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176)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176화(176/343)
176.
“네, 진한 씨.”
“허, 으, 보, 본명 기억해 주셨, 으어.”
죄송한데, 감동받을 일이 아닙니다. 제가 기억하는 게 잊는 것보다 쉬운 편인 사람이라. 어쨌든, 류이든 사회성 특강 심화편, 답하기 애매할 땐 미소 지어라.
그러자 디키 씨는 다시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어올렸다,
“으, 영광입니다! 음원 순위 6등 하신 것도 정말 축하드려요. 제가 번호만 있었으면 6위 달성된 거 보자마자 문자로 축하 메시지 보내드렸을 텐데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미친 사람. 그럼 수시로 음원 순위 확인하고 있었다는 거잖아. 조금 무서운데. 굉장히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 진한 씨는 뭔가 할 말이 더 남았다는 듯이 우물쭈물거렸다.
“어, 그, 제, 제가 드릴 말씀이! 잠시 시간을 좀!”
말끝에 격앙된 감정을 조금 빼주세요.
“아, 하시면 됩니다. 시간 여유 있거든요.”
“그, 저, 잠시 따로!”
저런.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내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하고 있자, 목화가 타이밍 좋게 진한 씨의 어깨를 잡았다.
“한 번 가줘라, 형!”
사지로 형을 떠미는 동생이라니, 나는 그런 걸 기른 적이 없는데, 목화. 목화는 내 눈에 담긴 간절함을 살피더니, 귓속말로 속삭였다.
“형이랑 대화하고 싶다고 맨날 말해. 저대로 뒀다간 내 핸드폰 뺏어 가서 번호라도 알아낼 기세라니까.”
이 사람도 광기에 휩싸였어. 망할, 왜 인간은 한둘쯤 미친 구석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나는 속으로 한탄하며 널브러져 있던 지갑을 들었다.
“그럼, 매점에서 마실 거라도 사드릴게요.”
“아, 가, 그, 감사합니다!”
“어? 동화야! 같이 갈까!”
채하민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상, 뭔가 비밀스럽게 할 말이 있어 보였으니까. 하, 뭔 놈의 망할 아이돌 판은 대체가 평화로울 때가 없을까.
매점으로 가는 길, 디키 씨는 흘깃거리며 나를 훔쳐보긴 했지만,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도 타고난 성정에 따라 아무 말 없이 바닥재의 재질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걷기만 했다.
‘…도망치고 싶군.’
대체 뭔데. 살인 자백이라도 들으러 가는 기분인걸. 정말 그런 거라면, 목화나 우리 멤버들이 아닌 이상, 아무런 망설임 없이 112를 누를 자신이 있다.
매점에 도착해서, 견과류가 들어간 쿠키 하나랑, 진한 씨가 고른 토마토 주스―대체 이 음료를 왜 좋아하는지 깊은 의문이 한 번 들었다.―를 계산하고 자리에 앉았다.
“여기.”
“아, 감사합니다!”
진한 씨는 빨대를 빼, 톡, 넣고, 한 모금을, 쪼릅, 마셨다. 그리고 침묵.
나는 쿠키의 포장을, 찌익, 찢고, 빼서, 한 입을, 바삭, 씹었다. 그리고 다시 침묵.
내 머릿속 체내 시계가 시간이 1초가 흘렀음을 알릴 때마다, 속에서 알 수 없는 감각이 솟구쳐 올라왔다. 아, 도망치고 싶은걸.
“저기…….”
“저기…….”
세상에, 말이 겹쳤어. 머피, 당신이 만든 법칙은 이렇게 개같은 상황에 쓰라고 만든 게 아니잖습니까.
나는 클리셰처럼 뒤에 이어질 ‘아, 먼저!’, ‘아니요, 먼저!’같은 대화를 차단하고자, 당황하는 진한 씨를 애써 무시하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왜 부르셨습니까?”
“아, 드릴 말씀이 있거, 으, 든요?”
그건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서 지금 막 이 상황을 보는 사람도 알겠습니다.
“그, 저, 어.”
그렇게 또 한참을 질질 끌던 진한 씨는 드디어 말을 꺼냈다.
“선배님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뭔 소리야.
나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생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보이는 반응이었다. 일단 별말하지 않고 나는 내 속에서 논리를 쌓아올렸다. 내가 숨기고, 저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정체’라는 단어를 알 정도로, 내 주변 사람들이 잘 알지는 못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게 숨겨야할 정도의 결함에 해당하는 것.
음, 혹시 내가 사람을 죽인 적이라도 있나. 아니면, 혹시 비밀요원 비슷한 무언가라도 되나.
“선배님께서!”
내가?
“싱클레어라는 사실을!”
그게 왜 ‘정체’라는 단어를 쓸 정도의 사실인가요, 제가 멍청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진한 씨는 토마토 주스를 꽉 쥐었다. 빨대 끝에서 기묘한 빨간 물이 톡톡 떨어졌다. 그러나 진한 씨는 그것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환희에 휩싸여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곡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알았어요!”
“아, 네.”
심드렁하게 답했음에도 진한 씨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초반부 편곡이, 묘하게 마지막 시작이랑 비슷한 느낌이었거든요. 자체 표절은 아닌데, 뭐라 그러지, 그 분위기가! 그래서 어? 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듣고 보니까…….”
길고 긴 설명. 처음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래서, 이 부분을 다른 곡이랑 계속 비교해 보고, 또 비교했는데, 여기 신스 배열이랑, 드럼 비트 구조가…….”
점점 더.
“게다가 3분 17초쯤에 분위기를 살짝 변주해서 가져갔는데, 이때 나왔던 박수 소리! 어디에도 없는 샘플! 선배님이 직접 녹음한 걸로 추정되는데…….”
무서워. 무서운데. 이거 조금, 공포스러운 게 맞지 않을까. 나는 지독한 무표정을 가까스로 유지했지만, 속내로는 답지 않게 동요하는 중이었다. 음악이 상품이라고는 해도, 내 작품이다.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 여겨진다. 그런데 그 구성요소를 지독하게 분석하고 있는 인간을 눈앞에서 목도하자, 무언가 질척한 감정이 기저에 깔려 있음을 깨닫고 말았다.
……저거, 석준이 위즈니 얘기할 때 느끼는 감정이랑 굉장히 유사해 보이는걸.
“그래서 결론을 냈어요. 서, 선배님이, 저희를 위해!”
진한 씨는 토마토 주스를 손에 여전히 꽉 쥔 채 자랑스럽게 물었다.
“선배님이 싱클레어죠.”
정곡을 찔렀다는 표정. 토론에서 상대방을 무너뜨렸다는 확신을 가지는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저런, 약간 심술이 나려 하는군. 저런 표정이 무너져 내리는 게 그렇게 보기 좋은데. 태생이 못돼 먹은 성격이라 그렇다.
그래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음, 싱클레어가 누구입니까? 제가 아는 건 소설 등장인물 이름인데.”
이럴 때는 ‘아니요’라고 말하면 안 된다. 상대방이 말하는 맥락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의미니까. 게다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아니라고 확정해준 적은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진한 씨를 몇 번 뵙지 못했지만, 순수한 정도로 따지면 채하민보다 약간 못한 정도, 그러니까.
“아… 아아, 아, 아닌가요?”
이렇게 쉽게 믿고 만다. 무너져 내리는 표정이… 음, 꽤 놀릴 맛이 나는군. 아주 만족스러운 반응이다.
어쨌든 여기서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나는 거짓말을 하면 양심이 아픈 사람이니까, 그럴 수는 없다. 음, 이 친구가 순진해 보이긴 해도 나를 꽤나 선배로서 따르고 있으니까.
“진한 씨가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생각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쿠키를 마저 입에 넣으며 인사했다. 부디 알아채 줬으면 좋겠네. 그러면 놀릴 맛이 세 배로 날 것 같은데.
* * *
‘아, 아니라는 건가……?’
아니라고 말한 적 없지만 진한의 뇌는 몰랑몰랑하게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무슨, 말씀을 하신 거지?”
살면서 자기가 대화 맥락을 놓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사람을 만난 것 같다.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무슨 소리지. 암호 같은 건가, 동화 선배님은 한국대니까, 자신만의 암호 체계를 갖추고 있다든가.’
정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쏟아져 오는, 무수히 많은 가설들. 진한은 겉보기에는 약간 모자란 사람처럼 굴지만, 그 안에는 구렁이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애초에 한 그룹의,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겉으로는 유약해 보여도 속으로는 강해야 한다.
‘아니라고는 안 했지.’
변호사인 어머님 말씀하시길, 문장에는 항상 숨겨진 의도가 있을 수 있다. 특히 고도로 교묘하게 꾸며진 말장난은 진실과 다를 바가 없다고!
‘아니라고는 안 했고, 누가 봐도 맥락상 동떨어진 대답을 했다…….’
그의 뇌 속에서 차근차근 정황이 정리된다. 대화의 맥락이 초단위로, 지동화의 리액션이 초단위로 다시금 떠오른다. 지동화가 만약 들여다봤다면, ‘소름 끼치는군.’이라고 짤막한 감상을 늘어놓을 정도로.
즉, 진한은 지동화 앞이라 유독 더 멍청하게 구는 것일 뿐, 그 본질은 늪 속에 몸을 숨긴 악어랑 비슷한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사람 보는 감각이 꽤 좋은 지동화가 틀릴 정도로 늪의 깊이가 깊은 인간.
그렇기 때문에 그는 깊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그와 더불어 뇌는 점점 더 가열된다.
그리고 다다른 결론.
“…아아, 이거 시험 쳐 보시는 건가?”
‘동화 선배쯤 되는 훌륭한 수재라면, 대화 안에서 모종의 시험을 냈을 수도?’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어쩌면 이 모든 대화가 일종의 퀴즈일 수도 있다.
의문이 드는 대답, 그 의문을 해소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개 학식이 더 높은 사람은 일부러 질문이 들 법한 말을 하고, 그걸 통해 상대방이 성장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동양의 선문답처럼 대화 자체가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짜인 거라면?
“…아, 그런데 답을 모르겠네.”
친해지기 어려운 선배야. 아무리 봐도 연예계 생활에서 도움되는 건 둘째 치고 인간적으로 존경할 만한 선밴데. 무슨 친해지는 조건이 선문답이야. 난이도가 너무 어렵잖아.
‘당 떨어져……. 머리를 쓰면 이게 문제야…….’
하지만 식단 관리라는 무서운 벽 앞에서, 진한은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다가, 이내 돌아갈 시간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은근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옆에서 청소하시던 환경미화원 님은 웬 광인을 다 보겠다는 눈초리를 하셨지만, 그는 맑게 웃으며 고생이 많으시다고, 감사하다고 말을 던질 뿐이었다.
그리고 진한은 다음 날, 자신의 추론에 확신을 얻었다.
음악 방송 1위 트로피를 받고, 축하의 인사를 드릴 때, 동화 선배의 얼굴에서 보였던 감정. 진한은 미소 지으면서도 그 감정이 무엇에 가까운지 분석해 냈다.
그러니까, 그건.
* * *
실망. 실망스럽다. 눈치챘으면 더 놀릴 수 있었을 텐데.
내가 했던 말이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한 구절이라는 사실을 알아챘으면 더 재밌었을 것 같은데.
하긴, 순진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그 의도를 파악하려는 생각은 안 했을 것 같긴 하지만.
“너, 순진한 후배 놀리고 그러면 안 돼, 동화야.”
채하민이 나를 진한 씨 앞에서 슬며시 끌고 가며 중얼거렸다.
“눈치가 빨라졌어, 하민.”
채하민이 멤버들 한정으로 은근 눈치가 날카로워져서 전처럼 놀릴 수가 없어서 너무 아쉽다. 뜨개질 다음 가는 취미가 멤버들 놀리는 거였는데.
놀려도 놀리는지 알아채주지 못하는 석준과, 놀릴 구석이 없는 이현재는 제외하고 나머지 둘을 골려 주는 건 참 재밌었는데, 채하민을 놀리는 타격감이 약간 줄었다.
“그야, 너가 ‘아, 아쉽다! 더 놀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같은 표정을 하면 모를 수가 없잖아.”
그거 좀 무서운데, 하민. 네가 배운 게 타로가 아니라 독심술이었던가?
“그러니까. 저 친구 착해 보이는데.”
류이든까지 가세해서 잔소리했다.
“아, 다음 주에는 호핀두 1위 후보 올라오겠네요. 음원 순위 10위권이던데.”
……음, 잠깐, 그럼 나는 누가 이기기를 바라야 하는 거야, 현재?
망할, 철학과 수업도 아니고 딜레마를 마주치다니, 망할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