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n Idol Wasn’t on My Plan RAW novel - Chapter (228)
아이돌이 될 계획은 아니었다-228화(196/343)
인생이란 뭘까, 그게 궁금할 때가 있다.
정경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사직서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소파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눈앞의 TV에선 자기가 직접 편집한 프로그램이 진행 중. 오랜만에 찾아온 휴일에 ‘이게 맞나.’라는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다른 쪽으로 빠질까. 그냥 평범한 예능이나…….”
커리어를 버리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소리지만, 뭐 어때, 매운맛은 내 입맛이 아닌 것을 뒤늦게 깨달았는걸.
악의적 편집이 필요한 프로그램, 혹은 PD의 개입이 출연자의 커리어와 직결된 프로그램. 이런 것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
오늘 편만 해도 그렇다. D조를 객관적으로 편집한다고 했지만 와플 스튜디오 사람들한테는 신경 좀 써 주라는 말에 이렇게 편집했고, 이것만으로도 지나친 죄책감에 슬플 지경인데, 나중에 이보다 더한 일을 감당할 수는 있을까.
“없지. 무리야. 정말로.”
점점 더 확고해지는 마음. 점점 더 선명해지는 사직서에 새겨진 글자들. 자신이 반쯤 미친 인간이면 모를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
분량을 챙겨 주는 것만으로도 결선까지 갈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부정적 편집을 없애 주거나 호의적으로 편집하면 더 그렇다.
모두에게 공정하게 기회를 주는 서바이벌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사실 프로그램의 특성상 그건 불가능하다.
이 프로그램은 구조적으로 불공정할 수밖에 없다. 엄청난 외모, 엄청난 실력, 엄청난 매력을 가진 참가자는 그런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몰라도, 대개의 인간은 정해진 구조 속에서,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술을 마시면 이게 문제야. 생각이 많아져.
정경우는 내일 있을 사전 회의를 생각하며, TV를 껐다. 자는 동안만큼은 악몽을 꾸지 않기를.
* * *
회의실에서 스케쥴 때문에 따로 보기로 했던 지동화를 기다리며, 정경우는 커피나 홀짝였다.
일단 집중, 현재까지는 아무 말 없잖아. 우선은 하는 일이나 제대로 하자.
끼익.
문이 열리며 지동화가 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들어왔다. 평소의 무표정과는 달라서 뭔가 기묘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동화 씨, 오늘 표정이 좋아 보이네요.”
“아, 네. 최근에 읽은 책이 재밌어서요.”
아이스 브레이킹을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정경우는 덩달아 신나서 입을 달싹였다.
“뭐 읽으셨나요?”
지동화는 자리에 앉으며 자신과 눈을 맞췄다. 그런데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평소의 냉정한 인상이었다.
“그리스 역사책이었는데, 아테네에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장군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도 사람들의 투표로 추방됐습니다.”
어, 공기가 무거운데.
“그래서 처음에는 ‘아, 사람들이 보는 눈이 없었군.’ 하고 생각했는데, 후대에 살펴보니, 찬성 투표 중 대다수가 한 사람의 필체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뭐지. 이상해라.
“조작을 한 거더라고요. 재능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조작한 투표로 추방되어서, 고국에서 쫓겨나 제 실력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다니, 안타깝지 않습니까?”
“…안타깝네요.”
정경우는 목소리 끝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떨리는 기분이었다. 어, 뭐지, 다 들킨 기분. 아직 우리끼리도 공식적으로 확정된 게 없는 이야기를 동화 씨가 알고 있는 것 같아. 말도 안 되잖아.
“어쨌든, 재밌더라고요.”
지금 표정은 전혀 재밌어 보이지 않아요, 동화 씨. 아까 전의 미소를 돌려줘요. 일부러 내가 표정이 좋아 보인다고 물어보게 유도한 것 같잖아요.
“그런 일은…, 일어나면 안 되죠.”
“뭐,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동화 씨는 심드렁한 얼굴로 ‘아, 뭐, 음.’이라는 표정 그 자체였다. 자신의 말에 별로 동의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아니에요. 일어나면 안 돼요. 일어날 수 있어도, 일어나면 안 돼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시 투명한 미소를 지으면서 동의를 표하는 지동화.
정경우는 생각했다. 정말 깍쟁이 같으시네요, 동화 씨. 소개팅 상대였으면 친구랑 연을 끊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 정도는 아닌가?’ 고민해 볼 것 같아요. 이유는 순전히 얼굴.
“아, 그러고 보니, 어제 했던 본방송, 보셨나요?”
“…네.”
“정말 재밌었습니다. 저는 뒷이야기도 다 알고 있어서 그런지 더 보는 맛이 있었습니다.”
‘뒷이야기’에 과하지 않게 들어간 강세. 은근하게 거기로 주의를 끄는 말투. 웃고 있어서 더 무서워.
“시청자분들도 알면 더 재밌게 보실 수 있을 텐데, 이게 출연자의 특권인가 봅니다.”
뭐야. 씨. 아무런 언급도 없는데 주의받는 기분이야. 뭔데. 웬 그리스 역사 이야기로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어제 방송 이야기까지.
스토리텔링에는 자유 모티프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작가가 작품 전개에 필수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이야기에 끼워두는 경우가 있는데, 이 부분이 작가의 의도를 구성하는 데 굉장히 큰 기여를 한다는 개념이다.
마치 지동화의 ‘그리스 역사’가 자유 모티프처럼 느껴지자 알 수 없는 공포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러나 권력 구도가 말이 안 된다. 자신이 PD라는 이유로 더 대우받고 싶다는 얄팍한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출연자보다 아래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직접적인 언급도, 하물며 간접적인 언급도 없는데, 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판단력이 흐려지는 기분이다. 생각이 범람해서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을 벗어난 기분이다.
“PD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어제 방송됐던 회차가 ‘재미있었냐’라는 질문. ‘이게 재밌으면 안 되지 않을까.’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아무래도, 알면 알수록, 더 재미있을 수도 있겠죠.”
지동화는 약간 실망스럽다는 눈초리를 순간 지었다가 다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저거, 일부러 보여 준 걸까. 동화 씨가 표정 관리를 못 하는 사람은 아닌데.
“맞다. 아까 전 얘기에서, 그 장군이 죽은 이후에 아테네가 어떻게 되셨는지 아시나요.”
“글쎄요.”
“얼마 지나지 않아 펠로포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여 실질적으로는 무너집니다. 그러고 보면, PD님 말씀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나 봅니다.”
정경우는 숨을 잠시 골랐다.
그저 아이스 브레이킹. 아무런 의도도 없는 친해지고자 하는 대화.
과연, 정말? 지동화는 그런 성격이었던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뭐라 할 수 있나?
지동화는 오랜만에 눈까지 화사하게 웃으면서 몸을 앞으로 약간 숙였다.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다는 표시.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의미.
“의외로 PD님과 대화하는 게, 즐겁네요.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아이스 브레이킹. 지동화는 지금 자신에게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모든 대화가, 잘 짜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흘러나오는 대로 중얼거린 것에 불과하다고.
정경우는 어느새 움츠러들어 있던 어깨를 조금 털어냈다. 뭐였지, 방금까지. 순식간에 편해진 분위기에, 정경우는 그저 어안이 벙벙하다.
* * *
어젯밤에, 나는 퇴근하고 돌아오는 류이든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왜 또! 왜! 나 아무 잘못도 안 했어! 그냥 방송 가서 너 좀 특이하다고 한마디 한 게 다야!”
무시하고 계속 끌고 가자 류이든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미안! 약간 미친 사람 같다고 말하고도 왔어! 거짓말해서 미안!”
그건 몰랐는데. 어떻게 된 게 류이든은 아무 이유 없이 멱살을 잡을 때조차도 알고 보면 멱살을 잡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너, 그것도 재주야.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보통 밉다.─ 우리 리더. 사회성 하나로는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다.
나는 류이든에게 내일 할 일을 전달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청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내가 부탁을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류이든이 감격하고, 채하민에게 10분간 자랑─왜?─하고 채하민이 배신감이 가득한 눈초리─도대체 왜?─로 나와 류이든을 쳐다본 끝에.
“그럼, 이렇게?”
“좋다. 몸 전체를 약간 당겨서, 의자에서도 조금 떨어져 있으면 좋아. 그래야 시각적으로 확 다가온 느낌이라,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친해지는 기분이 들거든.”
“오케이.”
곧 있을 대화에서 어떤 제스쳐를 취해야 할지에 관한 온갖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류이든은 드디어 종이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다는 데 감격해서 박수를 쳐 댔다.
“내가 기른 최고의 제자.”
“내 인생 최고 불명예네.”
“…나 진짜 상처받아, 형.”
“네가 자꾸 그러니까 내가 너보다 나이 많은 줄 아는 분도 계셔.”
“너도 나한테 반말하잖아! 네 탓도 있어!”
류이든이 발끈해도 아무렇지가 않다. 우리 집 강아지라 나를 물 리가 없으니까. 류이든은 분한 눈초리에서 다시금 걱정의 눈초리로 돌아오더니 내 어깨를 툭툭 두 번 두드렸다.
“아니, 근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 PD님한테 은근히 사인 던지는 거면 이렇게 치밀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책 잡힐 필요 없잖아. 나중에 너도 HBS 나가면 어떡하게.”
“동화 형 싫다는 데는 저도 싫어요!”
애교 부리지 마. 안 그래도 몇 주 전에 은구 씨랑 상 씨 보고 너랑 나 떠올라서 죽고 싶었으니까.
“닥쳐. 우리 같은 직업은 불러줄 때 고마워해야 하는 법이야.”
“아, 맞다. 멘탈 수업 시즌 2 하자던데.”
“물론 가끔은 거절할 필요도 있겠지.”
그리고 다시 현재. 나는 PD님에게 앞으로 있을 방송의 계획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부터, 온갖 계산이 돌아가다가, 류이든의 말대로 하니 툭 하고 끊어졌다.
분위기를 조지는 법은 잘 알아도, 유하게 푸는 법은 잘 몰랐는데, 정말 대단해.
하지만 오늘 밤에 그는 잠을 자기 쉽지 않을 거다. 내가 분석한 바로, PD님은 죄책감에 쉽게 시달리고 얽매이는 인간. 보통 인간은 다 그렇지만 남들보단 조금 심한 타입이다.
막말로 서바이벌 막바지 그 사태가 아니었으면 1등이라는 등수로 데뷔하지도 않았을 텐데, 본인이 죄책감을 못 이겨 HBS에서 나를 섭외하려 노력한 사람이니까.
내가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 아는 거고, 알고 있다면 이후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종국에는 ‘나는 쓰레기야…….’로 귀결되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다. 일단 직접 편집할 인간의 죄책감을 더 크게 부풀리고 부풀려서, 하지만 그렇다고 퇴사하지는 않게끔만 부풀려서, 상부의 요구를 지키되 과해지지 않게끔만 하면 될 일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우리 PD님이 내 말을 너무 찰떡같이 해석하셔서 나를 미지의 존재처럼 여겨 주신 것도 큰 수확이다.
대체 저 인간은 뭘 믿고 저렇게 나대나 생각할수록, 쉽게 건드리기 힘들고, 은근하게 눈치를 보게 될 테다.
그러면 좋지. 나랑 한 약속도 있으니 나를 죽이지는 못하겠네, 너무 양심적인 우리 PD님이라.
PD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길, 나는 볼에 뭉친 근육을 누르며 핸드폰을 열었다.
─내 손자도 이런 부탁 하면 쌍욕 먹는 거, 아니?
톡톡, 나는 쾌활하게 손가락을 놀렸다.
‘전 부탁드린 적이 없습니다.’
전송하자마자 곧바로 돌아오는 답장.
─요망한 놈.
유전자는, 정말 대단한가 봅니다, 화양 씨.