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189)
눈치, 이럴 때는 좋으면서.
나는 손가락이 약간 아픈 걸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하민은 아이들을 유혹해서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아이들을 이끌고 떠나갔다. 체력, 체력이 부족해.
나는 벽에 기대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옆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나와 거리를 두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 여기 또 살인마가.
그러나,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랑 비슷한 타입인가 보다. 낯을 가리는지, 책에 온 시선을 집중한 채로 다가오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말없이 건네고 있었다.
나는 눈길을 거두고 채하민이 아이들과 해맑게 놀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존경스러웠다. 나랑은 전혀 다른 타입의 인간이네. 정말 태양 같은 놈이야.
“…안, 힘들어요?”
갑자기 들어오는 진실 공격. 참 매섭다.
“…응.”
어른의 더러움을 이해해 주렴. 여기서 힘들다고 답할 어른은 없단다.
“거짓말.”
“…똑똑하네.”
“제가 조금 그래요.”
똑똑해 보이긴 해. 그 나이에 책 읽고 있잖아. 이솝우화라고 적혀 있는 책은, 동화보다는 산문에 더 가까워 보였다. 동화가 아니라 그런 책을 찾아 읽을 정도면, 저 나이 때의 나보다 똑똑하겠지.
“저랑, 책 읽을래요?”
“그럴까.”
주크박스도 끝났으니, 지동화의 독서 토론 시간이나 열어 봐야겠다. 하민, 미안해. 나머지 다섯 명의 아이를 부탁할게, 비겁한 나를 용서해 줘.
교실은 두 개의 영역으로 쪼개졌다. 채하민이 주도하고 웃음소리가 넘쳐 흐르는 곳과 그 누구도 주도하지 않고 침묵이 짙게 내려앉아 책 넘기는 소리만 퍼져 나가는 이곳으로.
“…제 이름은 김봉주라고 해요.”
“응, 나는 지동화야.”
차락. 한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안 웃어요?”
“농담이었어?”
“음, 아니요.”
잠깐,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힘들어서 이 아이와는 초면인데 반말을 해 버렸다. 이 무슨 무례를.
다른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치다가 ‘왜 그렇게 말해요?’라는 질문 때문에 반말을 하고 왔더니 어느새 입에 붙었나 보다. 지금부터 다시 존대를 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스운데, 어떡하지.
그래, 이건 한 가지 말고는 방법이 없겠다. 원래 초면일 때는 수평적인 상황에서 출발해야 하는 법이다.
“봉주.”
“네.”
“너도 반말할래?”
“…네?”
“내가 반말해도 되는지 허락을 안 받고 해 버렸거든.”
“와아, 선생님, 약간 미친 사람 같아요.”
나도 안단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합리적인 방법이 없었거든.
“반말하셔도 돼요.”
“고마워.”
차락.
“선생님, 질문해도 돼요?”
내가 아까 똑똑하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나 보다.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 보려는 걸까.
“응.”
봉주의 시선이 얼굴을 찔러대기에 나도 채하민에게서 시선을 뗐다. 바가지 머리, 옷도 몇 치수 커 보인다. 순박한 시골 아이를 묘사할 때 이렇게 묘사하던 것 같은데.
“여기서, 여우가 신포도를 안 따먹고 뭐라 하잖아요.”
“응.”
여우가 나무에 매달린 포도를 먹을 수 없자, 신포도일 것이라 확신하며 가래침을 뱉는 동화다.
인간에 대입하면,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자기방어적으로 목표가 별것 아니었다고 합리화하는 것 아닐까.
‘에이, 어차피 별로 가고 싶지도 않았어.’라고 말하는 취업준비생이 그런 느낌이겠지. 인간의 한 측면을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 속에 담아내다니, 명작이다.
“여우는 왜 그랬을까요?”
서술형 문제라니, 단도직입적이네.
“봉주, 너는 왜 그랬을 것 같아.”
봉주는 내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푹 숙이고, 다시 몇 번 갸웃거리더니 답했다.
“포도가 시게 자라는 계절이라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제대로 된 시기에 따지 않으면 막 신맛이 나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다. 여우는 똑똑했구나.”
나는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우가 처음에 포도를 엄청 먹고 싶어 했잖아. 시게 자라는 계절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오, 정말 그렇네요.”
봉주는 내 곁에 앉은 지 20분 만에 드디어 웃음을 흘렸다.
“그럼 왜 그랬을까요, 흠.”
나는 가만히 있었다. 원래 이런 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찾아가야 재밌는 법이다.
“…으, 어려워요.”
“그러게. 어려워.”
그때 내 오른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깨너머로 불쑥 튀어나온 토끼 놈. 오늘 밤 여우 밥으로 던져 버리기 전에 꺼져 주렴. 진지한 학술 토론이 한창이거든.
“친구가 필요했던 거 아닐까, 여우는!”
세상에, 지금 이곳에서 가장 친구가 없어 보이는 우리 둘한테 그런 소리를 하다니. 하민, 너는 짐승도 아니야.
“선생님도, 예전에 혼자서는 못 했던 일이 있는데 친구가 생기고 할 수 있었거든. 여우도 친구가 있었다면 목마를 타서 딸 수도 있었을 거야.”
오, 웬일로 합리적인 분석이다. 여우가 비뚤어진 이유를 찾는 해석이네.
“어, 그, 어.”
그러나 봉주는 갑자기 등장한 낯선 짐승이 당황스러웠는지 이리저리 동공을 흔들다가 책을 들고 후다닥 달려가 다른 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도, 동화야.”
채하민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친구가 없었다 뿐이지 타인이 자신을 첫 만남에 거부한 경험은 없어서 상처라도 받았나 보다. 채하민 뒤로 다른 아이들도 입 위에 두 손을 모아서 ‘어떡해.’라고 중얼거렸다.
“선생님, 괜찮아요! 저희가 놀아 드릴게요!”
“맞아요! 쟤는 항상 혼자 있으니까! 저희가!”
나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잔뜩 위로받고 있는 채하민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려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봉주 곁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져 앉았다.
이번에도 인기척이 들려 돌아보니, 전과 달리 떨어져 앉지 않고 반대로 가까이 앉아 있었다. 역시, 채하민과 너무 정반대라서 친해지기는 힘들 정도다.
그렇게 또 한참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옆에 앉은 봉주가 자꾸 내 쪽을 흘깃거리는 게 느껴졌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아무 말 없이 기다려야겠다.
“…이상하죠.”
“뭐가?”
“겉도는 거.”
어휘력이 일단 네 나이대로 보이지는 않는구나, 봉주야.
“너는, 이상하다고 생각해?”
“선생님은 자꾸 되묻기만 하시네요.”
“내 생각보다는 네 생각이 훨씬 중요하니까.”
“그렇구나…….”
봉주는 바가지 머리를 몇 번 긁어내렸다.
“여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래? 무슨 생각이었을 것 같아.”
“갖고 싶은데 가지고 싶지 않다고 거짓말하는 거예요.”
정말 똑똑하네.
“여우는 왜 거짓말을 했을지 선생님은 모르겠어. 봉주는 어떻게 생각해.”
“아마도…, 그래야 마음이 편해서, 그랬을 것 같아요.”
나는 봉주를 보다가 천천히 어깨를 토닥여 줬다. 어렸을 적에 나 보는 기분인걸. 이런 게 거울 치료라고 부르는 걸까.
“그러게. 맞는 것 같아.”
나는 손을 조금 올려 봉주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줬다. 음, 귀여워.
“그럼, 봉주, 네가 여우라면 어떻게 하고 싶어.”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래.”
지금은 그걸로도 충분하다. 최소한 자기가 뭘 원하는지는 알았잖아. 저 나이 때의 나보다 몇 배는 훌륭한 인간이다.
* * *
“동화야아아아, 동화야아아아, 헌 집 줄게에에에, 새집 다오오오.”
양아치니. 헌것과 새것 사이 가격이 얼마나 차이 나는데, 무슨.
10분 정도의 짧은 쉬는 시간, 채하민은 내 어깨를 꼭 붙들고 엉엉 울어댔다.
“봉주, 나 싫어하는데, 이유를 모르겠어서 더 슬퍼어.”
“모든 애들이 너를 좋아하는 게 더 놀라운 거야.”
“근데 동화는 좋아하잖아.”
“다른 애들은 널 더 좋아하고.”
“흐어어, 공감해 줘어, 동화야아. 나 슬퍼어.”
공감은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하민. 공감하려는 자세는 나도 가지고 있지만, 전혀 공감 가지 않는 걸 어떡하겠어.
“그래.”
채하민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있으니 머릿속에 한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가지 머리를 하고, 몇 치수는 더 큰 옷, 그러면서도 약간 낡았던 옷을 입고, 늘 혼자 있으면서 친구를 가지고는 싶다고 생각하는 아이. 그 아이는 그런데도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신포도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망할, 완전 나잖아.’
일하러 온 장소에서 유년기의 거울을 마주쳐야 하다니, 가혹하다. 그렇게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추억은 아니고, 도리어 잊고 싶은 기억 중 하난데.
“인생이란 대체.”
머릿속 도서관에서 몇 권의 책을 불태우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치, 동화야아. 나도 슬퍼어어!”
닥쳐 봐, 토끼 놈아. 집중이 안 되잖아. 기억을 만지작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냐고.
그때 반대편 복도, 신발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포 영화에서 좀비 같은 괴물이 튀어나오기 직전에 조성되는 분위기 같았다.
“…끄으, 끼이.”
뭔데. 무슨 짐승 소리가. 왜 갑자기 좀비 아포칼립스로 세계관이 변했지. 나와 채하민은 둘 다 몸이 굳어서 조명이 약간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건너편을 바라봤다.
“저, 저거, 뭐야, 도, 동화야.”
음, 좀비 아포칼립스면 채하민과 둘이 생존할 확률은 0인데. 좀비는 둘째치고 내가 식량 모아 오면 착한 성격 탓에 다른 사람 나눠 주고 함께 굶을 것 같다. 그렇다고 친구된 도리로 버릴 수도 없고, 큰일이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보다 저것들, 대체 뭘 겪고 왔길래.
“으어, 으어어.(얘들아, 먼저 와 있었네.)”
저런 몰골이 된 걸까.
류이든이 말을 건넸는데, 강아지도 아닌 어떤 짐승의 울음소리를 흉내 낸 줄 알았다.
“으, 응. 형, 괜찮아?”
류이든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옆으로 이현재가 류이든의 무릎을 베듯이 누워 앓았다.
“나, 나는 비행기야.”
뭔 개소리야, 너는 개야, 이든. 본질을 잊지 마.
“나는 기차고, 비행기고, 정글짐이고, 철봉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