜨거운 조명과 터질 것 같은 함성을 온몸으로 받는 순간은 꽤 오랫동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어으, 떨린다, 동화야.”
“준이 형, 저, 꾸, 꿀물 좀 줄래요? 저 삑사리 나면 진짜 슬플 것 같은데.”
“현재야! 여기 꿀물 내가 타 왔어!”
소란스런 상황 속에서 저마다 긴장을 호소하는 멤버들. 심지어 이현재는 실수하면 안 된다고 세뇌하듯 눈을 감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리 멤버 중 유일하게 음이탈을 낸 전적이 있었기에 저러는 거겠지.
“동화 형, 머리는 좀 괜찮아? 지난번엔 엄청 아파했잖아.”
하지만 리더라는 직책 때문인지 류이든만큼은 온전히 긴장하지 못한 채 멤버들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계속해서 챙겨 주고 있었다.
“…음, 사실 감각이 없어진 느낌인데.”
솔직히 말하면 뜨거워 죽겠다. 망할 아이돌, 이런 식으로 계속 염색하다간 언젠가 머리털이 남아나질 않겠군.
“어우, 여기, 너가 지난번에 좋아했던 쿠키 사놨으니까 먹으면서 견뎌!”
내 품에 쿠키 한 개를 툭 안겨주고 나선 곧바로 다시 뒤돌아 가는 류이든.
‘…음, 이것도 따스하게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책을 잠시 데스크에 올려두고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주, 고소한 맛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