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219)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219화(187/343)
채하민이 한껏 긴장된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뭐, 뭐부터 하면 돼?”
“긴장할 필요는 없는데.”
“아니, 나, 너랑 작업 둘이서 하는 건 처음이잖아. 긴장 안 되는 게 이상하지, 동화야.”
미안하지만 나는 둘이서 작업하는 게 너무 익숙한걸. 지금도 준성 선배님이랑 곡 같이 쓰고 있고.
“난, 춤을 잘 몰라서.”
시키면 입출력은 가능하지만,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춤이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원리는 모른다. 좋은 글이 뭔지 안다고 쓸 수는 없듯이, 좋은 춤이 뭔지는 알겠으나 만드는 법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춤을 추고 싶은지 알고 싶어서.”
이현재는 보컬적 기교를 한껏 뽐낼 수 있게 작곡하면 그만이었지만, 이번에는 채하민을 위한 곡이니까 조금 목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채하민은 긴장된 자세로 고심하더니 이내 결심했는지 소리치듯 말했다.
“근데 나는 다른 어떤 춤보다 더 원하는 게 있어.”
뭐.
“너랑 듀엣!”
“어?”
그건 월간 지동화의 기획 의도랑 완전히 다른데. 이건, 내가 곡을 써 주는 위치에서 하는 컨텐츠인 걸.
“동화야, 너는 너무 너 자신을 보일 생각을 안 해. 머리 안에 항상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뒷전이라고 내가 누차 말했잖아?”
“…응.”
잠깐, 너한테 혼나는 시간이었나, 지금. 왜 늘상 똑같은 패턴으로 혼나고 있는 거야.
“동화야, 어떻게 한 번을 변하질 않을까. 조금만 더 이기적이면 좋겠다니까. 항상 좋은 건 남한테 미루고, 손해 봐도 참고 넘어가잖아.”
세상에, 이타적인 걸로는 너 따라가기 힘들 것 같은데, 하민.
“그건, 너도―”
“아니, 나보다는 네가 훨씬 심해.”
“반박해도 돼?”
“안 돼.”
건전한 의견 공유는 어디로 떠났을까. 공론장의 역할을 중시했던 하버마스, 당신은 무덤에서 울고 있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대화보다는 우기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너도 같이 하자, 이거지. 왜 너만 개인 영상 안 나와! 메이킹에서도 밤새우는 장면만 나오고, 아주 좋지 않아.”
“멘탈 수업에서 질리게 보고 있잖아.”
채하민은 곧바로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뿜었다. 요즘 채하민의 최애 컨텐츠라 그런지 즉효약이다. 이때 빠르게 말을 돌리고 컨텐츠의 취지를 지켜보도록 하자.
“아니. 안 넘어갈 거야. 무조건 같이! 순서 뒤로 밀려도 되니까! 지금 많이 바쁘니까, 조금 쉴 때 해도 돼, 나는.”
저런, 단호하고 재빠르네.
그렇게 말하며 채하민은 애절하게 두 손 모아 빌었다. 대체 무엇이 채하민을 이 정도의 일에 이렇게 애절하게 빌게 했을까. 어쩌다 내가 꼭 개인 영상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을까. 정말, 정답이 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어떤 곡 하고 싶은데?”
“뭐지, 지금 허락해 준 거야?”
“…응.”
“와, 좀 감동이다. 달력에 오늘 기록해 둬야지!”
채하민은 핸드폰을 토독 두드렸다. 미친놈.
“현재가 나한테 처음으로 놀자고 했던 날도 기록해 놨어.”
“…혹시 또 있어?”
“한 스무 개 정도? 이든이 형이 너한테 처음으로 멱살 잡힌 날도 기록은 해 놨어, 혹시 몰라서.”
“혹시 모르긴 뭐가.”
“나중에 칠십 먹고 얘기하면 다 추억이잖아.”
“…너, 제정신은 아니야.”
내 표정이 지금 어떨지 상상이 안 된다. 하여튼 류이든이나 채하민이나 안 맞기로는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채하민은 핸드폰에 입력을 끝냈는지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동화야, 너, 찍고 있는 프로그램을 생각해 봐.”
그건…, 그렇지. 그게 요즘 내 인생에서 제일 제정신이 아닌 거긴 하지.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옳은 말 앞에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어떤 곡을, 나랑 같이 부르고 싶은데?”
채하민은 해맑았던 미소는 어디다 내다버렸는지 난처하고 부끄러운 기색으로 몸을 배배 꼬았다.
“어젯밤에, 너, 얘기 듣고 계속 고민했는데…….”
“응.”
“음, 그거 말하려면, 약간, 야악간, 어두운 얘기해야 되는데.”
저런.
“말해 줘, 듣고 싶어.”
“그러니까, 술 한 병만 사 오자! 내일 우리 스케쥴 없잖아!”
너는 대체 사고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길래 그런 결론으로 떨어지는 거야. 가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문제다. 나쁜 쪽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그나마 다행일 뿐이다.
“…여기서?”
“아니면, 잠시만 나가서! 오늘 꼭 얘기해야 돼, 엄청 용기 냈단 말이야.”
* * *
“사표 준비 완료.”
정경우는 가슴 한편을 톡톡 치며 만족의 웃음을 흘렸다. 남이 더러운 짓을 하는 걸 가만 보고 있을 수는 있어도, 차마 제 손으로 그 짓거리를 할 순 없는 소시민적 양심의 상징이다.
제작 도중에 사표를 수리하면, 이 업계에 다시 발붙이기는 어렵겠지만, 그러면 앞에 앉아 있는 장해진에게 가서 무릎 꿇고 내부 영상 제작이라도 맡겨 달라고 부탁할 심산이다.
“그걸로 괜찮겠냐?”
“뭐, 어쩌겠어. 내가 폭로한다! 이런 건 용기가 안 나서 못 해도…, 어떻게 내 손으로 사람들 꿈 갖고 장난치겠니.”
“어우, 그래도 성급하게 내지는 말고. 네 오산일 수도 있잖아.”
“에이, 그냥 의지지. 시키는 대로 굴지만은 않겠다는. 진짜 그런 짓을 할는지는, 방송 나가봐야 알 것 같아. 그냥 엿 까라 그러고 완전 공평하게 편집해 버릴까?”
“사표 내기 전에 교체당하겠네.”
“해진아,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긍정적으로 말해 줘라…….”
“긍정은 무슨. 이직이 코앞이면서.”
“아직 몰라! 진짜 시키지만 않으면…….”
정경우는 맥주를 한 잔 다 마시고 어묵탕의 국물을 마셨다. 그런데도 속에 쌓인 사리 같은 압박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개 같은 쇼. 으, 내가 어쩌다 커리어를 이런 쪽으로 쌓아서…….”
하나의 쇼, 무수히 많은 장면 중에서의 선택, 그로 인해 엇갈리는 희비와 가끔은 가려지는 현실. PD라는 직업이 가지는 책임감이 정경우의 어깨를 짓눌렀다.
니체에서 찍을 때도 느꼈지만, 서바이벌 연출을 하기에는 자신은 독하지 못한 것 같다. 누군가를 떨어뜨리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참.
“야,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냥 분량 조금 많이 준 게 전부였잖아, 더넥니는.”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거기서도 거나하게 실수 한 번 했었으니까…….”
사회인의 술자리는 어째서 항상 한탄으로 이어질까.
“됐어, 오늘 그냥 먹고 죽어.”
“응, 조작시켜 봐, 사표 내면 그만이야!”
“우리 부사장님한테도 한번 말이나 해 둘게.”
정경우는 은근히 취했는지 조금은 풀린 눈으로 박자에 맞춰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며 소리쳤다.
“으응! 조작시켜 보라고! 이직하면 그만이야!”
“그 말투는 대체 언제까지 유행할지 모르겠다.”
그래, 누가 시킨다고, 부탁한다고, 혹은 자기가 더 큰 명예를 얻고 싶다고, 남의 꿈으로 장난질 치는 게 비정상이긴 하지.
그렇다고는 하지만, 사표, 게다가 HBS에서의 퇴사라. 장해진은 정경우가 어떤 마음으로 사표를 가슴 한편에 품고 있을지를 생각하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 * *
적당한 알코올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혈액 순환을 돕는다든지.
물론 ‘적당’이라는 말만큼 어렵고 추상적인 것도 없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의 미덕이라는 게 지키기 어려운 거겠지.
“후, 딱 반 잔!”
“…대체 왜 술이 필요한 거야.”
“슬픈 얘기 하려면, 용기가 필요해서! 그러니까 너도 취해야 해.”
그럼 오늘 술집 매상에 기여 많이 하고 내일 아침에 목격담으로 지동화 사생활 논란 뜨겠는걸. 술병으로 만리장성 쌓을 미친놈이라고.
애초에 술을 마셔서 말할 진실이면, 맨 정신으로도 충분히 말할 수 있다는 뜻 아닐까.
회사 근처라 대부분 우리 회사나 아니면 다른 기획사 사람들이 오는 술집, 따로 룸을 잡을 수도 있는 곳.
우리는 오늘 처음 오지만, 준성이나 예언 선배 말에 따르면 멤버끼리 한잔하러 오기 좋은 곳이라고 하길래 찾아왔다.
채하민은 반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나는 맥주잔에 나머지 술을 채웠다. 차마 품위 없이 병나발을 불 수는 없다. 그러고 나서도 채하민은 한참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중언부언하며 질질 끌었고, 나는 맥주잔을 홀짝이며 적당히 응해 줬다.
“좋다, 용기의 물약.”
“너, 제정신은 아니야.”
“자꾸 그러면 상처받는다!”
저런, 조용히 해야겠네.
“예전에, 알코올 없이 취했던 거, 기억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흑역사를 제 입으로 꺼내려면 참 많은 용기가 필요했겠네.
“나, 친구 없다는 얘기 했었잖아.”
채하민은 슬슬 취하는지 본론으로 들어갔다. 홀짝, 음, 정말 맛대가리 없어. 소주는 다른 술과는 달리 향이나 맛보다는 정말 알코올의 섭취에 중점을 둬서 그런가.
“그런 느낌 알아, 동화야? 사람들이 나한테 내가 이룬 것도 아닌 것만 찾을 때 느낌.”
“몰라.”
나한테는 내가 이룬 것 말고는 없었거든.
“돈, 아버지 인맥, 무슨 맨날 돈, 돈. 걸어 다니는 지갑 취급이고…….”
채하민은 안주로 시켜 놓은 가라아게를 하나 베어 물고는 계속 궁시렁거렸다.
“나 갓 엔터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곳에서…, 친구인 줄 알았는데……. 진짜 너무하지.”
중간에 생략됐어, 미친놈아.
“밥 먹고 화장실에 잠시 갔는데, 다녀와 보니까 애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내 카드로 돈을 긁고 있더라고.”
범죄네. 고소하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
“또 하루는…, 애들이 연습실에서, 내 얘기를 하고 있는데, 무슨 지갑 취급하면서……. 그랬거든. 사람인데, 진짜 그렇다, 그지.”
나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땅콩을 씹었다. 입에서 욕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지만, 굳이 뱉어내지는 않았다.
음, 그 인간들, 다들 망했으면 좋겠어. 데뷔에 실패하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해, 가족들에게 눈총받으면서, 자신은 왜 제대로 살지 못하는지 한탄하며 매일 밤을 지새웠으면 좋겠어.
“내 생일도 몰라, 내가 버섯 좋아하는 것도 몰라, 연습실 갈 때는 안 찾아도 밥 먹을 때는 찾고……. 진짜, 은근히 따돌리고, 그러면서 비웃고……. 걔네 말고는 친구라고 할 만한 애도 없어서, 나 약간 외로웠거든. 배부른 투정이긴 해도, 왜 나를 안 봐 줄까, 싶은 거야.”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철학적으로든, 심리학적으로든, 굉장히 문제인 짓거리다. 그러고도 저렇게 밝은 성격을 유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채하민이 얼마나 심지가 굳은 짐승인지 알 수 있다. 존경스러워.
채하민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는 알코올 향기에 점점 더 취해 가는지 붉은 얼굴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런데! 이제 두둥! 동화가 내 인생에 등장! 내 배경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가족이 누구든 신경도 안 쓰고! 가족이랑 연 끊어도 친구 해 줄 사람!”
채하민의 급발진에 나는 맥주잔을 마저 비워냈다. 차라리 취하고 싶은데 이럴 때는 부모님의 유전자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진짜 고맙단 말이야. 나, 자존감이 엄청 올랐다고! 우리 멤버들 전부 고맙지만, 특히 너한테 더 고마워……. 덕분에 많이 변했다, 이거지! 예전에는 나도, 어, 돈 말고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인가,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막 내가 자랑스러워.”
그, 미안한데, 부끄러우니까 닥쳐. 룸이 아니었으면 어떻게든 기절시켜서 끌고 나갔을 거야. 채하민은 거기까지 말한 후 숨을 깊게 들이켠 뒤 말했다.
“그래서 너랑 듀엣해야 된다는 거지.”
논리 구조를 지적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니까 나는 닥치고 땅콩을 마저 짓씹었다. 아직도 그 인간들이 망하기를 바라고 있기에,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하민.”
“응?”
“비밀 하나 얘기해 줄까.”
세상의 기본은 등가 교환. 비밀을 하나 받은 만큼, 나도 비밀 하나는 얘기해 줘야겠다. 어느새 소주를 몇 잔 더 마신 채하민이 내일 기억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도 참 변했어. 이렇게까지 감정적인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