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225)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225화(193/343)
지동화의 팬은 그저 말없이 입을 틀어막았다. 눈앞을 가득 채운 화면 속에서는 갖가지 색깔의 페인트가 이리저리 튀며 무대를 점점이 수놓았다. 귀로는 몽롱한 느낌이 들 정도의 곡조가 부드럽고 유려하게 흘렀다.
romanticism, 그런데 난 ‘검은 사각형’
skepticism, 그런데 넌 매사 낙천적
우리가 다른 걸 인정하고 나니
백아가 이해돼서 줄을 끊을까 봐
그녀는 가사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무대에 집중했다.
처음엔 단정하게 하나의 계통으로 통일됐던 각각의 무대. 그러나 이후 각자 솔로 파트를 할 때마다 서로의 무대에 찾아가 페어 안무를 추다 이내 페인트통을 들고는 상대방의 무대를 자기 색으로 덮어 버렸다.
조명을 받아서 묘하게 반짝이는 페인트가 책상이나 미끄럼틀 같은 조형물에 부딪히는 순간이 슬로우 모션으로 클로즈업됐다.
파도가 부서지는 것 같은 모양새, 아름답다. 정철이 괜히 파도치는 걸 세 번의 비유나 써 가면서 묘사한 건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제대로 볼 정신이 없었다. 젠장, 지동화가 맨몸 재킷만 아니었어도 무대에 더 눈이 갔을 텐데 개방적인 가슴팍 때문에 감기에나 걸리진 않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SNS 알람이 울리는 걸 보면 채하민의 팬도 난리가 난 게 분명했다.
문득 든 브레히트적 의문, 레비나스로 귀결된 정답
내 낯설게 느껴지는 습관, 그리고 그 해답인 너
그리고 프리코러스에서 강렬한 드럼 비트와 함께 등장한, 지동화가 쓴 게 분명한 가사까지 듣고 있자니, 정신이 혼미해질 것만 같았다.
동화야…, 단체 곡 아니라고 아주 그냥 제멋대로야! 왜 어제 과제할 때나 찾아본 이름이랑, 작년에 과제할 때 찾아본 이름이 함께 나오는데. 아주 멋대로야, 그냥. 또 팬페에 가사 해석 링크 난립하는 사태 만들려고!
후렴구가 되자 지동화와 채하민은 각자의 무대에서 나와 서로를 마주 봤다. 푸른 조명과 주황빛의 조명이 섞이며 묘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한 손엔 페인트통을 든 채였다.
그리고 베이스 리프가 울려 퍼질 때, 둘은 한 손에 들고 있던 페인트통을 서로의 어깨에 부었다. 어깨에서 시작된 페인트는 몸의 절반 부분을 잠식해 나갔다.
‘I’, made with pieces of you.
‘I’, getting colored by you.
지동화화 채하민은 서로의 어깨에 손을 한 번 툭 치고,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교차해 지동화가 주황색 무대로, 채하민이 푸른색 무대로 달려나갔다. 여전히 뚝뚝 떨어지는 페인트가 궤적처럼 남았다.
조명, 뒤섞이는 색깔, 어느새 페인트 때문에 구분이 모호해진 경계, 그리고 정장과 목에서 흘러내리는 페인트.
“…아, 뭔가 야한데. 왜지”
크흠, 그녀는 작은 소리로 기침했다. 아무리 봐도 별로 야할 이유는 없는데. 솔직히 얘네들 표정은 하이틴 드라마에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왜……. 옆에서 흘깃 보고 있던 친구가 조용히 웃음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민이가 좀, 좋네, 그, 몸이. 동화는 슬렌더 느낌이라 매끈하고.”
미안, 하민인 잘 못 봤어. 처음 볼 땐 동화 위주로 보고 두 번째부터 다른 멤버들 것도 같이 보거든.
그런 와중에 화면 속에서는 조명이 조금 어둡게 변해 있었다.
브릿지 파트, 드럼 비트가 사라져서 잔잔한 곡의 분위기. 지동화와 채하민은 그 속에서 페인트를 손에 묻혀서는 상대방에게 던지고, 팔을 잡아당기고, 그러다가는 웃으면서 서로의 뺨에 툭 페인트를 튀겼다.
그 모든 동작이 박자에 맞춰 유려하게 이어지면서 하나의 무용처럼 그려졌다.
Argued and laughed, tragicomedy
meanwhile we accepted, ‘I’ am my relation to you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친, 존나 예뻐…….”
나름대로 영어에는 자신 있었지만 브릿지의 마지막 가사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한 머리와는 달리 입은 제 할 일을 다 했다.
마지막 후렴구가 나오자 이제는 무대의 구분이 의미 없을 정도로 빨강, 노랑, 주황, 하늘, 파랑, 남색이 뒤섞여 있었다. 언제 이렇게 뒤섞였는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어느새.
‘I’, made with pieces of you.
‘I’, getting colored by you.
그제야 다시금 울리는 후렴구. 실질적으로 외국어랑 다를 바가 없었던 곡이지만, 무대 덕분에 뭘 말하려고 하는지는 잘 알 수 있었다. ‘서로 달랐지만 친하게 지내다 보니 닮아 갔어요!’라는 말을 왜 이렇게 어렵게 하는 걸까.
그녀는 조용히 ‘곡은 좋았어…, 무대도 개쩔었고…….’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지동화한테 뭘 바랄까, 하지만 조금은 살살 해 주길.
* * *
“제 탓이 아니에요.”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고 나서 시작된 메이킹 인터뷰. 나는 억울함을 호소해야 했다.
“채하민이 부추겼습니다.”
가사를 왜 저렇게 써놨냐는 단호한 말에 나도 단호하게 답했다.
“저는 평소처럼 쓰려고 했는데.”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인터뷰어로 잠시 탈바꿈한 카메라맨님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같이 쓰려고 했는데, 하민이 갑자기 ‘가사 다 네 식대로 써 버리자, 첫 무대 그거처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민이 쓴 가사도 제가 다 수정했습니다.”
내 깨알 같은 채하민 성대모사를 듣고 카메라맨님의 입술이 앙 다물렸다. 웃음을 참는 중인 표정, 멘탈 수업에서 자주 봐서 익숙했다.
“…왜 안 막으셨나요.”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하시는 말씀에 다시 억울함이 차오른다.
누구는 몰랐겠습니까. 이렇게 쓰면 곡이 좋아도 대중성은 망했다는 사실을.
저런 짓을 하는 건 서바이벌 초반부로 족했다. 그때야 떨어지려고 염병했던 거니까.
담고 있는 의미가 복잡해도 굳이 어렵게 말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이번 곡은 그렇게 어려운 의미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친구 만나서 사람이 변하는 게 신기해요!’라는 내용이니까.
나도 저렇게 쓰고 싶지 않았고, 분명 헛짓거리이며 팬분들이 당황해할 걸 알지만.
“…이게 월간 지동화라 그렇습니다.”
‘일단 네가 원하는 건 곡이 나빠지지 않는 선에서 다 맞춰줌’이 기본 모토인 컨텐츠라 그렇다.
게다가 원래 가사는 상대방이 쓰게끔 하는 게 원칙이었고, 이번엔 채하민이 가사를 쓰는 데 문외한이라 내가 대필한 셈이다. 물론 말리기도 하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만, 채하민이 의외로 고집이 세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부디 외국어 가사라 생각하고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어분은 쾌활하게 웃으시며 농담조로 말했다.
“그럼 이번 곡 반응이 싸늘하면, 하민 씨 탓일까요?”
뭘 당연한 걸 묻습니까.
“제가 가사 없이도 들을 만한 곡을 만들지 못했다는 뜻이라, 제 탓입니다.”
* * *
“예? 동화가 그렇게 말해요?”
채하민은 지동화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처음엔 말리나 싶었는데 나중에는 자기도 엄청 신나서 막 썼거든요. 저한테 읽어 주더니 ‘못 알아듣겠어?’라고 묻길래.”
채하민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랬는데 그거 보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니까요? 막 ‘음, 다행이군. 다시 쓸 필요는 없겠어.’라는 표정으로.”
깨알 같은 지동화 성대모사를 뽐내고, 채하민은 상처받았다는 듯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저는 처음에 저 비웃는 줄 알고 놀랐어요……. 어쨌든 정리하면 그런 거예요.”
그리고 쾌활한 웃음. 옆에서 몰래 지켜보던 지동화가 ‘상처받기는 무슨, 가르쳐 달라고 떼나 썼으면서…….’라고 생각하며 뒤돌아선 건 아무도 몰랐다.
“번지점프장에 데려간 건 전데, 동화가 뛴 거!”
“억지로 데려가셨나요?”
“그런데 동화가 번지점프 좋아하는 걸 알고 데려간 저. 착한 편이죠.”
“이건 동화 씨한테도 물어봤던 건데, 혹시 이 곡 반응이 싸늘하면, 동화 씨 탓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채하민은 입을 벌리고 눈을 토끼같이 뜨더니 이번에는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죠. 제 탓이죠. 제가 데려간 거니까.”
채하민의 ‘단호’를 그대로 표현한 것 같은 표정, 거기엔 강렬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켜본 카메라맨은 훈훈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 *
[교수님 전공 강의 계획서입니다.](‘Piecese’ 뮤직 비디오 링크)
전필입니다. 이번에 채하민 교수님이랑 교차로 들어오니 이 점 유의 바랍니다.
댓글
―아! 저 이분 강의 들었는데 드랍률 절반이라 A 잘 주세요!
└어? 저는 F 받았는데.
└전자는 채하민 교수님 채점, 후자는 지동화 교수님 채점입니다. 블로센스 대학교 최대 흑역사니까 글 내려주세요.
―제가 들은 강의 중에서 제일 힘들었지만 남는 건 많은 강의였습니다… 진심인 분들만 들으세요! 물론 전필이라 언젠간 들어야겠지만, 교수님 언제 바뀌나 하셔도 최연소 교수님이라 답 없습니다.
└자퇴각 떴나요?
[지 교수님 시험 관련 공지 뜸](동화&하민 메이킹 필름, 인터뷰 중에서 지동화가 나와 가사 관련 해명하는 부분)
과제 어렵게 내라고 한 건 채 교수였다는 사실. 지 교수님 마음 많이 아프셨을 듯
댓글
―제가 첫 강의 들었는데 그것도 어려운 건 똑같았어요… 이건 논란이 좀 되겠네요…
└아, 저 기억 남. 니체 전공 강의였죠? 채 교수님 탓은 조금 그렇긴 하네요..
└ㄹㅇ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ㅈㄴ 과제 개많아서 드랍할랬는데 교수님 얼굴 보고 참았다가 D0 받음. 재수강도 오지 말라는 강렬한 의지.
―아니 근데 동화가 가사 듣지 말라고 엄포 놓는 거 왤케 웃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끼리 즐길 곡이라 상관 없자너 어차피 킹반인들은 이런 곡 들을 리가 없다… 우리 같은 진성 룸넛들이 즐기는 영상.
―채교수님 왈) 어렵게 내자고 했더니 정작 어렵게 내고 좋아한 건 지교수였다… 시끌시끌
―그래도 모든 것에 관한 지식 시험 봤을 때보다는 괜찮네요! 이건 노래 관련 시험이라 가사 공부 좀 덜해도 곡이랑 무대만으로 즐길 수 있어서!
└ㄹㅇㅋㅋㅋㅋㅋㅋㅋㅋ 모모지 때 순간 드랍 고민 잠시 했었다고 ㅋㅋㅋㅋㅋㅋ
└모모지에 비해서는 순하다
지동화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봐도 무리수였던 선택이었지만, 루미너스들의 8할은 철학에 관심이 없고 ‘모모지’로 단련된 항마력, 그리고 ‘멘탈 수업’으로 단련된 헛소리 내성 덕분에 일종의 ‘밈’으로 소화될 수 있었다.
무대나 곡은 분명 좋았기에 ‘흑역사’보다는 재밌는 해프닝 정도로 여겨진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이 무대가 룸넛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으니.
‘멘탈 수업’ 마지막 화, 채하민 드라마 마지막 화, 그리고 최근 아제공 클립 영상 등으로 블로센스 관련 흔적이 남았던 많은 머글들. 힐링되는 컬러링 영상을 즐겨보던 일반인들.
그리고 어째서인지 철학 관련 영상―일부 룸넛들이 뮤비를 보고 해석을 위해 철학자 이름을 검색한 영향―을 보던 이들까지.
X튜브의 기묘한 알고리즘 체계에 이끌리고 말았다.
아름다운 영상과 전혀 모르겠는 헛소리. 그리고 이들이 현역 아이돌이라는 기묘한 사실. 이 모든 것들이 한 범벅이 된 영상이라서일까, 댓글창이 순식간에 에X리타임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교수님 재수강 예정인데, 혹시 추가 수업 영상은 없나요… 저 졸업해야 돼서…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
“…뭔데.”
그는 자신이 출연하고 있는 아제공의 연습실에서, 연습생들이 단체로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훗날 [아제공대학 지 교수님 수업 시간.jpg]이라는 제목의 클립으로 올라갈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