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143)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143화(143/343)
143.
‘루미너스’의 뮤직 비디오 촬영 현장. 음악 방송 활동 도중 시간을 짜내서 만들어야 하므로 오늘 하루만에 촬영을 마친다고 한다. 기존 뮤직비디오와는 달리 스토리도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나는 지금 당황하고 있다.
“의상 컨셉이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우리의 데뷔 때부터 함께 한 스타일리스트 분께 여쭸다.
“추억 회상.”
넝마를 걸치는 건 추억이라 부르기엔 문제가 있지 않나. 예전에도 한 번, 시스루라는 모직물 쪼가리 때문에 당황했던 전적이 있는데, 기시감이 장난 아니군.
“저희 이런 추억이…….”
내 손에 들린 건 많은 곳이 해진 스웨터. 굳이 따지면 서바이벌 4차 경연에서 입었던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있기는 한데, PTSD를 유발할 수 있는 트라우마에 가깝습니다.”
망할 서바이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 차라리 그 계단을 치우는 게 아니라 부수는 퍼포먼스를 했으면 속이 더 편안할 텐데.
“동화야, 팬분들한테 투표 받았어! 제일 보고 싶은 착장으로. 이번 무대는 완전 팬분들 뜻대로라니까?”
대체 왜, 우리 팬분들은. 나는 심란한 기분을 만끽하다가 체념하고 그저 손을 내밀었다. 더 주실 게 분명 있을 테니까.
“크하하, 어우, 역시 동화, 너는 눈치가 빨라서 편해.”
스타일리스트님은 가만히 개 목줄을 내 손에 얹어 준, 잠깐.
“초커랑은… 생긴 게 많이 다른… 느낌인데요.”
“요즘엔 그렇게 나오는 초커도 많아.”
누가 뭐래도 이건 목줄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요건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는데.
나는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아이돌로 일하는 중에는 목에 계속 뭔가 채워지리라는 사실을.
“이 망할, 목줄은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지.”
목줄을 끼지 않기 위한 기회비용이 너무 커서 잠시 포기할 뿐 언젠가 탈출하고 말 거라고, 나는 다짐했다.
“어우, 여기에 웬 맹수 하나가. 표정만으로 다 죽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빠!”
류이든이 지나가면서 하는 헛소리. 처음부터 끝까지 트집 잡아야 할 것투성이다.
* * *
‘루미너스’는 추억을 콘셉트로 잡은 곡. 따스하고 평안한, 듣기 좋은 팝송 같은 곡이다. 정확히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AR팀에선 음원 성적을 기대할 필요는 없으니 힘 빼고 만들라고 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있을까. 팬분들에게 헌정하는 노래이기도 하고, 나는 장해진 팀장님 인증 ‘독 짓는 노인’인데 말이다. 이현재는 아침 이른 시각 작업실에 질문할 것을 한가득 품고 왔다가 작업에 집중한 내가 깨어나길 1시간 가까이 기다린 전적이 있다.
“…현재 왔었어?”
1시간이 흐른 뒤, 내가 뒤돌아봤을 때, 이현재는 한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제 생각에 형은 미친 사람 같아요.”
“비유적인 표현을 잘 활용하네, 현재.”
“어… 비유가 아닌데.”
현재야, 나는 미친 사람이라기엔 너무 보편적인 인간인데.
짧았던 회상을 마치고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추억이라는 키워드 때문일까, 뮤직 비디오 촬영 중 몇 번 의상을 갈아입었는데, 모두 예전에, 한 번은 입었던 의상이었다.
오늘 무대 의상 역시 마찬가지. 다른 멤버들과 달리 나만 푸른빛의 한복을 입고 있다. ‘흥’의 연장선상 같기도 하지만, 분명히 이건 석준과의 무대에서 입었던 의상이다.
반면에 채하민은 스웨터, 류이든은 수평선의 마린복, 이현재는 지니 무대의 가죽 옷, 석준은 클라우디 블루의 시스루 복장이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이상하게 튀지 않나. 누가 보면 한 그룹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것만 같다.
팬분들께서 보고 만족할 수 있다면 좋겠다.
“블로센스, 촬영 들어갈게요!”
우리는 하나둘 앉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우, 느낌 이상해. 서바이벌 때 의상 입으니까.”
“이든 형, 나도. 느낌 좀 그래. 1년하고 조금 더 전에 이 옷 입었던 거잖아.”
“이제 데뷔도 슬슬 1주년 돌아오잖아요.”
이현재의 한마디에 나는 잃어버렸던 시간 감각을 되찾는다. 1년 정도의 시간만 돼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건 심리학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거겠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은 더 빠르게 흐르는 것으로 느껴진다는데, 정신 연령이 29세라는 사실이 이럴 때에는 아쉽다.
조금 더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좋을 텐데.
“형―님들, 현재, 힘냅―시다!”
요즘 텐션이 가장 좋은 석준의 응원을 받으며 우리는 무대로 발을 올린다. 어느새 집구석 방안보다 즐겁게 느껴지는 곳. 이렇게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는데, 참.
무대에 오르자 조명이 약간 뜨겁게 느껴진다. 팬분들께선 아직 무료로 공개된 음원을 듣기 전, 그러니까 ‘루미너스’라는 곡과는 첫만남이다.
이런 곡으로 전해지기는 할까, 내 고마움이. 이렇게 행복한 일상을 선물 받은 심정을, 부족한 실력을 가지고 제대로 곡에 담아낼 수는 있을까.
“여러분, 오늘 저희 무슨 곡 하는지 모르시죠!”
“후속곡!”
3주 연장된 활동에 팬분들은 이미 심장이 터지시나 보다. 한 분씩 얼굴을 보다 보니. 몇몇 눈에 익은 분도 든다. 저분은, 예전에 팬사인회에 오셔서 신이 존재할지 여쭤보셨던 분이네.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나 웃는다.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을 훈련한 게 이전의 삶에서는 그리 좋은지 몰랐는데, 지금에서야 기억력을 단련한 의미를 깨닫는다.
좋은 기억을 내 머릿속에 영원히 담아두기 위함이었나 보다.
* * *
‘뭐지, X발. 지동화 날 암살하려는 계획인가. 왜 미소 짓지.’
지동화의 팬은 숨을 잠시 참는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오랜만에 온 사녹 현장이다. 무조건 버틴다.
미소 짓는 건 좋지만, 그러다 내가 심정지로 쓰러지면 안 된다. 쓰러지더라도, 최소한 무대가 끝나고 난 다음에 쓰러져야 한다.
‘…아니, 무대 끝나고 쓰러지면 만에 하나 애들 멘탈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집에서 쓰러진다.’
이성적인 결론을 내린 그녀는 공식 응원봉을 꼭 부여잡는다. 꽃 모양의 봉, 오랜만에 서랍에서 꺼내 손에 쥐었지만, 익숙한 감각이다.
“동화야! 한복 잘 어울려!”
평소엔 이 정도 성량이 나오지 않는데 이 자리에만 서면 폭발적인 성량이 되고 만다.
“감사합니다.”
류이든으로부터 마이크를 전달받아 정확히 자신이 서 있는 방향을 보고 고개를 한 번 꾸벅이는 지동화에, 그녀는 다시 숨을 꼭 참는다. 망할, 버텨, 나 자신!
그렇게 하반신에 힘을 줘서 꿋꿋 버티고 있을 때, 울리는 큐 사인. 오늘 처음 듣는 곡이 흘러나온다.
‘뭐지, 나 이번 앨범 수록곡 가사까지 외울 수 있는데.’
어쩐지 무슨 곡한다는 말이 없더니, 완전 새 곡이 진행되나 보다.
‘…애들 그만 굴려, 개같은 회사 놈들아!’
대체 어떤 미친 회사가 후속곡 활동으로 갑자기 새 곡을 녹음해! 아니, 그런 회사 많긴 한데 너흰 그러면 안 돼, 니체!
그러나 곧 부드럽고 따스하게 귀를 감싸는 음률에 관심이 집중된다. 전주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멜로디. 지동화와 채하민이 페어로 나와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씩 번갈아 부른다.
너와 나 구름 낀 하늘 아래 만나
마지막 시작까지 손을 맞잡아
둘만 있으면 왠지 또 흥이 나
오늘은 전하고 싶어, 고맙다
처음 네 마디의 가사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 씨, 이거.’
팬송이구나. 진짜, 팬송이구나.
그래서 클라우디 블루부터, 마지막 시작, 그리고 흥까지 이어진 타이틀 곡 제목을 연달아 적은 거구나.
아이돌 덕질 N년 차, 이미 여러번 팬송을 들어봤다. 그러나 구 본진이 파멸을 맞은 이후, 다시 이렇게 들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어서일까.
그녀는 지금 새삼스레 감동을 받았다. 팬송을 부르고 있을 때 뒷소문이 구렸던 구 본진의 모습은 아무리 팬심으로도 견디기 힘들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이 곡을 듣고 왠지 모를 힐링을 하는 중이다.
‘…얘들은 등에 칼 놓을 인간은 아닌 것 같으니까.’
아이돌 산업의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상품에 하자가 있을 때 환불이나 AS같은 사후 처리가 힘들다는 점이다. 앨범을 열 장 넘게 살 때는, 그 사람을 보고 산 거지, 앨범을 보고 산 것은 아니니까.
그런 점에서 데뷔 후 여태껏 단 한 번의 병크(연예인이 사생활 등의 이유로 팬들의 믿음을 배신하는 행위를 총칭하는 말)도 터지지 않은 그룹이라는 점에서 안심이 되기도 한다.
‘X발, 블로센스는 영원히 안전한 내 돌이다.’
어찌 될지 모르는 미래라 하더라도, 그녀는 처음 지동화를 봤을 때 느꼈던 감각을 믿기로 한다. 만일 자신이 블로센스의 일원이었어도 지동화가 옆에 있는데 헛짓거리는 하기 힘들 것 같으니까.
‘정의란 무엇인지 아는 인간은 등에 칼을 꽂지 않는다! 주변인이 그러는 걸 두고 보지도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무대에서 눈을 떼지는 않는다.
Luminous in me, 어둠 속 선명한 불빛
Luminous in me, 두 발 맞춰 걸어갈 길
따스한 멜로디 라인에 이현재의 청아한 목소리가 후렴을 부른다. 천천히 녹아내리는 기분을 만끽하며 그녀는 환호했다.
* * *
사전 녹화를 위한 두 번의 무대를 마치고 나는 류이든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안무, 너무, 빡빡하잖아, 형.”
이걸 사람이 추라고 짠 동선인가 싶다. 너는 개라서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사람이란 말이다.
“어, 그거 하민이 탓인데, 동화 형!”
나는 멱살을 놓고 다시 갈 길을 간다. 그런 내 뒤로 무엇인가 억울하다는 듯 몇 번을 입을 웅얼거리던 류이든이 소리친다.
“저, 저, 하민이한텐 한마디도 안 하는 것 좀 봐! 아주 그냥! 나만!”
폭주하는 토끼 놈을 말리지 못한 당신 탓입니다, 망할 강아지.
음악방송실 여러 스태프분들께 인사를 드리며 걸어가던 중, 멀리서 누군가 크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동화야! 이든이 형!”
음, 선한 인상이다. 갓에이 컴백 일이 우리 후속곡 활동기랑 겹친다더니, 이렇게 바로 만나는군.
달려오는 윤성호의 뒤로 호연까지 함께 이쪽으로 달려온다. 무표정으로 달려오지 마.
“동화, 오랜만.”
여전히 문장을 가장 적은 수의 단어로 구성하고 있구나. 한결같아서 좋다.
그리고 이어서 나머지 갓에이 멤버들이 뒤로 주르륵 선다. 예전에 싸가지가 0에 수렴했던 전적 탓인지 류이든이 내 앞에 서서 약간 가리듯이 선다.
그러나, 언제나 세상은 예상대로 흐르지는 않나 보다.
“아, 안녕하세요, 블로센스 여러분!”
세상에나. 그 싸가지 없던 애들이 이렇게 예의바르게 인사하다니.
나는 윤성호 쪽을 바라본다. 자기 멤버들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헤실대고 있는 모습. 선한 영향력이라는 걸 갓에이 그룹 내에서 실현한 게 분명하다.
‘나였으면 그냥 진즉에 탈퇴하고 잠적했을 텐데, 어떻게.’
채하민도 내 뒤로 조심스레 와선 귓속말한다.
“쟤들 혹시 인체 개조 같은 거 당했나?”
지금으로선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다. 토끼, 가산점 1점.
“어우, 안녕하세요, 갓에이 여러분!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완벽한 류이든이 당황한 기색을 하나도 표내지 않고 대답한다.
“동화야, 어때. 우리 애들 많이 컸지.”
류이든과 갓에이 멤버들이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윤성호가 조심스레 다가와서 귓속말한다.
“…이건 컸다기보다도.”
윤성호의 어깨 너머로 약간 긴장한 표정, 어떻게든 지시받은 바를 완벽히 수행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얼굴에 엿보이는 갓에이 멤버들이 보인다.
‘세뇌된 것 같은데.’
아마도 윤성호가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걸로 직종을 바꾼 건 아닐까. 인격 개조에 성공하다니, 나중에 동업자가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